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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75화 (75/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75화

그레이스는 얌전히 유모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어가는 레온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후 더 이상 레온의 등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레이스는 자신을 마중 나온 샐리와 함께 자신이 기거하는 별채로 돌아왔다.

샐리가 준비해 놓은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샐리가 골라 놓은 아이보리색 네글리제와 흰 가운으로 갈아입은 그레이스는 얌전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샐리는 그레이스가 침대에 눕자 그 안을 데우기 위해 넣어 두었던 뜨거운 물주머니를 빼낸 후 누워 있는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응, 샐리도 잘 자.”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테이블 옆에 놓인 종을 흔들어 주세요. 바람처럼 달려올게요.”

살짝 너스레를 떤 샐리는 침실 문을 닫고 나갔고, 그레이스는 어둠이 내려앉은 침대 위에서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기를 잠시, 곧 몰려드는 잠을 이기지 못한 그레이스는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동그랗고 밝은 달이 어두운 하늘의 정중앙에 자리 잡은 시각.

불침번을 제외하면 저택 내 모든 사람이 잠이 든 고요한 그 시각, 잠에서 깨어난 이가 있었다. 그레이스였다.

그녀는 잠이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미 입고 있던 가운 위로 잠이 들기 전 벗어 두었던 코트를 걸쳤다.

도움을 주는 이가 없어서 그런지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코트를 걸친 그녀는 갑자기 방 안을 헤맸다. 그러더니 그녀는 닫힌 서랍들을 전부 열어 그 안의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툭, 탁. 달그락.

그레이스는 잘 정돈된 서랍 속 물건을 전부 꺼내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녀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초점이 없는 멍한 눈으로 물건을 집어 들었다 등 뒤로 던지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드디어 그레이스가 손에 쥔 것은 날카로운 만년필이었다. 그녀는 엉성하게 여민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온 달빛에 날카로운 만년필의 촉을 비춰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찾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한껏 어질러진 침실을 뒤로 한 채 닫혀 있는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레이스는 한 손으로는 날카로운 만년필을 쥔 채 길게 이어진 복도를 정처 없이 걸었다. 여전히 초점 없는 그레이스의 두 눈과 멍한 얼굴은 왜 이 시간에 침실 밖을 나온 건지,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듯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현재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한 그레이스의 머릿속에는 오직 단 한 가지의 목소리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죽고 싶지 않아?]

‘응. 죽고 싶지 않아.’ 여자의 것이라기엔 낮고, 남자의 것이라기엔 높은 그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대답했다. 그러자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며 웃던 그 목소리는 그레이스를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죽기 전에 죽여야지.]

‘어떻게?’

[네 불행의 원흉을 제거해야 해.]

‘내 불행의 원흉이라는 게 뭔데?’ 그레이스는 선문답처럼 이어지는 목소리와의 대화에 집중하며 정처 없이 복도를 걸었고, 계단을 내려갔다.

혹여 귀한 공작 부인의 숙면에 방해가 될세라, 최소한의 불침번만이 지키고 있는 탓에 그 누구도 그녀가 계단을 내려와 별채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선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듣고 싶어? 궁금해?]

‘응.’

[그럼 밖으로 나와.]

그레이스는 마치 자아가 사라진 사람처럼 머릿속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닫힌 문을 열었다.

그 후 그녀는 낮은 계단을 내려와 달빛이 내려앉은 저택의 오솔길을 걸었다. 타박, 타박. 아직 긴 겨울이 끝나지 않아 차갑게 얼은 땅을 그레이스는 부드러운 천 슬리퍼 차림으로 활보했다. 그 때문에 살짝 드러난 발목과 발뒤꿈치가 얼어 빨갛게 변했지만 그레이스는 그것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꾸만 걸어 나갔다.

그런 끝에 그녀가 멈춰 선 곳은 아서의 집무실이 위치한 동쪽 탑 아래 작은 정원이었다.

늘 레온과 함께 산책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그곳은 밤이 되자 사뭇 을씨년스러웠다. 그레이스는 눈이 내려앉은 나뭇잎과 군데군데 부러진 가지에 드러난 손의 살갗이 베이고 발목에 눈이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이윽고 그녀가 여전히 불이 켜진 아서의 집무실 아래에 섰을 때, 그레이스의 머릿속 ‘목소리’가 명령했다.

[멈춰.]

[그래, 거기. 거기에 멈춰 서.]

그레이스는 머릿속 목소리의 명령에 따랐다. 마치 그 목소리가 인형사이고 자신은 그 목소리의 마리오네트가 된 것처럼.

그러자 목소리가 또다시 소름 끼치도록 높은 목소리로 웃었다. 꼭 자신이 바라던 대로 일이 잘 풀려 기쁘다는 듯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던 그 목소리는 곧 차갑게 명령했다.

[그럼 이제, 네가 들고 있는 ‘그것’으로 네 어깨를 찔러. 그래야 널 불행하게 한 원흉의 눈에 더 잘 들어올 테니까.]

목소리의 명령에 초점 잃은 그레이스의 고개가 가만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러더니 그레이스는 망설임 없이 자신이 쥐고 있던 날카로운 만년필로 자신의 어깨를 내리찍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촉은 금세 그레이스가 걸친 두꺼운 코트를 찢을 듯 파고들었다. 그레이스는 그 날카로운 만년필이 두꺼운 코트를 뚫고 자신의 어깨를 찢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자신의 어깨를 찔렀다. 푹, 푹, 푹.

“부인!”

그러던 그때, 아서가 다급히 그녀를 부르며 달려왔다.

때마침 그곳에서 집무를 보고 있다, 열린 창밖으로 들리는 기묘한 소리에 밖을 내다본 순간 보이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곧장 아래로 내려온 아서는 자신의 아내인 그레이스가 초점 없는 눈으로 연신 만년필로 자신의 어깨를 찌르는 기괴한 모습에 경악했다.

아서는 두 손으로 조금 억세게 아내 그레이스의 양 손목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부인! 이러다 크게 다치면 어쩌시려고요!”

그러나 여전히 멍한 눈의 그레이스에게는 아서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모든 관심과 집중은 자신을 ‘살려 줄 방법’을 말하는 머릿속 ‘목소리’에게만 가 있었다. 그레이스는 어느새 잠잠해진 머릿속 ‘목소리’를 향해 애원하듯 소리쳤다.

‘빨리 말해! 시키는 대로 했잖아! 이젠 어떻게 해야 해?’

그러자 목소리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눈앞의 저 남자, 네 불행의 원흉을 찔러! 그럼 넌 살 수 있어!]

목소리가 내리는 명령에 그레이스는 곧장 날카로운 만년필을 쥔 손으로 아서의 가슴께를 내리찍었다.

“윽!”

그러나 날카로운 만년필의 촉은 다행히 아서의 견장 위에 박혔다.

아서는 기민하게 몸을 틀며 또다시 날카로운 펜으로 자신을 찌르려 다가오는 그레이스의 목 뒤를 내리쳤다.

그러자 그 힘에 그레이스의 멍한 눈 위로 슬며시 초점이 맺혔다. 그러더니 그레이스는 조종하던 끈이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쥐고 있던 만년필을 툭 바닥으로 떨구며 아서의 품 위로 쓰러졌다.

아서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고른 숨을 내뱉는 그레이스를 소중히 안아 들고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던 그때, 동쪽 탑에서 불침번을 서던 기사들이 조금 전 아서의 낮은 신음을 듣고 달려왔다.

아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그레이스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기사들의 눈에 고요히 잠이 든 것처럼 정신을 잃은 그레이스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곧 발로 떨어진 만년필을 걷어차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호들갑 떨지 마라.”

“네? 하지만 조금 전 분명 각하의 신음 소리가 들렸는데…….”

“품에 안긴 분은 공작 부인이 아닙니까? 이 시간에 어쩐…….”

아무 일도 없었다 대꾸하는 아서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조금 전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기사들은 미심쩍은 얼굴로 아서와 그 품에 안겨 미동도 없는 그레이스를 살폈다.

단순히 사이 좋은 두 부부가 늦은 밤 밀회를 가졌다 보기엔 그 품에 안겨 움직임이 없는 그레이스의 모습이 수상했고, 아서의 말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고 보기엔 아서의 품에 늘어진 그레이스의 손에 난 생채기와 그녀의 발에 매달려 있는 흙투성이의 실내용 슬리퍼가 수상쩍었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었다고 의심하기엔 제 주군인 아서 펠릭스 공작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 기사들 사이에서 의혹만 커져 가던 그때, 날카로운 눈으로 부하들을 노려보던 아서는 제 품에 있는 그레이스를 공주님처럼 번쩍 안으며 말했다.

“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각하. 하나!”

“혹여 이 일로 불미스러운 소문이 도는 날엔, 경들이 함부로 입을 놀린 것이라 보고 책임을 묻겠다.”

아서는 기사들을 향해 싸늘한 경고 한마디를 남긴 후 곧장 그레이스의 별채로 걸어갔다.

그곳은 제 주인이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을 벌였는지에 대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아서는 내심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별채에는 성 밖에 가족을 두고 드나드는 이들도 꽤 되었기에, 아서가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어떻게든 말이 새어 나갔을 터였다. 그를 스쳐 지나갔던 다른 여인들의 일처럼.

‘보는 눈이 많으면 듣는 귀도 많은 법이고, 듣는 귀가 많으면 그 일을 멋대로 과장해 떠드는 입도 많은 법이니.’

아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조금씩 미쳐 있던 그녀들이 자신을 둘러싼 흉측한 소문들에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미쳐 갔던 모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그래서 아서는 무서웠다. 그 공포심은 그를 자꾸 빨리 움직이게 했다.

당장이라도 품에 안긴 사랑하는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누군가 그녀의 지난밤 행적에 대해 물으면 그녀는 줄곧 자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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