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74화
그때, 샐리는 선대의 펠릭스 공작과 펠릭스 공작 부인이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같은 시간대에 남편은 형체 없는 화살에 맞아 죽고, 부인은 아이를 낳다 죽는다는 게 과연 단순히 불행한 우연의 일치일까. 게다가 그 두 죽음을 조사한 후 자신의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보인 행동까지.
이 일에는 ‘마법’이 연관되어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아서는 그 가능성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앨버튼 공작의 수첩에 적힌 내용에 대해 아서에게도 말해야겠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먼저 샐리를 향해 말했다.
“이미 물었던 일에 대해 또 물어서 미안했어, 샐리.”
“아닙니다. 그럼 더 물으실 건 없으신가요?”
“응. 고마워.”
“또 물을 것이 있으시거나, 제가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레이스의 감사 인사를 들은 눈치 빠른 샐리는 곧장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듣고 허리를 깊게 숙인 후 응접실 밖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은 응접실 안. 아서는 생각보다 더 빨리 샐리를 밖으로 내보낸 그레이스를 향해 물었다.
“샐리에게 충분히 다 물으셨습니까?”
“아뇨, 아직 물어볼 것이 있기는 한데…….”
“그럼 다시 샐리를 안으로 들일까요.”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아서, 당신과 나만 알았으면 좋겠어서 일부러 내보낸 거니까요.”
“나와, 당신만요?”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아서에게 그레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네. 사실 나도 당신처럼 동화도 아니고,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상대방의 목숨과 엮어 되살리는 마법이 존재한다니 그런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건, 내가 앨버튼 성에서 훔쳐 온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수첩에서 그 사람이 두 분의 죽음에 대해 암시한 문장 때문이에요.”
“……앨버튼 공작이 직접적으로 그 마법에 대해 언급한 겁니까? 아버지가 어머니를 되살렸다고요?”
아서는 경악한 눈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레이스는 놀라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 아서의 입술에 자신의 검지를 가져다 댄 후 조용히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언성을 낮춰 줘요. 이래서야 샐리를 내보낸 보람이 없잖아요.”
“……미안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말이 사실입니까? 앨버튼 공작이 수첩에 정말 그런 말을 써 놓았습니까?”
“명확하게 아버님이 어머님을 마법으로 살렸다고 언급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어머님의, 그러니까 에일린 황녀님의 시신에서 해석할 수 없는 고대 마법의 문양을 발견했고 그것이 ‘어떤 저주’인 것 같다고 언급했어요.”
“……저주, 말입니까.”
“네. 그리고 그 기록을 남긴 날로부터 정확히 6개월이 되던 날, 아버지는 그 마법에 대해 알아냈다고 적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황제 폐하께 보고했고, 그 보고로 황제는 기뻐했다고도 했죠. 또…….”
“……또 뭐라고 했습니까?”
그레이스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잇자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을 한 아서가 채근하듯 말했다. 그레이스는 착잡한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그 마법을 이용해 황실로부터 어마어마한 권력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며 기뻐했어요. 그 문장에는 끝 모를 기쁨과 탐욕으로 가득했죠.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의 불행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이에요. “
“…….”
“그래서 난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을 거란 확신을 떨칠 수가 없어요. 만약 어머님의 기적적인 생환과 두 분의 불행한 죽음에 어떤 마법의 힘도 연관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어머님의 시신에서 발견한 고대 마법은 뭐죠? 그리고 그 힘으로 알아낸 것은요? 또 그 힘을 이용해 황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제안은요?”
그레이스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상황들과 여전히 명확히 알아내지 못한 진실,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음흉한 계획과 혹여 그로 인해 자신과 아서, 레온이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리며 불안해했다.
진실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단서는 계속 주어지지만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안개로 가득 뒤덮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벽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저도 모르게 격앙된 목소리를 내자, 아서는 당황과 죄책감이 섞인 얼굴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진정하세요. 네?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부인께서 어렵게 알아내신 일인데, 나보다 더 현명하고 마법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부인께서 어련히 다 알고 파악하셨을 텐데. 짧은 지식으로 함부로 재단하고 결론을 내려 미안합니다.”
“……아뇨. 아서,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나 또한 아버지의 수첩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샐리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었을 거예요.”
또한 문득 자신의 머릿속을 점령하곤 하는 그 ‘환상’들이 없었다면 절대로 알아내지 못했으리라.
그레이스는 대체 그 환상들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내린 ‘저주’의 실체인 건지도 반드시 알아내리라 다짐했다.
모든 일은 얼핏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여도, 신이 만들어 낸 촘촘한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 분명 이 환상도 선대 펠릭스 공작 부인의 시신에서 발견했다던 그 ‘고대 마법’과 연관이 있을 거라 막연히 확신하며 그레이스는 자신을 안은 아서의 팔 안에 머리를 기댔다.
아서는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그레이스를 꼭 껴안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뇨. 부인께서는 제 사과를 받아 주셔야 합니다. 나는 어리석었고, 또 옹졸했으니까요.”
“……아서.”
“어쩌면 나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 마법이나 저주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뒤에 내 힘으로는 감히 복수조차 힘든 자가 꾸며 낸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직면하는 게 말입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해요. 아버지의 기록대로라면 이 일엔 황실이, 당신의 사촌이 연루되어 있는 거니까요. 누구나 자신이 피를 나눈 혈육에게 배신당하게 되면, 당하고도 믿고 싶지 않아 하죠. 제가 그랬듯이요.”
그레이스가 첫 번째로 자신이 죽음을 맞았던 순간에 대해 회상하며 씁쓸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아서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그녀를 살짝 떼어 냈다. 그 후 아서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바라보며 다정히 말했다.
“맞아요. 그 말대로, 겁쟁이인 나는 또다시 상황으로부터 피하고자 했습니다. 나만 모른 척하면, 그저 내가 ‘저주받은 괴물 공작’으로서 조용히 살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아서, 그런 말 마요. 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네. 이제는 피하지 않겠습니다. 부인께서 나의 부모님을 위해, 나와 레온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에 도달해 주었듯, 나 또한 적극적으로 내게 그들이 뒤집어씌운 저주의 비밀과 부모님의 죽음에 얽혀 있는 진실에 대해 다가가겠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우리.”
그레이스는 자신을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아서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아서는 꿀처럼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느릿하게 눈을 감고, 천천히 서로의 얼굴을 향해 가까워졌다. 조금씩, 거리를 좁히던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 * *
응접실에서 따뜻했던 시간을 보낸 후, 성 내 집무로 바쁜 아서와 헤어진 그레이스는 레온과의 약속대로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일이 밀려 점심도 겨우 시간을 낸 것이라던 아서는 저녁 식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레이스는 내색하지 않았다.
점심 식사 때 있었던 일로 적잖이 놀랐을 레온을 위해 귀족의 예법이나 격식 따위는 전부 내려놓은 채 레온과 단둘뿐인 저녁 식사를 즐겁게 보냈다.
그레이스와 레온은 서로의 장난과 농담에 자지러질 듯 웃었고,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시종들과 시녀들 또한 화목한 두 가족의 모습에 입가를 가리고 피식 웃어 댔다.
그렇게 족히 서른 명은 앉을 수 있는 긴 식탁에서 두 사람은 서로 어깨가 닿을 만큼 의자를 딱 붙이고 달디단 후식을 나눠 먹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다.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래? 레온이 재미있었으면 앞으로 종종 이렇게 같이 식사할까?”
“종종 말고 매일같이 먹어요!”
“그래. 레온이 바쁘지 않다면, 나는 언제든 좋아.”
식사인지 놀이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그레이스와 레온은 연회장 밖을 나와 즐거웠던 저녁 식사에 대해 떠들었다.
그레이스는 즐거움으로 상기된 레온의 발그레한 뺨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다정히 웃었고, 레온은 그 다정한 손길을 즐기며 행복해했다.
“마님, 이제 레온 님은 잠자리에 드실 시각입니다.”
그때 레온의 유모가 두 사람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레이스는 그 말에 흘긋 눈을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의 말처럼, 슬슬 레온이 잠자리에 들 시각이었다. 그레이스는 시무룩한 얼굴로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있는 레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레온, 그럼 잘 자고 내일 보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레온은 이대로 그레이스와의 즐거웠던 시간을 끝내기 못내 아쉬운 얼굴을 한 채 그레이스에게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