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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72화 (72/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72화

그 후, 약 10분 정도 황태자와 마리안느 앨버튼의 결혼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앨버튼 공작은 기어이 황제에게서 확답을 받고 난 후에야 태양의 방에서 물러갔다.

“그럼 폐하, 소신은 추후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알현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의 대부분을 얻은 덕분인지, 앨버튼 공작은 더없이 만족한 얼굴로 황제를 향해 예를 표한 후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황제는 물러가라는 자신의 허가를 받기도 전 등을 돌려 나가 버린 앨버튼 공작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노려보다, 그가 사라지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왕좌 위에 쓰러지듯 기댔다.

“폐하, 침실로 가시겠습니까?”

시종장 로쉬 백작은 아주 잠깐 사이 족히 십 년은 늙어 버린 듯 지친 얼굴의 황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황제는 지쳐 늘어진 눈꺼풀을 느릿하게 올려 로쉬 백작을 흘긋 바라보고는 곧 눈을 감으며 말했다.

“……됐네. 짐은 왕좌에서 잠깐 눈을 붙일 테니, 그대는 잠시 물러나 있게. 혼자 있고 싶네.”

“알겠습니다, 폐하. 언제든 소신을 부를 일이 생기면 이 종을 흔들어 주십시오.”

로쉬 백작은 지친 눈을 질끈 감은 황제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후 태양의 방 밖으로 나왔다.

그 후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문밖에 서 있는 시종들과 근위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30분 정도 자리를 비울 것이다. 그사이 태양의 방으로는 그 누구도 들이지 않도록 해. 그리고 혹여 폐하께서 나를 찾으시거든 지체 없이 황태자궁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예, 시종장님.”

로쉬 백작의 명령에 시종들과 근위기사는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로쉬 백작은 그 분주한 모습을 곁눈질로 한 번 살피고는 곧 빠른 걸음으로 궁의 이어진 긴 복도를 걸었다.

목적지는 조금 전 그가 언급했던 대로 황태자궁이었다. 단숨에 황제의 본 궁에서 황태자궁으로 건너온 로쉬 백작은 황태자의 응접실을 지키고 있던 근위기사에게 물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안에 계신가?”

“예. 전하께선 로쉬 백작께서 오시길 기다리며 짧은 티타임을 갖고 계십니다.”

“고해 주게.”

근위기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닫혀 있던 응접실의 문을 짧게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는 근위기사의 말처럼 기다렸다는 듯 황태자 오웬의 답이 돌아왔다.

“들어오라고 전해.”

“예, 전하.”

이윽고 안에서 문이 열리고, 로쉬 백작은 응접실 중앙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황태자 오웬을 알현했다.

오웬은 자신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이는 로쉬 백작을 가만히 바라보며 다 식어 버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곁으로 다가온 로쉬 백작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 앨버튼 공작이 부황을 알현했다지?”

“예, 전하.”

“구체적으로 어떤 말이 오갔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전하. 한마디도 빠짐없이 전부 전하께 고하겠습니다.”

로쉬 백작은 오웬의 명령에 조금 전까지 황제의 알현실에서 오갔던 이야기들을 전부 그에게 전했다.

드디어 ‘제물’인 펠릭스 공작 부인의 저주가 완성되었다는 말과, 앨버튼 공작이 현재 황태자의 상태를 언급하며 마리안느 영애와의 결혼을 재촉한 것까지 전부. 로쉬 백작의 말이 이어질수록 오웬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로쉬 백작의 짧은 보고가 끝나자 오웬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앨버튼 공작은 내가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까 봐 겁이 나는 모양이군. 하긴, 나만큼 부황을 겁박하기 좋은 약점이나 먹잇감도 없을 테지.”

“듣기 민망합니다, 전하. 그런 말씀은 부디 삼가 주십시오.”

“왜? 사실이지 않은가. 더 노골적으로 말해 줄까? 앨버튼 공작이 지금 두려워하는 게 뭔 줄 아나? 그건 바로 내가 마리안느, 그 마녀와 아이를 만들기도 전에 콱 죽어 버리는 거야. 그렇게 되면 지금껏 들인 재물과 시간이 전부 먼지처럼 날아가고, 최악의 경우 부황으로부터 잔인하게 내쳐서 끝내는 귀족 부인들을 연쇄살해한 대가로 가문이 망하는 결말을 맞을 테니까.”

“……전하.”

“말해 놓고 나니 좀 구미가 당기는데? 죽는 건 싫지만, 죽어서 그 독사 같은 앨버튼 공작이 죄인으로 형장에 끌려가는 꼴은 꼭 보고 싶군.”

오웬은 자신이 쏟아 내는 말에 로쉬 백작이 난처한 표정을 짓든 말든 연신 빈정거렸다.

감히 황태자인 자신을 종마 취급하며 제 목숨을 대가로 손끝 하나 닿기도 싫은 여인을 아내로 들이미는 그 빌어먹을 앨버튼 공작이 눈앞에서 망할 수만 있다면 황태자궁의 10년치 예산을 전부 다 쏟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통탄스럽군.’

그러나 자신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오웬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죽거나 미쳐 버린 펠릭스 공작 부인들의 피로 겨우 억눌러 온 저주가 곧 그 매서운 이빨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앨버튼 공작의 말대로 자신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넘보지 말아야 할 힘을 손에 넣고 그 힘으로 인해 인간들로부터 신으로 추앙받은 끝에 초대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손끝에 맺힌 피부터 썩어 들어가는 저주를 받아 스무 살이 되면 죽었어야 할 이 몸에게는.

오웬은 고통스럽게 욱신거리는 제 왼팔을 오른손으로 꾹 잡아 누르며, 로쉬 백작을 향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앨버튼 공작이 그 ‘저주’가 완성되었다고 말했나?”

“예, 그렇습니다. 전하. 이제 남은 것은 그레이스 펠릭스 공작 부인을 ‘한 번’ 죽게 하는 일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독살이 벌어지게 될 무대’로는 전하와 마리안느 영애의 결혼식이 좋을 것 같다고 했고요.”

“……그래?”

로쉬 백작의 대답에 오웬은 초조해하며 손톱 옆의 여린 살을 물어뜯었다.

앨버튼 공작이 거짓을 고했을 리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만일 그것이 시간을 끌기 위한 거짓말이었다면 앨버튼 공작은 굳이 직접 황제를 찾아와 마리안느와의 결혼 날짜를 내놓으라 종용하지 않았을 테니.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레이스 영애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 건가.’

그 올곧은 눈을, 괴물도 사람으로 봐주는 선량한 눈을 바라보며 자신이 과연 그녀의 심장에 칼을 겨눌 수 있을까?

오웬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분명 할 수 없을 터였다. 아마 자신은 그녀를 찌르는 대신 그녀의 발치 앞에 단검을 던지고, 괴물 공작인 아서 펠릭스를 사랑해 주었듯 그보다 더 불쌍한 괴물인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 애원하며 빌게 될 것이 뻔했다.

혹자는 이런 자신더러 바보 같다 비웃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제대로 마음 한 번 나눠 본 적도 없으면서, 오로지 그녀가 괴물 공작을 인간으로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껏 그 어떤 사람도 괴물을 ‘괴물 그 자체로’ 사랑해 준 사람이 없었다는 걸.

괴물을 사랑하고, 설령 그 사랑 때문에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말하며 그 곁에 남겠다 한 여자는 오로지 그레이스 앨버튼 그녀뿐이었다.

‘세상에 그녀 같은 사람은 또 없어. 이 세상 전부를 뒤져도, 그녀 같은 마음을 가진 이는 없어.’

그러니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살아서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 자신도 살고 그녀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오웬은 조급함이 서린 눈으로 로쉬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그녀에게 걸린 저주를 돌릴 방법은 없을까?”

“불가능할 겁니다. 설령 그 괴물 공작의 마음에 들 법한 다른 숙녀를 찾는다고 해도, 그 괴물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랑하게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결국,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여야만 하는 걸까. 오웬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거칠게 흐트러뜨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나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오웬은 가만히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로쉬 백작을 향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내려진 초대 신의 저주를 푸는 방법은 정말,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자의 피를 뒤집어쓰는 것’ 말고는 없는 건가? 정말, 그 방법밖에는 없는 건가? 그 교활한 앨버튼 공작이 부황에게 권세를 잡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로쉬 백작은 어떻게 생각하지?”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전하의 운명에 걸린 저주를 처음으로 알아낸 것은 대신관이었잖습니까. 그리고 그 대신관은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켰죠. 전하의 비밀이 앨버튼 공작에게 알려진 것은 황제 폐하께서 전하의 저주를 풀기 위해 은밀히 공작을 찾으셨을 때뿐이었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때 앨버튼 공작은 부황께 마리안느와 나를 결혼시킨다는 조건으로 이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오겠다 했지! 빌어먹을!”

오웬은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치며 또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이 빌어먹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웬은 연신 스스로의 운명을 자조했다.

“정말이지 초대 신도 그렇고, 운명의 여신도 그렇고 하나같이 다 앨버튼 공작 그 독사 같은 놈의 편에 서지 못해 안달이 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이 이렇게 돌아갈 수가 있지?

……그놈이 대대로 펠릭스 공작가에 내려오는 힘에 대해 알아낸 것도, 그리고 하필 그레이스가 그놈의 딸인 것도! 그리고 그 괴물 놈이 그레이스를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게 된 것도 다! 전부 다! 어쩜 이렇게 그놈의 편의에 맞게운명이 흘러가냔 말이야!”

“저, 전하! 진정하십시오! 황태자궁에는 듣는 귀가 많습니다! 혹여 이 비밀이 새어 나가 펠릭스 공작의 귀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모두 끝장입니다!”

“알아! 빌어먹을! 나도 안다고!”

스스로의 운명에 자조하며 한탄하던 오웬은 결국 분통을 터트렸다.

거세게 터져 나온 오웬의 목소리에 로쉬 백작은 깜짝 놀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던 오웬이 날카로운 눈으로 로쉬 백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로쉬 백작.”

“예, 말씀하십시오. 전하.”

“현재 펠릭스 공작이 제 아버지처럼 ‘죽은 자와 자신의 목숨을 연결해 되살릴 수 있는 힘’을 물려받은 건 확실한가?”

“……앨버튼 공작의 말로는 그렇다고 합니다. ‘푸르고 붉은 오드아이’는 신이 내린 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진 자의 표식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래? 그럼 그 마법의 힘이 발동되는 조건은 뭐라고 했지?”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 가는 이를 보았을 때, 그자를 제 목숨을 바쳐도 좋을 만큼 간절히 살리고 싶다 열망하면 발휘된다고 들었습니다. “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어지는 로쉬 백작의 설명에 오웬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 독사 같은 앨버튼 공작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 아비를 꼭 닮은 마녀 마리안느와의 결혼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고, 그들 때문에 죽기에 그레이스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 제국에서, 아니, 모든 세상을 뒤져도 하나밖에는 없을 ‘괴물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여자’를 죽일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고, 오웬이 골머리를 앓고 있던 그때였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악마 같은 지혜가 떠올랐다.

오웬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밀려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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