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71화
그 결혼은 앨버튼 공작이 황태자에게 씐 초대신의 저주를 풀어 주겠다 약속하며 내건 조건이었으니 응당 따라야 함이 맞았으나, 문득 ‘절대 마리안느 앨버튼과 결혼할 수 없다’며 애원하던 아들의 모습이 문득 황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왜 선뜻 대답을 못 하십니까, 폐하.”
그러자 잠깐 사이 황제의 표정에서 일말의 망설임을 기민하게 읽어 낸 앨버튼 공작은 날카롭게 황제를 향해 재촉했다.
무릇 마법사의 의리란 ‘계약자’에게만 지켜지는 것. 감히 마법사를 이용한 후에 계약을 어긴다면, 황제라도 그 처절한 복수를 피해 갈 수 없는 법이었다.
‘황태자, 그놈이 뭐라고 하며 부황과 모후를 구워삶았든 상관없어. 이 결혼은 반드시 진행될 테니까.’
지금껏 그 결혼 약속 하나만을 믿고 들인 재물이 얼마이고, 이 손에 묻힌 피가 얼마인가. 그를 생각하면 이 약속은 신이라도 깨게 둘 수 없었다. 앨버튼 공작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폐하. ‘결혼’이 없으면, 황태자 전하의 ‘미래’도 없습니다.”
그 말에 망설이던 황제의 표정이 급변했다. 황제는 굳은 표정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 알고 있네. 단 한 순간도 그대와 한 약속을 잊은 적 없네. 그리고 그 약속이 진 무게도 잘 알고 있어.”
“그러셔야지요.”
“결혼은 재정관과 집정관을 불러 최대한 빠른 시일에 진행할 수 있도록 명령해 둘 테니 걱정 말게. 신관으로부터 거룩한 날을 받으면 곧장 앨버튼 공작가로 로쉬 백작을 보내도록 하지.”
“폐하의 세심한 배려에 소신 앨버튼 공작,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럼 폐하로부터의 서신을 기다리는 동안, 소신은 제 여식에게 황태자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잘 배양할 수 있도록 교육하겠습니다.”
“……그래. 기대하겠네.”
황제의 확답에 앨버튼 공작은 언제 은근한 협박을 늘어놓았냐는 듯 비굴한 가신의 얼굴로 돌아와 대꾸했다.
비록 황제의 표정이 떨떠름하긴 했으나, 그것은 뭐 앨버튼 공작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황제의 기분 따위는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못할 것이었기에.
‘자, 그럼. 이쯤 채찍질을 했으니 이제 당근을 줄 차례인가.’
하지만 ‘아직은’ 저 늙은 황제의 비위를 살짝 맞춰 줄 필요가 있기에, 앨버튼 공작은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럼 폐하. 이제 ‘제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한시라도 빨리 끔찍한 저주를 벗고 자유의 몸이 되시려면, 일의 진행은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오오, 그래. 그대의 말이 맞네. 짐이 어찌 도와주면 되는가?”
앨버튼 공작의 말에 황제는 반색하며 물었다.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뀌는 늙은 황제의 얼굴에 앨버튼 공작은 속으로 그를 차갑게 비웃으며 음모를 품은 자 특유의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먼저 펠릭스 공작을 먼 곳으로 보내 주십시오. 명분은 그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뭐, 이웃 공국을 정벌하라고 하셔도 좋고, 서쪽 황야지대의 마물을 토벌하라고 명하셔도 좋겠지요.”
“그건 어렵지 않네. 당장이라도 명을 내릴 수도 있음이야.”
“하지만 며칠 내로 돌아오기 어려울 만큼 먼 거리로 보내시면 안 됩니다. 그러는 사이 제물이 진짜로 죽어 버렸다간 큰일이니까요. 어떻게든 그 괴물이 죽어 가는 제물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 또한 어렵지 않네. 펠릭스 공작 그놈이 감히 반역을 각오한 것이 아니라면 짐의 명을 거역할 수 없을 테니.”
황제는 앨버튼 공작이 쏟아 내는 음흉한 계획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앨버튼 공작은 순순히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황제의 모습에 속으로 만족하며 말을 이었다.
“그사이 저는 제물에게 비소를 탄 음식을 먹게 할 겁니다.”
“……비소? 정말 그것을 제물에게 먹일 것인가?”
이어진 앨버튼 공작의 말에 황제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며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앨버튼 공작이 은은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왜 그리 물으십니까, 폐하? 혹시 폐하께서는 더 좋은 혜안이라도 갖고 계신 겁니까?”
“……새삼 놀라워서 말일세. 현 펠릭스 공작 부인은 ‘제물’이기에 앞서 자네의 여식이 아닌가.”
“그런데요?”
“짐은 지금껏 궁중암투 끝에 비소로 독살된 수없이 많은 이들의 시신을 봐 왔고, 또한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 갔는지를 잘 알아. ……자네에게 현 펠릭스 공작 부인이 남처럼 정이 없는 자식이라고는 하나, 자기 피를 이은 자식에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주겠다 말하는 자네 모습이 짐에게는 참 대단해 보여서 말일세.”
황제는 자신이 그레이스를 언급하자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진 앨버튼 공작을 살피며, 은근히 비꼬는 듯 말했다.
그것은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식을 죽여 권력욕을 채우겠다는 그 욕심에 대한 비난이었으며, 그런 앨버튼 공작이 이해가 가지 않아 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앨버튼 공작이 가만히 웃더니 대답했다.
“무능력자 주제에 지금껏 앨버튼 가의 일원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았으니, 그 대가를 갚아야지요.”
“……경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런 손익을 따지는가?”
“그 아이가 아무런 능력도 갖지 못한 몸으로 태어났을 때,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은 것으로 그 아이는 제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힐난에 대꾸하는 앨버튼 공작의 모습에 황제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본디 마법사란 힘과 지배의 논리로 움직이는 존재라고는 들었으나, 그 논리가 피를 이은 가족 간에도 적용되는 것일 줄이야.
황제는 새삼스레 자신이 아들을 위해 손잡은 눈앞의 상대가 진짜 ‘악마’임을 자각하며 슬며시 몸을 떨었다. 불쾌했고, 경악스러웠다. 하지만 황제는 노련하게 제 안에서 이는 감정들을 감추며 앨버튼 공작을 향해 말했다.
“……그렇군. 하긴. 그런 그대 덕분에 큰 수혜를 입게 된 내가 감히 자네에게 가타부타 떠들 일은 아니었던 것 같군. 그대에게 섣부른 참견을 한 것에 대해 용서해 주겠나?”
“아닙니다, 폐하. 그런 폐하의 인자함과 자애로움 덕분에 제가 이리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니까요. 딱히 용서를 구하실 것도 없습니다.”
앨버튼 공작은 화제를 돌리는 황제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다행히 주제 파악은 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본인 말마따나 자신 덕분에 귀한 후계자의 목숨을 건진 주제에, 감히 자신에게 인간의 도리를 떠드는 건 적정선을 한참은 넘은 행동이었다.
앨버튼 공작은 속으로 눈앞의 황제를 차갑게 비웃으며 생각했다.
‘마리안느가 장차 황위를 이을 후계자를 갖는 순간, 황제 네놈의 그 끝없는 거만함부터 손봐 주지.’
그러니 그 전까지는 역겨워도 꼴사나워도 참아야만 했다. 앨버튼 공작은 조용히 먹이를 향해 접근하는 독사처럼 서늘한 얼굴로 황제를 향해 이어 말했다.
“뭐, 제게 잔인하다 비난하셔도 별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젠 정말로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요. 이미 황태자 전하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고대 마법은 균열이 가, 산산이 조각나기 일보 직전인 상태입니다.”
“뭐라!? 앨버튼 공작! 그게 정말인가?”
“예.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얼른 황태자 전하와 우리 마리안느의 결혼식을 서둘러 주십시오.”
급박한 황태자의 상태를 언급하며 또다시 황태자와 마리안느의 결혼을 재촉하는 앨버튼 공작의 말에 황제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아니, 황태자의 상태가 그리 급박한 것이라면 먼저 제물을 죽이고 저주를 치유한 후에 결혼해도 하는 게 맞지 않겠나? 어차피 마리안느 영애는 우리 황태자와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인데 일을 좀 느긋하게 진행해도…….”
“아뇨.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
“왜냐하면 저는 그 결혼식을 ‘제물’이 그 목숨을 내놓을 ‘무대’로 삼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앨버튼 공작은 이어지는 황제의 말을 단호히 끊어 내며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목소리에는 도저히 큰 딸을 위해 막내딸의 목숨을 잔인하게 끊어 내야 하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고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권력과 가문의 영광을 쥐기 위해 탐욕스러운 눈을 빛내는 잔혹한 정치가만이 존재했다.
“그러니 폐하, 지금부터 우리 마리안느와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에 관해 두 당사자의 아비로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앨버튼 공작은 자신의 말에 슬며시 표정을 굳힌 채 속으로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황제를 향해 일부러 뻔뻔히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눈앞의 먹이를 앞둔 채 흉측하게 입을 벌린 독사와도 같은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