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69화
“혹시 눈의 왕국의 공작이 봄의 왕국의 공주를 만나 행복한 결말을 맞는 그 동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정말 그 동화가 이곳 펠릭스 성에서부터 유래된 것이었나요?”
“……음. 그 동화를 내게 처음 들려주었던 샐리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는 걸로 봐서는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어머, 신기해요.”
그레이스는 어릴 적 눈을 빛내며 읽었던 동화 속 배경이 사실은 자신이 시집을 온 펠릭스 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감탄했다.
아서는 동화 이야기에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신기해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부인께서는 그 동화를 좋아하셨습니까?”
“네! 다른 동화책은 한 번 읽고 나면 흥미가 떨어져서 다시 읽고 싶지 않았는데 그 동화책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거듭해서 읽곤 했어요. 수도는 눈이 잘 오지 않아서 일 년의 반 이상이 겨울이라는 동화 속 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왔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좋아했던 건 용감하고 멋진 눈의 공작이었어요.”
“부인께서는 그 눈의 공작을 좋아하셔서 몇 번이고 동화를 거듭해서 다시 읽으셨던 거로군요.”
“네. 눈의 왕국의 사람들을 위해 흉측한 마물들을 무찌르는 부분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봄의 왕국의 공주가 죽어 갈 때 마법으로 자신의 생명을 공주의 생명과 묶는 부분이 제일 가슴에 와닿았어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그 마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고 맹세하는 그 부분이 너무 감동적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의 배경이 펠릭스 성이었을 줄이야!”
그레이스는 마치 그 시절 작은 소녀였던 그때로 돌아간 양 아서를 향해 동화의 감상을 늘어놓았다.
아서는 식사를 하는 것도 중단한 채 그레이스와 시선을 맞추고 이어지는 그레이스의 말에 공감했다. 자신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사람도 있겠다, 잔뜩 신이 나 말을 잇던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곧장 아서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아서. 그 동화가 이 펠릭스 성의 선조님이 이야기라면 그 ‘목숨을 묶은 마법’도 실제로 있었던 일일까요, 혹시?”
다소 엉뚱한 그녀의 물음에 아서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대답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 부분은 음유시인들이 이야기를 좀 더 낭만적으로 꾸미기 위해 지어낸 거겠죠.”
“역시 그렇겠죠?”
“만약 펠릭스 성의 선조가 그런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아마 그 기록이 남았을 텐데, 펠릭스 성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선 그런 이야기를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만약 정말로 그 힘을 선조께서 쓸 수 있으셨다고 해도, 절대 누군가에게 사용하려고 하진 않으셨을 겁니다. 누군가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이라면, 어떻게든 그 힘을 활용해 보고자 검은 속내를 품은 이들이 우리 선조를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이어지는 아서의 설명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만약 펠릭스 공작가의 후손들이 누군가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 법한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면, 아마 혼맥으로 제국의 세도가가 된 귀족은 앨버튼이 아니라 펠릭스가 되었을 것이 자명했다.
제국의 황족들과 세도가의 귀족들은 그들이 가진 재산과 권력을 죽을 때까지 누리기 위해 그 누구보다 목숨에 집착하는 자들이니까.
그런데 아서의 설명에 납득하면서도 그레이스는 못내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자신이 자꾸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았고,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잃어버린 고리’를 고민하고 있자,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아서가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두렵고, 무섭습니다.”
“네? 무엇이요?”
“혹여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의 비밀’이 다른 누군가에게 새어 나갈까 봐서요.”
“……아.”
아서가 조심스레 언급하는 ‘자신의 비밀’이 무엇인지, 그레이스는 단박에 알아챘다.
그의 지적대로 만약 자신의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자신의 비밀인, ‘한 번 죽었다 모종의 힘에 의해 다시 살아 돌아온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레이스는 조심스레 자신의 일에 대해 언급한 후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아서의 팔뚝을 다정히 토닥이고는 말했다.
“걱정 마요. 당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할 비밀이에요.”
“……압니다. 그래도 불안합니다. 내 성안에 다른 황족이나 귀족들의 간자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아서.”
“그래서 나는 더 강해지고자 합니다. 그 누구도 감히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도록.”
아서는 자신의 팔뚝 위로 올라온 그레이스의 손을 한 번 꼭 잡았다 놓으며 스스로를 향한 다짐과도 같은 말을 했다.
그 말에 그레이스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위해 더욱 강해지겠다 다짐하는 그 말이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식사도 잊고 아서와의 대화에 매진하고 있던 그때, 어느새 대화에서 소외된 탓에 얌전히 자신의 접시 위 음식을 비우던 레온이 뾰로통한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치사해요, 두 분만 재미있게 대화하시고, 나는 쏙 빼놓고.”
“……어머, 미안해. 레온.”
“미안하다. 그러고자 한 것은 아니었는데.”
“피이.”
“사과를 받아 주렴, 레온. 그러면 오늘 내 몫의 디저트를 전부 양보하마.”
“정말이세요?”
“그럼.”
“그, 그럼 용서해 드릴게요.”
줄곧 두 사람만 아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영 서운했던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고 있던 레온은 디저트를 양보하겠다는 아서의 말에 곧 화를 풀었다.
그레이스는 어느새 순하게 웃고 있는 레온과 그런 레온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서의 모습을 달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 또한 사과의 의미로 레온에게 제 몫의 디저트를 양보해야겠다 생각하던 그때였다.
[에일린, 제발 눈을 떠!]
“……!”
또다시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 한 남자의 절규와도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와 그 안에 담긴 비참하리만치 절박한 슬픔과 절망에서 기시감이 든다면 착각일까.
그레이스는 마치 자신의 귓가에 대고 직접 소리치는 듯한 그 목소리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형수님?”
그러자 곁에서 아서와 레온이 자신의 영문 모를 행동에 대해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그 목소리보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정체 모를 남자의 비명 소리’에 집중했다. 뭔가, 이 목소리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러던 그때, 그녀는 언젠가 비밀정원에서 경험했던 것과 똑같이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주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눈앞에 하나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흰 드레스의 아랫부분이 하혈로 온통 붉게 물든 채 죽어 가는 한 여자와 그녀를 껴안고 비명을 지르는 한 남자.
그것은 몇 개월 전 그날 비밀정원에서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 보았던 그 풍경이었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은, 그때와는 달리 보이는 풍경과 들려오는 목소리가 전보다 더 선명하다는 것뿐이었다.
‘대체 왜, 내게 또 이런……?’
그때 마주했던 남자의 핏발 선 눈. 그 눈을 마주하면서 겪었던 공포와 끝 모를 두려움이 또다시 생생하게 그녀의 마음속으로 침투했다.
그레이스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날처럼 똑같이 남자가 죽어 가는 흰 드레스 차림의 여자의 배 위에 억센 손을 가져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제 저 핏발 선 남자의 흉악한 눈이 날 응시하고, 난 또다시 기절하는 건가?’
몇 달 전 겪었던 그 끔찍한 경험을 기억 속에서 불러낸 그레이스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예상과는 달리, 절망으로 가득한 남자의 눈은 그레이스를 향하지 않았다. 남자의 끔찍한 눈은 오로지 눈앞에서 죽어 가는 연인인 듯한 여자에게 고정된 채였다. 남자는 억센 손으로 부풀어 오르는 그녀의 배에 자신의 억센 손을 내리눌렀다.
‘……어?’
그랬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바로 ‘그 장면’ 이후의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마치 읽다 만 동화책을 보듯 이어지는 장면에 온 시선을 집중했다. 분명 이 ‘꿈과도 같은 환상’ 속에 자신이 찾아 헤매는 저주에 대한 실마리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었다.
[커헉!]
그러던 그때, 그레이스는 죽어 가는 여자의 배를 내리누르던 남자의 억센 손에서 아주 강력한 ‘파장’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레이스는 그것이 남자가 죽어 가는 여자를 위해 ‘마법’을 사용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입으로 붉은 피를 쏟아 내면서도 죽어 가는 여자의 배에 놓인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가슴께에서 끝이 붉은 투명한 실이 흘러나오더니 죽어 가는 여자의 왼쪽 심장 부근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더니 조금 전까지 숨이 멎었던 여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그 마법 같은 일에 그레이스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을 때,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던 ‘환상’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