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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67화 (67/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67화

“……그레이스?”

“그래요! 그 쓸모없는 것이요! 아버지도 보셨잖아요! 그날 어머니의 케이크를 보고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는 그것의 편을 드는 황태자를요!”

앨버튼 공작은 연신 씩씩거리며 소리치는 마리안느의 모습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마리안느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때 당시 응접실에서의 상황을 반추해 본 앨버튼 공작은 과연 마리안느의 말처럼 그레이스를 대하는 황태자의 눈빛과 행동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떠올려냈다.

‘어쩐지. 그래서 황태자가 전보다 더 강경하게 결혼 파기를 주장했던 거군. ……벨리알, 이 빌어먹을 놈! 분명 그런 말들이 황궁에서 오가는 것을 그레고리를 통해 다 보았을 텐데! 나에게는 본 것의 절반밖에 알려 주지 않았군!’

앨버튼 공작은 요즘 자신을 볼 때마다 묘하게 킬킬거리던 벨리알의 행동을 반추하며, 신경질을 부리느라 목까지 붉어진 큰딸 마리안느를 다독였다.

“나는 몰랐어. 그저 황태자가 너를 싫어하니까 그리 행동하는 줄 알았지.”

“어머니는 바로 알아채셨는데, 아버지는 너무 둔하세요! 정말이지, 그때 황태자가 그레이스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아버지께서도 보셨어야 해요. 정말, 정말 저에게는 단 한 번도 그런 눈으로 나를 봐 준 적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 보잘것없는 것에게는 어찌나 다정하고 세심한 눈길을 보내는지! ……분해서 죽을 것 같았다고요.”

“……그래. 미안하구나.”

앨버튼 공작이 사과를 건네자 마리안느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울먹이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분하고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딱히 황태자를 사랑해서, 그 마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기울어서 슬픈 건 아니었다.

그 어떤 여자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펠릭스 공작에게 미친 여자의 피를 뒤집어쓰는 괴물을 사랑하는 여자는 없을 터.

마리안느 또한 그러했다. 어차피 마리안느 또한 자신이 낳을 아이의 아버지로서, 자신을 황후로 만들어 줄 사람으로서 있어 준다면 그깟 정부 따위 수십 명이든 수천 명이든 둬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황태자가 자신과의 혼약을 파기하려고 해서,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그 ‘그레이스 앨버튼’이라서 마리안느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마법 능력을 타고나지도 못했고, 자신처럼 위대한 앨버튼 가문의 후계자로서의 책임과 의무 또한 지지 않은 채 그저 식량이나 축내는 시궁쥐처럼 가문에 기생하며 살아온 그 멍청이.

그저 자신보다 얼굴이 좀 반반하다는 것, 그리고 비굴하다 싶을 만큼 시종들이나 시녀들에게 친절히 군다는 것. 단순히 그 이유로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의 동정심을 한 몸에 받는 그 얄미운 계집애.

어린 나이에 가문의 비밀과 앨버튼 공작가의 후계자로서의 책무를 주입받아 매일같이 고통스러운 훈련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괴물 같은 황태자와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자신과는 달리, 그저 들판에 자라나는 잡초처럼 가문의 부나 축내다 운 좋게도 괴물과 눈이 맞아 오롯이 괴물의 사랑을 받는 편한 팔자의 그 계집애.

‘하필 그 망할 멍청한 계집애가 황태자의 마음을 빼앗아 갈 줄이야.’

마리안느는 며칠 전 응접실에서, 몸은 자신의 옆에 앉은 채 눈으로는 연신 그 망할 그레이스만 좇던 황태자 오웬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앨버튼 공작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투박한 손으로 토닥이며 말했다.

“걱정 마라. 조금만 더 참고 있으면, 그레이스는 저절로 네 눈앞에서 죽어 없어질 테니까.”

“……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해요? 황태자가 나와의 혼약을 깨고, 황위에 올라 우리 앨버튼 공작가를 버릴 때까지요? 그 빌어먹을 그레이스가 운 좋게 계속 저주를 피하고 있잖아요!”

“아니다. 좀 전에 벨리알이 내게 전했다. 드디어 그레이스가 저주에 걸려들었다고 말이다.”

“……정말이세요?”

마리안느는 단번에 화색 띤 얼굴로 앨버튼 공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앨버튼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음모를 꾸미는 자 특유의 낮고 은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제 남은 건 무사히 그레이스를 죽이는 일뿐이다.”

“그 괴물 공작의 방비를 피해서 말이죠?”

“그래. 분명 펠릭스 공작 그놈이 어떻게든 지키려 할 테지. 하지만 그놈도 어쩔 수가 없을 거야. 우리 뒤에는 황제가, 황실이 있으니까.”

“그렇죠. 황족이고, 이 제국 최정예 기사단을 거느린 영주이자 공작이라고 해도 감히 황제 폐하의 명령을 거스를 순 없으니까요.”

마리안느는 음흉하게 미소 짓는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말에 마주 웃으며 대꾸했다.

아서 펠릭스, 그 괴물 공작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으리라. 이미 그는 황실과 앨버튼 공작가가 쳐 놓은 거미줄에 걸려든 나비 같은 신세이니까.

앨버튼 공작은 이제야 표정이 좀 풀어진 큰딸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그레이스 그것을 ‘잘’ 죽일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그 방법이라면 걱정 마세요. 아버지. 마침 좋은 수가 떠올랐으니까요.”

“좋은 수? 어떤?”

앨버튼 공작이 묻자, 마리안느는 매끄럽고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독사처럼 미소 짓고는 제 아버지 앨버튼 공작에게 귓속말을 했다.

마치 봄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쏟아 내는 큰딸의 악의 가득한 계획에 앨버튼 공작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것은 혈육을 해하는 자의 얼굴이라 하기 어려울 만큼 잔악무도했다.

* * *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펠릭스 저택의 동쪽 탑 지하실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석실 안, 여전히 그곳에서 기록을 찾는 것에 사력을 다한 그레이스는 낡은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며 한 손으로 지친 눈을 덮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마법 언어가 제국어로 바뀌고,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아버지 앨버튼 공작과 황제의 목소리를 들은 후로 2시간. 그사이 그레이스는 다른 기록을 찾아 뒤졌지만 조금 전처럼 눈앞의 마법 언어가 제국어로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전 일은 역시 우연이었나? 아니면 책에 손을 대면 자동으로 해석이 되는 그런 마법이 걸려 있었던 걸까?’

그러나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이 기록을 모은 아서가 가장 먼저 그 기록을 읽고 사건의 진상에 접근했을 터.

그렇다면 자신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확실한데, 그레이스는 도무지 일이 그렇게 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더 석실 안 서책들과 양피지 더미를 악착같이 뒤졌다. 차라리 자신이 모든 기록을 전부 해석할 수 있었다면 다음에 봐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일을 미뤘을 테고, 아예 처음부터 전부 읽을 수 없었다면 깔끔히 포기했을 텐데. 처음에 본 것은 읽을 수 있었고 그다음부터는 아예 읽히질 않으니, 혹여 자신이 읽을 수 있는 기록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집착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휴, 머리 아파.”

그렇게 꼬박 몇 시간을 먼지가 풀풀 풍기는 서책들과 씨름하다 보니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리가 아팠다.

그레이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두통이 좀 가라앉고, 지친 체력을 좀 회복하고 나면 조금 더 뒤져 볼 생각이었다.

똑똑―.

그러던 그때, 밖에서 희미하게 잠긴 지하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그레이스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잠깐의 정적 이후 또다시 지하실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서?’

3시간 뒤에 데리러 온다고 하더니,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내려온 걸까.

그러나 그레이스는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일부러 대꾸하지 않았다. 첫 번째 문은 잠그지 않은 상태로 내려왔다. 그랬으니 혹여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서가 아니라, 열린 문에 호기심을 갖고 내려온 누군가일 수도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자 아무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는 지하실을 향해, 문밖의 누군가가 주먹으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쾅, 쾅.

“부인! 안에 계십니까!”

“……어머.”

다행히 들려온 아서의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석실 밖을 나갔다.

그리고 잠겨 있던 두 번째 문의 걸쇠를 안에서 풀고 문을 열자, 걱정으로 가득한 아서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서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아내 그레이스를 확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에 계셨으면서 왜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압니까?”

“미안해요. 혹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아서가 아니면 어쩌나 싶어서요. 그래서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기다렸어요. 문밖의 사람이 아서가 아니었다면, 그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잠자코 있을 생각으로요.”

“……아. 그랬습니까. 그런 생각은 못 했는데, 부인께선 역시 지혜로우십니다.”

“별말씀을요.”

그레이스는 여전히 자신을 끌어안은 채 한 손으로 자신의 결 좋은 은발 머리에 묻은 먼지를 다정히 털어 주는 아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서는 그런 그레이스와 눈을 맞추며 다정히 웃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보아하니, 이곳에서 저는 발견하지 못한 대단한 것을 찾으신 모양이군요.”

“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는 찾은 것 같아요. 그런데 뭐랄까, 명확하지가 않아요.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한데…….”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답답해하며 그레이스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자 아서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진정하라는 듯 어깨를 토닥이고는 말했다.

“그럴 땐 잠시 쉬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럴까요? 마침 아서에게 오늘 알아낸 것들에 대해 말해 줄 것도 있고요.”

“마침 점심 식사가 다 준비되었다고 하니, 식사를 한 후에 차라도 한잔하면서 알아낸 것들에 대해 들려주지 않겠습니까?”

“좋아요.”

그레이스는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채 자신을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끄는 아서를 기꺼이 따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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