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66화
그 모습에 벨리알은 다급히 테이블 위로 걸어가더니 그 마법진에 흉측한 자신의 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더욱 강한 빛이 새어 나왔고, 그 모습에 벨리알은 희열에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됐어! 드디어 성공했다고!”
벨리알은 테이블 주위를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드디어 그동안 애를 먹이던 제물을 향한 저주가 먹혀든 것이었다. 그 말인즉 드디어 괴물과 제물이 드디어 진정으로 마음이 통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벨리알은 잔뜩 호들갑을 떨며 앨버튼 공작을 향해 말했다.
“네 쓸모없는 둘째 딸이 사람 마음 뺏는 재주는 있는 모양이군.”
“그 말은, 드디어 그레이스가 완전한 제물로서 조건을 갖췄다는 건가?”
“그래! 그 계집이 강철 같은 괴물의 마음을 함락시켰어! 이제 남은 건 그 계집을 괴물의 눈앞에서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벨리알의 기쁨에 찬 목소리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던 앨버튼 공작이 곧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몇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여자를 괴물에게 들이밀고, 실패하기를 반복했건만 드디어 이런 날이 오다니 감격스러웠다. 게다가 그 일을 이루어 낸 것이 자신의 쓸모없는 둘째 딸이어서 더 그랬다.
‘네가 이제야 키워 준 값을 하는구나, 그레이스.’
태어나 지금껏 줄곧 집안의 수치였던 그레이스, 그것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둔 보람이 있었다. 앨버튼 공작은 묘한 흥분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벨리알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든 펠릭스 공작 앞에서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건가? 방법은 상관이 없나?”
“그래. 팔다리가 하나쯤 잘못돼도 상관없고 정신이 이상해져도 괜찮아. 단 즉사는 안 돼. 그러면 괴물이 절망해서 제물을 다시 살려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또한,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영영 마음을 닫아 버릴지도 몰라. 일이 그렇게 되면 지금껏 한 고생은 고생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만큼, 일이 복잡해질 거야. 잊지 말라고! 그 까다로운 취향을 맞춘 건 지금껏 네 둘째 딸 딱 하나였다는 걸.”
“알겠어. 명심하지.”
앨버튼 공작은 굳게 다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인지 벨리알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테이블을 돌아 맞은편에 있는 앨버튼 공작에게로 다가가더니 그의 굳은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리 제물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딸인데. 곧 그 계집이 겪게 될 불행한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할 생각은 조금도 없나 보지?”
“지금껏 앨버튼 본가의 영애로서, 서민으로는 감히 누릴 수 없는 사치를 누리며 살게 해 준 가문에 대해 이 정도 보답은 해야지. 게다가 지금껏 존재 자체로 가문에 누만 끼쳤으니, 목숨이 아니라 가문에서 더 한 것을 내놓으라 해도 내놓아야지.”
“이런, 냉정한 아버지로군. 가문의 번영을 위해 딸의 목숨 하나 정도 내놓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야?”
“……어차피 내게는 후계자와 그 후계자가 낳아 줄 아이가 있으니까.”
“호오.”
“그리고 그 아이는 ‘위대한’ 황실의 피를 이은 아이이지. 또한, 장차 황위에 올라 나에게 제국을 안겨 줄 아이이기도 하고.”
앨버튼 공작은 권력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벨리알의 말에 대꾸했다.
이제 대대손손 자식들을 결혼이란 이름으로 팔아 그 시대의 세도가에게 기생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직접 그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쥐어 보고 싶었다.
그런 야망을 불태우고 있던 그에게 황태자가 하나뿐인 것도, 그리고 그 황태자가 ‘초대 신의 저주’를 받아 고통스럽게 요절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은 천금 같은 기회였다.
‘이 계획만 성공하면 꼭두각시 같은 어린 외손자와 질투심만 가득한 멍청한 딸을 양손에 틀어쥐고 이 제국을 호령하게 될 자는 바로 내가 될 테지.’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그려지는 눈부신 미래의 청사진에 앨버튼 공작은 저절로 흐뭇한 웃음이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벨리알은 그런 그의 모습을 곁에서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았다.
역시 인간은 이래서 좋았다. 신이 허락한 것보다 더한 것을 갖기 위해 혈육쯤은 잔인하게 내쳐 버릴 수 있는 냉정함과 탐욕, 그리고 그 탐욕에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어리석음.
벨리알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간을 사랑했고, 그런 인간에게 힘을 빌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벨리알은 아주 오래전 자신이 가진 모든 마법 능력을 이용해 자신을 소환했던 소년 시절의 앨버튼 공작을 떠올리며,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잊지 말라고, 이 인간 친구. 이 모든 일은 내 힘과 지혜 없이는 이뤄 낼 수 없었다는 걸. 현 괴물 공작의 아비가 가진 힘도, 그리고 그 아내인 에일린 황녀가 ‘한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난 비밀’도 그 힘을 이용해 초대 신의 저주를 풀 방법을 알아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나라는 걸 말야.”
“물론이지. 내가 무사히 이 제국을 얻는 그때, 너를 위해 앨버튼 가문의 방계 100명의 목숨을 바치겠어.”
‘약속’을 상기시키는 벨리알의 말에 앨버튼 공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벨리알은 만족스러운 듯 또다시 소리 높여 웃음을 터트렸다. 그 흉측한 웃음소리에 앨버튼 공작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주가 완성되었다니, 이제 앞뒤 잴 것 없이 곧장 그레이스를 처리할 방법을 고민해야겠군. 또한, 황태자와 마리안느의 결혼을 서둘러야겠어.”
“그래. 인간 친구. 계획은 빨리 진행할수록 좋아. 저주가 걸려든 이상, 그 제물은 스스로 자각할 새도 없이 조금씩 미쳐 갈 거라고. 그러다 잘못해서 ‘반쪽 저주’에 걸렸던 다른 제물들처럼 스스로 자기 몸을 해쳐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낭패잖아?”
“충고 고맙군. 그렇게 되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움직이도록 하지.”
“잘 가라고. 또 급한 일이 있으면 ‘그레고리’를 통해 연락하지.”
이전에 ‘반쪽짜리 저주’에 걸려 괴물 펠릭스 공작의 마음을 뺏기도 전 멋대로 죽어 버렸던 영애들을 언급하며 벨리알은 앨버튼 공작을 놀리듯 밉살스럽게 지껄였다.
그 모습에 앨버튼 공작은 티 나지 않게 표정을 굳히고는 곧 빠르게 일을 진행한다는 핑계를 대며 비밀의 방 밖을 나왔다.
다시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쳐, 잔뜩 어지럽혀진 서재로 나온 앨버튼 공작은 책장을 밀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그 후 앨버튼 공작은 질서 있게 어질러진 자신의 서재를 돌아보며 확인했다. 혹여나 자신이 비밀의 방에 들어가 있던 사이 누군가가 서재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에서였다.
다행히 비밀의 방에 들어가기 전과 별다를 바 없는 모습에 내심 안심하면서도, 앨버튼 공작은 뭔가 가시지 않는 찜찜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상하군. 멋모르는 시종이나 시녀가 건드린 것이 맞나? 정리했다기보다 꼭 누가 헤집어 놓은 것 같은 모양인데. 꼭 누가 뒤진 것처럼.’
앨버튼 공작이 그렇게 생각하며 잔뜩 어지럽게 쌓여 있는 기록들에 다가서던 그때였다.
똑, 똑.
문밖에서 서재로 가볍게 노크를 하는 소리에 앨버튼 공작은 문 쪽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누구지?”
“아버지. 저예요.”
돌아온 것은 마리안느의 목소리였다.
앨버튼 공작은 곧장 서재의 문을 열고 그 앞에 서 있는 마리안느를 맞았다.
“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예법 수업은 어쩌고?”
“지금 예법 수업이 중요한가요?”
마리안느는 앨버튼 공작의 물음에 퉁명스레 대꾸하며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서재의 풍경에 눈살을 찌푸린 마리안느는 제 발에 차이는 서책과 서류들을 걷어차며 서재 안에 놓인 푹신한 소파로 가 앉았다.
그런 딸의 모습에 앨버튼 공작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누군가 묘하게 뒤진 것 같은 흔적은 아마도 제 큰딸이 한 짓인 모양이었다. 앨버튼 공작은 벌써 황태자비라도 된 양 아비 앞에서 건방지게 구는 큰딸 마리안느를 향해 차갑게 물었다.
“그래. 한 주에 삼백 개의 금화를 지불해야 하는 채튼 후작의 수업보다 더 네게 중요한 그 볼일이 뭐냐?”
“비꼬지 마요, 아버지. 꼭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요.”
“내게? 대체, 뭘?”
앨버튼 공작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묻자 마리안느가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물었다.
“오늘 아침에 황궁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황태자 전하께 다녀오신 거죠?”
“알면서 새삼스레 왜 묻는 게냐.”
“그분께 제대로 경고를 하고 오신 거죠? 나와의 혼약을 깨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마리안느가 서늘한 표정을 한 채 묻자 앨버튼 공작이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고는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 건방진 황태자 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고 나온 길이다.”
“……그 정도 말뿐인 경고로는 부족해요. 제대로 황태자의 기를 꺾어 놓으셔야 해요. 감히 이 결혼을 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나 말고 다른 영애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그 황태자와 결혼을 위해 이따위 당부를 아버지 앨버튼 공작에게 해야 하다니, 마리안느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별수 없이 솔직히 아버지 앨버튼 공작을 향해 애원 섞인 당부를 했다.
그러자 그 말을 묵묵히 듣던 앨버튼 공작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결혼을 깨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알겠다만, 다른 영애에게 눈 돌리지 못하게 하라고? 마리안느, 그 괴물 같은 놈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쓸데없는 걱정은 말거라.”
“아버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아버지, 이미 황태자는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더 저와의 결혼을 파기하려고 하는 거라고요!”
“……뭐? 대체 누굴?”
그러나 울분에 차 소리치는 마리안느의 말에 앨버튼 공작은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마리안느는 더욱 분통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어쩜 남자들이란 이리 둔한지! 어머니께선 단박에 눈치채신 일을 아버지는 왜 아직도 모르세요? 황태자의 눈이 누구를 향하는지, 그자가 제 앞에서 누굴 노골적으로 감싸는지! 바로 앞에서 보셔 놓고도 모르세요?”
“……뭐? 내 눈으로 직접 봤다고? 언제…….”
“모른 척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정말로 모르시는 거예요? 아버지! 황태자가 마음에 둔 사람은 바로 그레이스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