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65화
그레이스는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조심스럽게 자신이 떨어뜨린 그 양피지를 주웠다. 그 후 그레이스는 그것을 다시 램프 앞으로 가져와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외울 듯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눈이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양피지에 적혀 있던 글자는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다시 그레이스가 읽을 수 없는 ‘마법언어’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놀라 다급히 숨을 들이켜며 또다시 양피지를 떨어뜨렸다.
‘……대체, 이게 뭐야?’
조금 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레이스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글자가 빛이 나더니 눈앞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고 그것은 마법 언어에서 제국어로 모습을 변경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레이스가 다 읽자마자 다시 읽을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 버린 양피지.
그레이스는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지자 머릿속이 마치 엉킨 실타래처럼 엉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법 언어를 읽을 수가 없는데, 조금 건 그건 대체 뭐였지? 설마 내가 마법 언어를 읽을 수 있게 된 건가?’
그레이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쥔 양피지 조각을 내려다보다 곧 그것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무거나 눈에 띄는 서책을 잡아 그것을 유리 램프 앞으로 가져왔다. 만에 하나 자신에게 마법 언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면 다른 서책도 무난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서책에 적힌 마법 언어가 제국어로 바뀌어 보이는,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아까 보였던 건 대체 뭐지?’
조금 전 자신은 앉아서 꿈이라도 꾼 걸까.
그레이스가 그런 의심을 하며 여전히 읽을 수 없는 마법 언어로 쓰인 책을 덮던 그때였다.
[에일린 황녀와 펠릭스 공작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으로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앨버튼 공작이 직접 자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은 음성에 그레이스는 놀라 들고 있던 책마저 떨어뜨렸다.
‘대체 이건 또 뭐야? 윽!’
그레이스는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누군가 억지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드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것은 펠릭스 공작의 마음이 만들어 낸, ‘금지된 마법’의 일종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법을 이용하면, 그분의 피에 섞여 흐르는 저주를 벗겨 낼 수 있습니다.]
그레이스의 머릿속을 울리는 ‘앨버튼 공작’의 은근한 목소리는 누군가를 끈질기게 설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또 다른 ‘누군가’는 곧 앨버튼 공작의 제안에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곧 결심한 듯 대답했다.
[그것이 정말인가? 정말 그 아이의 저주를, 이 황실의 저주를 벗겨 낼 수 있는가?]
[물론입니다. 소신과 소신의 가문을 믿어 보십시오, 폐하.]
그리고 이어지는 앨버튼 공작의 대답에 그레이스는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폐하라고?’
그렇다는 건 지금껏 자신의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한 일들의 배후에 황실이 얽혀 있다는 걸까.
얽혀 있다면, 대체 왜. ‘누구’의 피에 섞여 흐르는 저주를 벗겨 내겠다는 걸까. 황제? 황후? 그것도 아니면 황태자?
그레이스는 여전히 이어지는 지독한 두통과 쉽사리 파악하기 힘든 대화 속 숨은 함의에 혼란스러우면서도, 들려오는 머릿속의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다만 그를 위해, 약간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
[예. 자고로 대의를 위해 다소간의 희생이 필요한 법이지요. 폐하.]
앨버튼 공작의 목소리는 대화 속 상대방, ‘황제’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레이스는 단번에 ‘희생’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대상은 바로 아서 펠릭스 공작과 그와 연을 맺을 여자들, 그리고 자신이었다.
“허윽!”
그레이스가 그것을 깨달은 순간 들려오던 목소리는 마법처럼 사라졌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두통도, 목소리도 깨끗이 사라져 버린 상황에 그레이스는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
아직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진 않았지만, 조금 전 그 ‘목소리’로 인해 단 두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아서와 펠릭스 공작가의 저주와 연관된 일의 배후에 황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다소간의 희생이라. 그 희생이라는 범주 안에 아서는 물론이고 내 목숨도 포함되어 있었던 건가요, 아버지?’
앨버튼 공작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자신을 펠릭스 공작가에 보낸 걸까. 죽거나, 미쳐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그레이스는 힘없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첫 번째 생에서 결혼을 거부한 자신을 그토록 잔인하고도 쓸쓸하게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지금은 본인들의 더러운 책략을 ‘아서에게 붙어 있는 저주’인 양 위장해 또다시 자신의 목숨과 행복을 노리고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첫 번째 생에서처럼 멍청하게 당하기엔,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지켜야 할 ‘새로운 가족’도 생겼다. 자신이 겨우 손에 쥔 행복을, 사람들을 맥없이 잃을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추가적인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 * *
한편, 오웬을 두고 석실을 나선 앨버튼 공작의 얼굴에는 묘한 승리감이 가득했다.
자신이 그동안 들인 공과 시간을 잊고 감히 자신과 앨버튼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쪽은 그의 목숨을 쥐고 있는 것은 물론, 치명적인 비밀 또한 쥐고 있는데 말이다.
앨버튼 공작은 음흉하게 웃으며 자신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과 그 뒤에서 마치 인형처럼 질질 끌려 나오는 전 레이나 영애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가장 앞에 선 병사를 향해 말했다.
“언제나 그랬듯 수도의 비밀 저택에 저 계집을 연금해 둬라. 언제든 ‘괴물’의 목숨이 위급해지면 사용할 수 있도록.”
“네, 각하.”
앨버튼 공작의 말에 병사는 비굴하다 싶을 만큼 정중하게 예를 표한 후 그녀를 끌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앨버튼 공작은 그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허공으로 손을 가볍게 휘두르더니 순간이동의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앨버튼 공작이 서 있던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곧 그의 주변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앨버튼 공작은 자신을 둘러싼 배경이 어둡고 주변이 온통 돌뿐이었던 석실의 벽이 아름다운 벽지가 붙은 화려한 앨버튼 저택으로 변하자 곧장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가 바삐 가려는 그곳은 바로 그의 서재였다. 앨버튼 공작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정리되지 않아 이리저리 바닥에 흐트러진 서책과 문서들을 잠시 둘러보았다.
‘이상하군. 누가 내 서재에 손을 댔나?’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정신없이 어지럽혀진 풍경이지만, 그곳을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어지럽혀 둔 앨버튼 공작의 눈에는 자신의 서재에 낯선 이의 손길이 닿았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대체 누굴까, 또 앨버튼 공작가의 예법에 익숙하지 못한 어린 시종이나 시녀가 나름대로 정리를 한답시고 손을 댄 걸까.
앨버튼 공작은 그것이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서재 내의 서책과 문서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어지럽혔다’.
그 후 책들이 어지럽게 꽂혀 있는 한 책장 앞으로 걸어간 앨버튼 공작은 그 위를 가볍게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그 책장이 스르르 벌어지더니, 숨겨져 있던 공간 하나가 드러났다.
앨버튼 공작은 익숙한 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빛이 새어 들어오거나 나가지 않도록 검고 두꺼운 커튼이 내려진 그곳의 중앙에는 작은 테이블과 기묘한 녹색 불빛을 내뿜는 수정 구슬과 그 아래 핏빛의 마법진이 그려진 그곳을 찬찬히 살피던 앨버튼 공작은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렸다.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이 빌어먹을 놈이 어딜 간 거지?’
그러더니 곧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벨리알! 어디 있나, 이 멍청한 놈!”
그러자 갑자기 방의 구석에 놓여 있던 횃대에서 진녹색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러더니 그 불꽃이 점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우 체구가 작았고 드러난 손은 꼭 죽음을 앞둔 이처럼 깡마르고 주름져 있었다.
그는 그 깡마른 손을 한 번 털더니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앨버튼 공작을 향해 말했다.
“이런, 이런. 또 무슨 일로 그리 짜증을 내시는 거지, 앨버튼 공작? 오늘 황태자를 만나러 갔다더니, 거기서 뭐 좋지 못한 소리라도 들었나?”
“허튼소리. 황태자 그놈이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나? 내가 그놈 명줄을 틀어쥐고 있는데.”
앨버튼 공작은 그의 말에 퉁명스레 대꾸하며 높은 책장에 등을 기댄 후 팔짱을 꼈다. 그러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그 황태자마저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대하신 앨버튼 공작께서 무슨 일로 이리 짜증이 나셨나?”
“하! 몰라서 묻나? 당연히 그레이스 그것에게 걸린 저주 때문이지!”
“아하.”
그는 이제야 앨버튼 공작이 왜 화가 났는지 알겠다는 듯 대답하며 낮게 킥킥거렸다. 그 모습에 한층 더 화가 난 앨버튼 공작이 더욱 언성을 높이며 그를 향해 다그쳤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그 저주만 더 빨리 걸렸어도, 지금 일이 이렇게까지 지체될 일은 없었어! 감히 황태자 그놈이 마리안느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싶다는 둥, 그딴 허튼소리를 늘어놓을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게 왜 내 탓이야? 사랑의 묘약을 쓰고도 황태자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한 네 멍청한 딸 때문이지. 만약 그때 자네 딸이 황태자의 아이를 가졌더라면 일이 더욱 쉽게 풀렸을 거라는 것, 너도 모르진 않을 텐데?”
그, 벨리알의 대꾸에 앨버튼 공작은 말문을 잃고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연신 킬킬거리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벨리알이 승리감에 도취한 얼굴로 앨버튼 공작을 향해 다가와 그 흉측한 손으로 앨버튼 공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런, 화내지 말라고. 내 인간 친구. 그리 조급하게 마음먹었다간 될 일도 안 된다고.”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제 그 황태자 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초대신의 저주가 곧 그놈을 집어삼킬 거라고! 그랬다간 하나뿐인 후계자를 잃은 황제 놈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곧장 나와 앨버튼을 버릴 텐데, 그 후에는 무슨 짓을 해도 늦단 말이야!”
“알지, 알고말고.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느긋하게 마음을 먹으라고,
벨리알이 그렇게 말하던 그때였다. 진녹색의 빛을 뿜어내는 수정 구슬 아래, 핏빛으로 그려진 마법진에서 검붉은 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