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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64화 (64/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64화

한편 평온한 아침을 맞은 그레이스는 아서, 레온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 후 가정교사와의 수업을 위해 레온을 올리버 경에게 인계한 그레이스는 아서와 함께 동쪽 탑으로 갔다. 지난밤 나눈 이야기에서 아서가 자신이 얽힌 저주에 대해 조사했다는 그 문헌들에 대해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동쪽 탑의 1층 현관 앞에서 아서와 나란히 마주 섰다. 아서는 그레이스의 손 위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올려 주며 말했다.

“지하실로 향하는 문은 이곳에서 오른쪽 모퉁이를 돌면 보이는 복도 끝에 있습니다. 지금 그곳은 잠겨 있을 텐데, 여기 이 가장 큰 열쇠가 그 닫힌 문의 열쇠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 작은 것이 계단을 내려가면 보이는 두 번째 문의 열쇠, 그리고 가장 작고 정교한 모양을 가진 것이 지하실 가장 안쪽에 있는 석실의 열쇠예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서책이나 문서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빛 한 줄기 들지 않게 해 둔 데다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아 먼지가 많이 쌓여 있을 겁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걱정 마요. 어둡고 먼지가 쌓인 곳은 익숙해요. 앨버튼 공작가에 있는 내 침실이 그랬는걸요.”

아서의 염려에 그레이스는 걱정 말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서의 눈이 어린아이를 살피는 어머니의 눈에서 안쓰러움이 가득 들어찼다. 아서는 동쪽 탑의 지하실을 살펴보기 위해 일부러 간소한 차림을 한 그레이스의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이제부턴 그런 것에 익숙해지시면 안 됩니다. 부인께서는 내게 세상 그 누구보다 귀하신 분이니, 그만한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는 불편한 것, 모자란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럴게요.”

그레이스는 다정한 아서의 말에 살포시 웃으며 가면 밑으로 드러난 그의 입가에 입맞춤했다.

그러자 쑥스러운 듯 그레이스의 입술이 닿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웃는 아서를 향해 그레이스는 다정히 말했다.

“이제 당신은 그만 올라가요. 나는 지하실로 내려가 볼게요.”

“알겠습니다. 부인. 부디 조심하세요. 세 시간 뒤에 부인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자신을 배웅하는 그레이스의 장갑 낀 손등에 살짝 입맞춤한 아서는 곧 아쉬운 발걸음을 떼며 집무실로 향했다.

그레이스는 그 뒷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1층 오른쪽 모서리를 돌았다.

그리고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가자, 과연 아서의 말대로 복도 끝에 큰 자물쇠가 걸린 문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곧장 문 앞으로 걸어가 자물쇠에 첫 번째 열쇠를 끼워 넣고 걸쇠를 풀었다.

그러자 끼익, 하고 녹슨 철이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어두운 공간이 드러났다.

그레이스는 계단이 시작되는 부분의 벽에 붙은 작은 유리 램프를 떼어 손에 쥔 후 계단 위로 발을 내디뎠다. 물론 혹시 모르니 자신이 열어 둔 문을 안에서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그레이스는 작은 유리 램프 하나에 의지해 길게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지 단단한 돌로 된 계단에 그레이스의 구둣발이 부딪힐 때마다 퉁, 퉁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조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살짝 두려움이 든 그레이스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마침내 계단을 전부 내려오자, 그 앞에는 아서의 말대로 두 번째 문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잠금장치가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나무로 만들어 놓은 1층의 첫 번째 문과는 달리 전부 철로 된 그 문의 자물쇠에 두 번째 열쇠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딸각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그레이스는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아 경첩이 녹이 슨 문을 낑낑거리며 밀었다.

끼익―.

손으로 밀어도 열리지 않아서 어깨까지 동원하며 문을 밀자 겨우 문이 열렸다.

그레이스는 재빨리 문 안으로 들어온 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안에서 문을 잠궜다. 그 후 안에서 문이 단단히 잠긴 것을 확인한 그레이스는 램프를 높이 들어 올렸다.

“……어머.”

그러자 유리 램프의 빛이 숨겨져 있던 지하실의 풍경을 비추었고, 그 모습을 본 그레이스는 짧게 감탄했다.

지난밤 아서가 지하실을 가득 채울 만큼 관련 문헌을 수집했다기에 그레이스는 막연히 그곳이 아버지의 서재처럼 양피지 조각과 갖은 서책들이 정신없이 쌓여 있는 곳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그곳은 그레이스의 상상과는 달랐다. 족히 침실 두세 개를 붙여 놓은 듯한 넓은 석실을 가득 채운 긴 책꽂이와 그곳에 책과 서류가 꽂힌 그 모습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 같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방대한 자료에 그레이스는 반쯤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어떡하지? 일단 한 바퀴 가볍게 돌아볼까?’

잠깐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일단 이 안을 가볍게 둘러본 후 마지막 세 번째 열쇠까지 열어 확인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발걸음을 옮겼다.

아서의 말대로 자료를 수집해 놓았을 뿐 관리는 전혀 하지 않은 듯 군데군데 보이는 오래된 먼지와 벽 구석에 보이는 거미줄에 괜히 몸을 움츠리며 그레이스는 석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마지막 문 앞에 섰다.

그곳은 가장 안쪽에 비밀스럽게 위치한 곳답게 여태 그레이스가 열어 본 두 개의 문과는 사뭇 다른 정교한 자물쇠가 매달려 있었다. 마침 열쇠의 모양도 다른 것과는 달리 정교한 문양이라, 그레이스는 그 앞에서 한동안 열쇠를 쥐고 자물쇠 구멍과 씨름해야 했다.

“열렸다!”

그 나름의 사투 끝에 마지막 문마저 연 그레이스는 그 닫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겨우 문 세 개를 열고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뭔가 대단히 큰 모험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괜스레 뿌듯한 기분으로 지하실에서 가장 내밀한 곳에 위치한 석실을 둘러보았다.

“……여긴 엉망이네.”

그레이스는 이리저리 바닥에 흩어진 양피지 조각과 책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비록 오랫동안 손이 닿지 않았다고는 해도, 석실 바깥은 어느 정도 정리된 도서관 같았다면 이곳은 정리를 모르는 연금술사의 연구실 같았다.

어쩐지 의도된 것 같은 무질서한 석실 풍경에 그레이스는 이 안에 펠릭스 공작가의 저주와 관련해 중요한 비밀을 숨긴 책이나 서신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일단 손에 들고 있는 것부터 좀 볼까?’

손에 쥔 양피지 조각과 책부터 살펴보기 위해 앉을 곳을 찾던 그레이스의 눈에 마침 구석에 위치한 낡은 소파와 테이블이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낡아 다리의 균형이 맞지 않는 테이블 위에 유리 램프를 조심스럽게 올려 둔 후 손으로 낡은 소파를 탁탁 털며 그 위에 앉았다. 그러자 확 풍기는 쾨쾨한 먼지 냄새에 그레이스는 인상을 쓰며 쥐고 있던 양피지를 램프 빛에 비추어 보았다.

“하, 전부 마법 언어로 되어 있네. 하나도 못 읽겠는걸.”

누르스름한 부분은 양피지요, 검은 부분은 글씨라. 그레이스는 꼬불꼬불 그림처럼 그려진 마법 언어로 가득한 양피지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버지 앨버튼 공작은 자신이 언니 마리안느와는 달리 마법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마법과 관련된 모든 교육에서 자신을 배제해 버렸다. 그랬기에 그레이스는 이것이 제국어로 된 문서인지 마법 언어로 된 것인지만 막연히 구분하는 정도의 지식밖에는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아서가 왜 비밀에 대해 밝혀내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아.’

혹시 아서가 그때 당시 채 알아내지 못한 비밀을 자신은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레이스는 답답함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괜한 아쉬움에 양피지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어떻게든 고집을 피워서 마리안느와 함께 마법 언어라도 배웠어야 했다. 아니면 며칠 전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서재에 숨어들었을 때, 기록만 찾을 것이 아니라 마법 언어를 배우기 위한 교본도 함께 찾을걸 그랬다.

그레이스는 그런 후회를 하며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양피지를 노려보았다.

‘왜 나는 마법 능력이 없을까? 이럴 때 힘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아서와 레온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그레이스는 곧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은 펠릭스 공작가가 아니라, 언니 마리안느와 황태자비 경쟁을 하고 있거나 다른 수도의 유력한 권세를 지닌 가문과 정략결혼을 했으리라.

그럴 바엔 마법 능력 따위는 없는 편이 낫다고 그레이스가 스스로를 위로하던 그때였다.

“꺅!”

갑자기 그레이스가 쥔 양피지에 적힌 글자에서 희미한 연하늘색 빛이 새어 나왔다.

그러더니 조금 전까지 전혀 읽을 수 없던 마법 언어가 그레이스의 눈앞에서 기묘하게 춤을 추며 모습을 변화했다.

꿈틀꿈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며 배치를 바꾸던 그 글자는 곧 ‘제국어’로 변하더니, 그레이스의 앞에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 냈다.

[신께서는 강한 힘을 가진 자를 증오하신다.]

마치 마법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그레이스는 깜짝 놀라 쥐고 있던 양피지 조각을 떨어뜨렸다.

설마 이것은 자신의 간절함이 만들어 낸 환상인가 싶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양피지 조각은 그레이스의 눈앞에서 하나의 생물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 위에 쓰인 마법 언어를 ‘제국어’로 바꾸어 냈다.

[감히 신의 힘에 필적하는 힘을 얻으려는 자, 저주로서 그 응보를 받으리라.]

[그 저주는 피에서 피로 이어지리라. 저주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자. 그를 낳은 어미는 난산으로 고통받을 것이요, 그 아비는 끝 모를 탐욕에 갇혀 고통받을지니. 그자 또한 짧은 생을 고통으로 연명하며 괴로워하리라.]

[너희들은 특히 두 눈에 각각 다른 색을 품은 자를 조심할지니. 그들은 신의 뜻에 가장 거스르는 힘을 지닌 자들이라.]

[만약 그 힘을 쓰는 자, 그 힘을 이용하는 자는 그 영혼의 소멸로서 대가를 치르리라.]

[그러니 그 피를 이으려 하지 말라. 그 힘을 가지려 하지 말라. 그 피는 신께서 가장 미워하는 자의 피이며, 그 힘은 신께서 내린 저주를 품었느니라.]

마치 벌레가 기어가듯 양피지 위를 춤추던 글자들은 양피지 위에 쓰인 마법 언어가 전부 제국어로 바뀌고 나서야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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