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63화
그때, 병사들의 억센 힘에 의해 억지로 끌려 오던 그녀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던 오웬과 마주한 순간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반짝였다.
그러더니 그녀가 묶인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오웬을 향해 소리쳤다.
“펠릭스 공작! 이 짐승! 괴물 같은 자 같으니! 네놈 때문에 나는 타락했어! 너 때문에 나는 이상해졌다고, 이 악마 같은 놈!”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오웬을 향해 갖은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도저히 귀족의 언사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저속한 비난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그녀를 묶은 밧줄을 쥔 병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오웬은 그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그저 싸늘한 비웃음을 띈 채, 긴 검이 놓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느릿하게 긴 검을 손에 쥔 오웬은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연신 ‘펠릭스 공작’이라 소리치며 미친 사람처럼 끊임없이 저주를 퍼붓는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급변했다.
오웬이 그녀에게 점점 가까워질수록, 험악하게 일그러졌던 그녀의 얼굴에 점점 묘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웬이 그녀의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연인을 만난 사람처럼 그립고 또 애가 탄 얼굴을 한 채 오웬을 향해 말했다.
“아아, 드디어 날 바라봐 주는 건가요. 펠릭스 공작님. 기다렸어요.”
“…….”
“이젠 그 빌어먹을 꼬맹이 괴물에게 가지 않는 거죠? 그 무뚝뚝한 기사와 말을 섞지도 않을 거죠?”
“……그래.”
“아아, 그렇게 말해 주시길 기다렸어요! 이제 당신도 깨달은 거죠? 당신이 내 것이라는 걸!”
자신의 조롱 섞인 대답에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오웬은 차디찬 비웃음을 지었다.
지금 이 미친 여자가 보고 있는 것이 ‘펠릭스 공작’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오웬은 펠릭스 공작을 향한 광기 어린 소유욕에 한 번 미치고, 앨버튼 공작의 혼동 마법에 두 번 미쳐 버려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린 ‘전 레이나 영애’의 아름다운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나를 보며 ‘펠릭스 공작’을 찾아대는 꼴을 듣고 있자니 여간 불쾌한 게 아니군. 앨버튼 공작, 굳이 이들에게 혼동 마법을 걸어야만 했나?”
“네. 펠릭스 공작의 마음을 얻지 못해 ‘완전한 저주’가 깃들지 못한 제물들을 이용하는 방법은 전하를 펠릭스 공작인 양 착각하게 하는 방법뿐입니다. 그래야만 제물들이 가진 강한 집착을 먹는 마법의 힘이, 전하의 피에 흐르는 ‘초대신의 저주’를 막아 줄 테니까요.”
“……끔찍하군.”
“전하의 고귀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일부 희생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요.”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앨버튼 공작의 모습에 오웬은 새삼스럽게 넌더리를 냈다.
죽어서까지 버리지 못하는 한 인간을 향한 그녀들의 탐욕과 그 탐욕을 부추기는 저주의 마법을 ‘축복의 주문’ 속에 섞어 천천히 여자들을 미치게 하는 앨버튼 공작의 마법.
그리고 그 마법을 이용해 미쳐 버린 여자들의 생명을 빼앗아 일시적으로 ‘초대신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나약한 몸까지.
어느 것 하나 역겹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웬은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누르며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들어 올린 채 여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오웬은 자신을 탐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곧장 틀어쥔 검을 내리꽂았다.
“……!”
그러자 뜨겁고 붉은 피가 오웬의 얼굴과 몸 위로 쏟아졌다.
그 순간 그는 며칠 전부터 안에서 자신을 좀먹어 가던 끔찍한 고통이 느릿하게 소멸하는 것을 느꼈다.
오웬은 검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조금 전까지 탐욕스럽게 번들거리던 아름다운 여자의 눈에서 천천히 생명력이 꺼져 가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 무감각한 시선 속 희미한 죄책감이 번뜩인 것도 잠시, 곧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오웬은 손등으로 눈에 묻은 피를 닦으며 뒤돌아섰다.
“앨버튼 공작, 그녀를 치료해 주게.”
“이런, 또요? 전하.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편이 전하에겐 더 나을 텐데요.”
“아직 현 펠릭스 공작 부인에게 완벽히 저주가 걸려들지 않았다 하지 않았나? 그 저주가 걸려들어 완벽히 내 몸에 흐르는 저주의 피를 정화할 수 있을 때까진 내 생명을 붙여 놓을 제물이 필요할 텐데.”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대로 거행하지요.”
오웬이 싸늘한 목소리로 지적하자 앨버튼 공작은 순간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저 미쳐 버린 제물이 죽게 되면 조금이나마 황태자에게 건 마법이 길게 지속되어, 귀찮은 짓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건만. 앨버튼 공작은 황태자의 저런 유약한 동정심 때문에 귀찮게 일을 반복해야 할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나 앨버튼 공작은 능숙하게 그런 속내를 숨기고는 곧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 오웬의 뜻대로 쓰러져 죽어 가는 여자의 곁으로 다가가 회복 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붉은 피를 쏟으며 죽어 가던 여자의 눈에 조금씩 생명의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오웬은 조금씩 살아나는 그녀의 창백한 피부를 잠깐 내려다보다 휙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조금 전까지 다 죽어 가던 여자가 고른 숨을 내쉬게 되자 앨버튼 공작은 미련 없이 몸을 털고 일어났다.
앨버튼 공작은 기절한 것과 같이 눈을 감고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끌고 가라.”
“예, 각하.”
그 명령에 병사들은 여자의 몸을 짐짝처럼 끌고는 석실 밖으로 사라졌다.
오웬은 지친 얼굴로 석실 안 침대로 걸어가 그곳에 등을 기대앉았다. 이렇게 오늘처럼 제물의 몸에 칼을 찔러 넣고 그 피를 뒤집어쓴 날엔 끔찍한 자괴감과 함께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만큼 지친 기분이 들었다.
오웬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앨버튼 공작을 서늘하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앨버튼 공작.”
“……물러나기 전,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앨버튼 공작의 말에 되묻는 오웬의 목소리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앨버튼 공작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으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히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얼마 전 제 귀에 한 가지 헛소문이 들리더군요.”
“헛소문?”
“예. ……전하께서 제 여식 마리안느와의 약혼을 파기할 것을 황제께 주청드렸다는, 그런 헛소문 말입니다.”
그 말에 오웬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앨버튼 공작은 놓치지 않았다. 과연 ‘올빼미’가 보고 들은 대로였다.
앨버튼 공작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감히 그런 속내를 품고 있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앨버튼 공작은 마치 수풀 속을 기어 다니는 독사처럼 은근한 협박이 섞인 어조로 오웬을 향해 말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전하. 전하를 위해, 황실을 위해 우리 앨버튼 가문이 어떤 헌신을 거듭해 왔는지를요.”
“……물론, 잊지 않고 있다.”
“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전하. 이제 더 이상 그레이스에게 깃든 저주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저주’를 완성시키기 위해 이 앨버튼이 쏟은 헌신을요.”
‘헌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이제 저주는 돌이킬 수 없다고 거듭 주장하는 앨버튼 공작의 말 속에는 배신을 경고하는 뜻이 숨어 있음을 오웬은 모르지 않았다.
오웬은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지켜보는 올빼미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앨버튼 공작을 향해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앨버튼 공작은 능구렁이처럼 미소 짓더니 느릿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그러더니 앨버튼 공작은 발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석실 밖을 나갔다.
자욱한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어두운 방 안, 홀로 남게 된 오웬은 울분에 찬 한숨을 토해 내며 주먹으로 앉은 침대를 내리쳤다.
‘대체 이 빌어먹을 짓은 대체 언제쯤이면 끝나지?’
하나의 저주를 풀기 위해, 또 다른 저주를 누군가에게 걸고 그 저주를 받은 자는 또 누군가에게 저주를 걸어, 이미 저주받은 자의 목숨을 잇는 참극.
이 목숨 하나 잇기 위해 죽고 또 죽이고, 누군가를 미치게 하는 빌어먹을 상황들.
그것이 바로 ‘괴물 공작’을 만들어 낸 실체였으며 그 배후를 만들어 낸 ‘진정한 괴물’, 황태자 에우제니우스 클라이브의 정체였다.
오웬은 피에 젖은 몸을 웅크리며 마치 자신을 사슬처럼 옭아맨 저주들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했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저주.
마음대로 죽을 수도 살 수도 없고,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을 가질 수도 없는 목숨.
오웬은 그런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고 또 저주했으나 도망칠 수 없음에 매번 절망했다.
이 끔찍한 참극을 시작한 부황과 모후를 지극히 미워하고 저주하면서도 또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분들께서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어야 했어. 선대의 펠릭스 공작이 가진 힘도, 고모님의 죽음에 얽힌 비밀도.’
그리고 하필 그 비밀을 밝혀낸 사람이 앨버튼 공작이 아니라 다른 멍청한 공작들이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차라리 그랬더라면. 이리 매번 죽거나 미쳐 버린 여자들의 피를 뒤집어쓸 일도, 또 그로 인해 비열한 앨버튼 공작에게 협박을 받을 일도 없었을 터였다.
“으악! 으아아악!”
오웬은 복잡해진 머리를 쥐어뜯으며 토해 내듯 비명을 질렀다.
괴물, 자신은 끔찍한 괴물이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는 살 수 없고, 누군가를 저주하지 않고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은 없다. 구원해 줄 수 있는 이도 없다. 그런 자신의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끔찍한 상황 속, 단 한 줄기 빛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했던 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레이스 앨버튼.”
‘괴물 공작’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유일한 그 여자.
그 여자라면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괴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넓은 여자라면, 자신 같은 괴물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이 목숨을 잇기 위해 자신은 그녀를 죽여야만 한다.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해. 앨버튼 그놈이 모르게, 최대한 빨리.’
괴물도 여느 평범한 인간처럼 사랑을 원하고, 사랑을 위해 얼마든지 바보 같은 짓을 벌일 수 있었다. 또한 그를 위해 무언가를 내던질 준비도 되었다.
오웬은 도망칠 수 없는 저주에, 운명에 또다시 절망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욕심으로 눈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