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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62화 (62/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62화

대체 그 빌어먹을 저주가 다 무엇이기에. 함부로 저주를 운운하며 뒤에서 음험한 짓을 꾸민 제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미웠다.

‘두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진짜 잘못한 건 아버지고, 그 배후에 있는 누군가인데. ……그리고 아마도 그 누군가는 황제이거나 황태자겠지.’

그레이스는 속상한 마음을 추스르듯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품에 안긴 레온에게 다정히 말했다.

“……괜찮아, 레온. 이제 그 누구도 공작님과 너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지 않을 거야.”

“정말요?”

“그럼! 그 사람들이 뭐, 형님의 눈과 얼굴을 보면 미쳐 버린다고 그랬다며? 그런데 레온, 내가 지금 이상해 보여? 미친 것 같아?”

“……아, 아뇨!”

“그렇지? 그 사람들이 뭘 잘 몰라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그레이스가 딱 잘라 말하자 레온이 그 기세에 눌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는 그런 레온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레온에게는 거의 평생을 아서와 자신의 눈에는 저주가 깃들어 있다고 믿고 살아왔을 텐데, 이제 와서 자신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단번에 납득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자신이 행동으로서 보여 주어야겠다. 더욱 적극적으로 앨버튼 공작과 그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실체를 밝혀내겠다고 다짐하며 그레이스는 레온의 가면 쓴 볼을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레온, 가면을 쓰고 벗고 하는 일에 대해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아. 가면을 쓰는 것이 편하면 그것을 계속 쓰고 다녀도 좋고, 가면을 쓰는 것이 불편하면 언제든지 벗고 다녀도 돼.”

“……그, 그치만 어른들이 뭐라고 할 텐데…….”

“만약 누가 또 너에게 저주 운운하면서 뭐라고 하면 ‘겪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아세요?’ 하고 되물어 줘. 그래도 그 사람이 또 뭐라고 하면, 그땐 꼭 나를 불러.”

“……형수님을요?”

“응. 그럼 내가 그 사람들을 혼내 줄게. 감히 우리 귀한 공자님에게 상처를 주다니, 가만있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레온은 나만 믿고 마음대로 하고 다녀도 돼.”

그레이스는 손가락으로 레온의 통통한 뺨을 살짝 꼬집으며 호언장담했다. 그녀의 그 말이 듣기 좋았던지 레온은 볼이 꼬집히고 있으면서도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레이스는 레온의 활짝 웃는 입꼬리에 쪽 소리 나게 입맞춤하고는 작고 검은 가면 뒤에 가려진 레온의 맑은 오드아이를 바라보며 덧붙이듯 말했다.

“잊지 마, 레온. 나는 언제나 네 편이라는 걸.”

“……형수님.”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말에 주눅 들거나 겁먹지 마. 어차피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겁쟁이들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에 상처받을 필요가 없어. 알겠지?”

“……네!”

그레이스의 말에 이제야 겨우 자신을 얻은 듯한 레온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레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실 스스로 말해놓고서도 쑥스럽다 싶을 만큼 느끼하고 민망한 말들이었지만 레온이 조금 더 자신감 있게 살 수 있다면 이 정도 낯간지러운 말쯤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아서는 그런 그레이스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녀의 어깨 위로 팔을 감으며 그 품에 안겨 있는 레온을 향해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다, 레온. 지금 네 가면 벗은 얼굴을 보여 주는 게 어떻겠느냐.”

“……아서!”

“네, 좋아요!”

아서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레이스가 놀라 아서의 이름을 부른 것도 잠시, 곧 기꺼이 그러겠다는 레온의 대답에 그레이스는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원래 의도는 아이에게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말에 주눅 들어 있지 않아도 된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 이래서야 아이에게 가면을 벗으라고 유도한 꼴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가면의 이음새를 푸는 레온의 얼굴이 퍽 즐거워 보여서 그레이스는 곧 힘없이 웃어 버렸다. 그래, 뭐 어찌 되었든 레온이 좋다면 자신도 좋은 거였다.

이윽고 레온의 그 작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이 아이의 가슴으로 툭 떨어진 순간, 그레이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머!”

가면 아래 드러난 레온의 얼굴은 아서를 작게 축소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서와 똑같이 푸르고 붉은색의 오드아이와 아이답지 않게 우뚝 선 콧날까지 아서와 판박이였다.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웃지 않으면 차가워 보이는 아서의 굳은 입매와는 달리 레온의 것은 아기 고양이처럼 입술 끝이 귀엽게 올라가 있다는 것과 턱의 모양이 더 부드럽다는 것 정도였다.

그레이스는 내심 상상했던 것보다 더 귀여운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레온에게 말했다.

“……레온도 몇 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가리고 다녀야겠다.”

“네? 왜요?”

“레온 때문에 딸들이 상사병에 걸렸다고 원망하는 편지를 보내오면 어떡하지?”

“……으아…….”

“부인, 좀 과한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과한 걱정이라뇨. 이대로만 자란다면 제국, 아니 이 대륙의 모든 영애가 다 레온과 혼약을 맺고 싶어서 편지를 보내올 거라고요. 그때 집무실 가득 쌓인 청혼 서신을 보고 후회하지나 마요, 아서.”

그레이스는 다분히 팔불출스러운 발언을 하며 레온을 꼭 껴안았다.

그러자 또다시 그레이스의 품에 안긴 레온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고, 그레이스의 발언에 장난스레 표정을 찡그리고 있던 아서는 그 두 사람의 모습에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따뜻한 펠릭스 성의 아침이었다.

7. 저주받은 생명과 그를 이용하는 자

이 제국의 모든 것들은 그를 위해 존재했다.

그를 위해 존재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가져야만 했다. 권세와 부는 물론이고, 강건한 육체와 역경 없이 평탄한 운명까지 전부 다.

그것은 이 제국의 황태자 에우제니우스 클라이브가 태어날 때부터 절대적인 명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설령 그 ‘명제’를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거짓을 만들어 내고 무고한 생명이 죽고 희생된다 할지라도 그러했다.

* * *

온 세상을 검게 뒤덮고 있던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조금씩 태양이 떠오르는 푸른 새벽.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 오웬은 일찍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후 수족과도 같은 노시종과 유모의 시중을 받아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고 새하얀 제복으로 갈아입은 오웬은 곧 그들이 내미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썼다.

몸 전체를 전부 가리는 그 모습은 마치 황태자라기보단 은둔한 마법사나 수도자 같은 모습이었다. 오웬은 로브의 후드 부분을 잡아 내려 얼굴을 전부 가리며, 제 곁에 선 늙은 시종을 향해 말했다.

“그것들은 지금 어디쯤 와 있나?”

“……그것과 앨버튼 공작께서는 벌써 한 시간 전부터 이곳 황태자궁의 밀실에 도착해 전하께서 준비를 마치고 내려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가. 알겠다. 곧장 내려가도록 하지.”

시종의 보고를 들은 오웬은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곧장 침실을 나왔다. 그리고 침실로부터 이어진 긴 복도를 나와 왼쪽 모퉁이를 꺾은 오웬은 곧 수없이 많은 문이 붙은 벽을 지나 복도 끝에 도착했다.

문도, 창문도 없이 사방이 막혀 있는 그 앞에 걸음을 멈춘 오웬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후 주변에 자신을 수행하는 늙은 시종과 유모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일견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 벽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밀었다.

그러자 벽이 스펀지처럼 쑥 뒤로 밀려나더니 곧 오웬의 앞에 긴 비밀 계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웬은 그 앞에 서서 늙은 시종을 향해 눈짓했고, 늙은 시종과 유모는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그것은 오웬이 이곳을 지났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신호였다. 오웬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홀로 그 어두운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탁, 탁.

오웬은 오로지 벽에 붙은 횃불에 의지한 채 지하로 이어지는 길고 구불구불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이윽고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도착한 오웬은 그 앞에 있는 검은 돌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오셨습니까, 전하.”

그러자 미리 도착해 있던 앨버튼 공작이 오웬을 맞았다.

오웬은 비굴하다 싶을 만큼 정중히 예를 표하는 앨버튼 공작에게 거만하게 인사한 후 주변을 돌아보았다.

거칠고 두꺼운 돌로 사방을 막은 두꺼운 벽,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벽에 붙여 둔 횃불과 중앙에 위치한 작은 침대와 테이블, 그리고 그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긴 검까지.

처음 그 빌어먹을 의식을 치렀을 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이곳의 풍경에 오웬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온 앨버튼 공작을 향해 말했다.

“……제물은? 당장 의식을 치를 수 있는 건가?”

“예, 전하.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오웬의 말에 앨버튼 공작은 비열한 미소를 띤 채 대답한 후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병사들이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 하나를 끌고 오웬과 앨버튼 공작의 앞으로 걸어왔다.

마치 새 신부처럼 눈부시게 흰옷을 입은 그녀는 밧줄에 묶인 채 눈이 몽롱하니 풀려 있었다. 오웬은 마치 위험한 약에 취한 것 같은 그녀의 표정 없는 얼굴을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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