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61화 (61/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61화

그레이스는 손에 쥔 가면을 주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그녀의 말과는 다른 행동에 아서가 의아해하자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아서.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어요.”

“뭡니까, 부인.”

“……레온에게도 가면을 쓰고 벗을 것을 선택할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

“……아.”

“난 줄곧 그 아이가 자기 눈은 저주를 받았다며 주눅 들어 있던 게 가슴이 아팠거든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레온이 자라기 전까진 그 저주가 발동되지 않는 것 같던데, 레온에겐 가면이 쓰고 싶지 않다면 쓰지 않아도 될 자유를 주는 건 어떨까요?”

“…….”

“그리고 어차피 그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기 전에, 우리는 이 저주를 풀어낼 거잖아요. 안 될까요?”

조용히 그레이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아서가 쓴웃음을 짓더니 곧 그녀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말씀을 들으니 내 스스로가 참 부끄럽고 또 레온에게 미안해집니다. 지금껏 나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렵고, 그들이 나로 인해 저주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 두려워 도망치기에만 급급했거든요.”

“……아서.”

“나도, 레온도 이제 마냥 도망치지만은 않을 겁니다. 용감한 당신처럼.”

아서는 그렇게 대답하며 드러난 그레이스의 볼에 짧게 입맞춤했다.

그레이스는 가면을 쓴 채로 받았던 키스와 달리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볼 위에 느껴지는 아서의 체향과 숨소리, 그리고 살며시 맞닿는 살결에 평소보다 더 쑥스러워했다. 아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 달콤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로 꿀처럼 단 대화와 시선을 나누며 두 사람은 그레이스가 거처하는 별채로 들어왔다.

아직 불침번들도 교대하지 않은 시각, 희미한 촛불이 내려진 어두운 계단을 두 사람은 몰래 침실 밖을 빠져나온 장난꾸러기 아이들처럼 살금살금 올라갔다.

이윽고 그레이스의 침실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 문 앞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샐리와 조우했다.

두 사람이 그 가까이에 다가갈 때까지 줄곧 성서를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샐리는 두 사람의 인기척에 번뜩 눈을 떴다. 그러더니 다급히 몸을 일으킨 샐리는 아서의 가면을 벗은 얼굴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얼른 그 곁으로 다가와 소리쳤다.

“어머, 세상에! 공작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신지!”

“……부인께서 더 이상 자신에게 숨기지 말고 모든 것을 말해 달라고 하기에.”

“……어머나.”

샐리는 아서의 대답에 더욱 놀란 듯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더니 흘긋 그레이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는 곧 그레이스의 말간 얼굴에 밤을 지새운 듯한 피로가 깃들었을 뿐,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이자 샐리는 화색이 되어 그레이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 마님께서는 괜찮으신 거죠?”

“응, 괜찮아.”

“아이고!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마님께서 범상치 않으신 분인 것을 전 첫날부터 알았답니다! 마님이야말로 공작님의 진짜 반려라고 내심 생각했었는데 제 생각이 맞은 것 같아 기뻐요!”

“고마워, 샐리.”

“저야말로요! 이렇게 공작님의 맨 얼굴을 뵌 것이 벌써 몇년 만인지! 집사장에게도 올리버 경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고 싶네요! 이번 마님께서는 공작님의 맨얼굴을 보고도 평소처럼 멀쩡하셨다고요!”

“……샐리도 참.”

샐리의 호들갑에 그레이스는 민망한 듯 웃었고, 아서는 짧게 헛기침을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서와 레온을 봐 왔고 두 사람을 자식처럼 보살폈으니 그녀가 이리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아직은 이른 새벽 시간이었다.

두 사람이 슬쩍 민망한 기색을 내비치자 눈치 빠른 샐리는 곧장 그것을 알아듣고 냉큼 입을 다물었다. 아서는 그런 눈치 빠른 샐리의 모습에 살짝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는 말했다.

“……샐리, 명할 것이 있다.”

“어머, 네. 말씀하세요. 각하.”

“한 시간 뒤 이곳에 세 사람분의 아침 식사를 준비해서 가져와 줘. 그리고 올리버 경에게 오늘 아침 식사는 별채에서 해결할 테니 집사장에게 내 몫의 아침 식사는 준비하지 말라고도 전해 주고.”

“네. 알겠습니다.”

아서의 명을 받은 샐리는 곧 허리를 숙인 후 잔뜩 들뜬 뒷모습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 모습에 아서와 그레이스는 나란히 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곧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후 닫힌 그레이스의 침실 문 앞에 선 두 사람은 나란히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짙게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조금씩 밝아 오는 새벽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중앙의 침실에는 레온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중간에 일어나 그레이스를 찾진 않은 모양인지 그레이스가 이 방 밖을 나갈 때와 똑같은 자세로 자고 있는 레온의 모습을 살피며, 그레이스는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잠이 든 아이의 가면 위로 흩어진 긴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으응.”

그러자 그 손길에 잠이 깬 것인지 레온이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얼른 레온을 쓰다듬던 손을 떨어뜨리고는 어느새 자신이 앉은 침대 곁으로 두 개의 의자를 끌어온 아서의 옆으로 갔다.

아서는 자연스레 자신이 가져온 의자에 그레이스를 앉힌 후 자신 또한 그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연스레 서로의 어깨와 머리에 기대며 잠이 든 레온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잘 자네요.”

“평소에는 침실에 사람이 없으면 한밤중에도 깨어나 우는 녀석인데, 아무래도 부인의 침실 안이라 안정감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어머, 그래요? 그런 줄 알았으면 진즉에 내 침실에서 자게 했을 텐데.”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가 안쓰럽다는 듯 레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아서의 미간이 슬쩍 구겨지더니 곧 그레이스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부인.”

“어머, 왜요?”

“……나도 아직 한 번도 부인 곁에서 잠을 자 본 일이 없는데, 저 녀석은 매일같이 부인 곁에서 잠을 청하다니,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부인은 내 신부인데.”

“……아서!”

“유치하다고, 치졸하다고 하셔도 별수 없습니다. 원래 사내의 질투가 여인의 것보다 몇 배는 더 유치하고 치졸한 법이라잖습니까.”

그레이스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어린 동생에 대한 질투를 늘어놓는 아서의 얼굴을 흘겨보다 곧 코를 울려 웃었다.

이리 사람이라기보다 조각상이나 미술품에 더 어울릴 법한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유치한 질투를 하는 저 모습이 자꾸 귀엽게 보였다.

그래서 레온에게 그리하듯 손가락으로 드러난 아서의 볼을 살짝 꼬집자 아서가 표정을 풀며 씨익 웃더니 제 볼 위로 올라온 그녀의 손등을 잡아 그 위로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서인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낯간지러운 감촉에 그레이스는 황급히 손을 빼다가 그만 기대고 있던 의자를 쳐 버렸다.

쾅―.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서 아서와 그레이스는 얼른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자세를 고쳤지만, 이미 그 소리에 잠에서 깬 모양인지 레온은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키더니 작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그레이스가 누워 있던 옆자리부터 얼른 살핀 레온은 그레이스가 곁에 없자 눈을 크게 뜨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자신의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나란히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그레이스와 아서를 발견한 레온은 그제야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 형수님, 형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응, 잘 잤니. 레온?”

“좋은 아침이구나.”

“네. 좋은 아침이에요.”

자신의 인사에 다정히 대답해 주는 아서와 그레이스의 모습에 방긋 웃던 레온은 문득 아서의 얼굴에 가면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난 레온은 아서의 곁으로 다가와 그 얼굴을 작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혀, 형님! 어, 얼굴이…….”

“왜? 내 얼굴이 이상하니?”

“가면 왜 안 쓰고 계세요, 형님?”

“형수님이 벗겨 줬어.”

“……그래도 괜찮아요?”

아서의 대답에 레온은 슬쩍 그레이스의 눈치를 보더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이의 그런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아서의 얼굴이 좋으면서도 가면을 벗은 것에 다른 사람들이 또다시 사랑하는 형님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 염려하는 듯했다.

그 속 깊은 모습에 아서는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찡그렸고, 그레이스는 그런 레온을 다정히 안아 주며 말했다.

“그럼, 괜찮지. 왜? 레온은 이상해?”

“아뇨. 보기 좋아요. 형님은 잘생겼잖아요.”

“그런데 왜 그래도 괜찮냐고 물어봐?”

“……사람들이……. 형님 얼굴이랑 눈만 보면 저주를 받았다고 뭐라고 하니까…….”

“그랬어?”

“……네. 그래서 형님이 저에게도 가면을 쓰라고 하셨는데……. 다, 다른 어른들이 또 형님을 보고 안 좋은 소리를 하면 어떡해요?”

그레이스의 물음에 머뭇거리면서도 솔직히 제 심정을 털어놓는 레온의 말을 들은 아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뿐 아니라 아이의 얼굴에도 가면을 씌울 것을 결정했을 때, 아서는 함부로 떠들어 대는 사람들에게서 레온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이 최선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행동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레온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것 같아 아서는 뒤늦게 자책했다.

그레이스는 그런 아서와 레온의 모습에 속이 상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