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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59화 (59/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59화

“오해하진 말아 주세요, 부인. 그렇다고 그녀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녀들은 모두 나를 만나기 전엔 더없이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을 그리 만든 것은 바로 납니다. 이 가면을 쓰게 된 것도 사실은 앨버튼 공작의 충고였습니다. 그는 내 얼굴과 오드아이에는 숙녀의 탐욕을 부추기는 저주가 걸려 있다고 하더군요. 장차 레온 또한, 자라며 나처럼 될 거라고도 했습니다.”

아서의 입에서 또다시 언급된 자신의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이름에 그레이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그 사람, 아버지의 이름.’

대체 그 사람은 이 일에 어느 부분까지 깊숙이 개입한 걸까. 그레이스는 아버지를 향한 복잡한 원망과 아서를 향한 안타까움이 깃든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서.”

“그래서 솔직히 조금 두렵습니다. 이 얼굴에 서린 저주에, 부인께서도 당하실까 봐.”

“……나 또한 다른 영애들처럼 당신이 다른 곳을 보고 레온을 향해 웃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의 목숨을 위협할까 두려운 게 아니라요?”

그레이스의 물음에 아서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부인의 손에 다치거나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럼요?”

“부인께서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이, 날 두려워하는 것이 나는 가장 두렵습니다.”

아서는 그렇게 대답하며 가면 아래로 눈물을 한 방울 뚝 떨어뜨렸다.

지금껏 그는 인간이 강렬한 탐욕을 위해 사랑 같은 것은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을 수도 없이 봐 왔다. 권력을 위해 사랑하는 딸을 다 늙은 아흔 살의 왕에게 바친 영주라든가, 전쟁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아름다운 아내를 부유한 황족에게 팔아넘긴다든가 하는 그런 역겨운 일 따위 셀 수도 없이 목격했다.

무릇 강렬한 탐욕 앞에 사랑은 덧없이 무너지고 만다.

아서는 그레이스 또한 그런 탐욕에 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혹은 그 탐욕에 지지 않기 위해, 미치지 않기 위해 그녀가 자신을 멀리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처음 그녀에게 욕심껏 사랑을 고백할 때도, 비겁하게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녀가 온전히 이 껍데기 안에 갇혀 있는 연약한 자신을 먼저 사랑해 주기를 바랐기에.

아서는 고여 있던 나머지 한쪽 눈의 눈물을 떨구며 그녀에게 고해성사하듯 말했다.

“……나는 비겁한 사람입니다. 또 겁쟁이인 주제에 탐욕스럽기까지 하니까요.”

“……아서.”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니,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온전히 믿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사람을 보석처럼 소유하고 싶은 마음, 갖고 싶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알기에 그랬습니다. ……나 또한 앨버튼 가에서 보내온 당신의 초상화를 본 순간, 또다시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꺾고 욕심을 내고 말았기에.”

아서의 말을 듣던 그레이스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서 또한 황제의 강권에 이 결혼을 받아들인 줄 알았더니, 그런 속사정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인 아서를 향해 슬쩍 미소 지으며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서가 놓지 않으려는 듯 슬쩍 저항했지만, 그레이스는 가차 없이 손을 빼 버렸다.

그러자 자신보다 족히 두 배는 더 넓은 아서의 어깨가 노골적으로 축 늘어졌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웃음을 삼키며 두 손으로 아서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시선을 맞춘 후 밝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서. 나 또한 그리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누구나 다 비겁하고, 겁쟁이인 부분이 있잖아요? 나 또한 그래요.”

“……부인.”

“엄청 비장하게 말하더니만, 고작 숨기고 있던 것이 그런 거였어요? 그럼 이제 더는 내게 숨기는 것이 없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당신 앞에 숨긴 것이 없습니다.”

“……그렇구나.”

자신에게 오롯이 갖고 있던 비밀을 전부 털어놓은 채, 비장하게 자신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아서를 보며 그레이스 또한 굳게 결심했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전부 드러내 보인 이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비밀’을 알려 주어도 되겠다는 그런.

‘사실 조금 두렵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준 이 사람을 위해 나도 용기를 내야 해.’

그레이스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그럼 나도, 지금껏 당신에게 숨기고 있던 한 가지 비밀에 대해 말할게요.”

“그게 무엇입니까?”

“……아서, 사실은요. ……나, 한 번 죽었었어요.”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부인께서 한 번 죽었었다고요?”

그레이스의 충격적인 고백에 아서가 놀란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어깨를 꽉 틀어쥔 채 연신 시선으로 자신을 살피는 아서의 모습에 작게 웃고는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것 알아요. 믿기 어려울 테죠. 하지만, 사실이에요.”

“……어떻게…….”

“나도 모르겠어요. 음. 죽기 전, 그러니까 첫 번째 생이라고 할게요. 그때 나는 당신과의 결혼이 죽기보다 싫었었어요. 그래서 폐하와 집안이 권하는 당신과의 결혼을 거절하고 무작정 수도원으로 들어갔어요. 당신과 결혼할 바에야 신관이 되겠다고요.”

“……그랬습니까?”

“미안해요. 속상했어요?”

“……아니요. 이해합니다. 나라도 나 같은 괴물과는 결혼하기 싫었을 테니.”

그레이스의 고백에 아서는 또다시 슬쩍 주눅 든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이 꼭 혼이 난 레온 같아서 귀엽다고 생각하며 그레이스는 꼭 쥔 아서의 뺨을 손가락으로 다정히 훑었다.

“만약 그때 당신이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땐 그냥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도 그럴 게, 나에게 있어서 그레이스 앨버튼으로 살아온 내 인생은 하루하루 죽음과도 같은 끔찍한 나날의 연속이었거든요. 그렇게 평생을 살았는데, 그 소문의 ‘괴물 공작’과 결혼해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마음뿐이었어요.”

“……그래서, 나와의 결혼을 피해 수도원으로 들어가셨는데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까?”

아서는 감히 자신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조차 싫다는 듯 돌려 물었다.

그레이스는 다정하고 사랑이 가득한 아서의 말에 더욱 용기를 얻으며 대답했다.

“어머니, 그러니까 앨버튼 공작 부인이 내게 독이 든 생일 케이크를 보냈거든요.”

“부인께선 그걸 드셨던 겁니까.”

“네. 태어나 처음 받아 보는, ‘내 이름이 적힌’ 생일 케이크였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과 결혼하기 싫다고 고집을 피우며 집안에 누를 끼친 나에게 그런 걸 보낼 어머니가 아니었는데, 그땐 그냥 어머니가 처음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해 줬다는 것이 바보처럼 기뻤거든요. 그래서 아무런 의심 없이 입에 그것을 밀어 넣었고, 나는 죽고 말았죠.”

“……앨버튼 공작 부인께선 대체 왜 부인께 그런 흉측한 것을 보낸 겁니까.”

“아마도 방해가 되어서였을 거라 생각해요. 감히 폐하의 명을 거스른 나 때문에 앨버튼 가문이 폐하의 눈 밖에 나는 것도 걱정되었겠죠. ……그 상황에서 나만 사라지면, 폐하께 여러모로 핑계 대기 좋을 테니까요.”

그레이스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아서의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아서는 희미한 죄책감과 자책이 서린 눈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부인. 그때 내가 폐하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부인께서 독을 먹을 일이 없었을 텐데…….”

“왜 당신이 사과를 해요? 날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앨버튼 공작가 사람들인걸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언제든 내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날 없앨 사람들이었어요. 앨버튼 공작가에서 내 존재는 가족이 아니라 ‘정략결혼’을 위한 좋은 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또다시 사과를 건네는 아서를 부드러운 말로 다독였다. 아서는 자신에게는 더없이 괴로웠을 상황들을 담담히 털어놓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끼며 말했다.

“……고통스럽지 않았습니까.”

“고통스러웠죠. 허무했고요. 좁고 구석진 수도원 방에서 홀로 피를 토하며 쓸쓸히 죽어 가는 스스로가 너무 불쌍하고, 또 이렇게 내 운명을 설계한 신을 감히 원망했어요.

……그래서 죽어 가면서 열심히 기도했어요. 그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이 끔찍한 죽음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요. 그러나 그 기도는 아무도 듣지 못한 듯했고 나는 그대로 숨이 끊어졌어요. ……그런 것 같았는데.”

“……?”

“정신이 들고, 눈을 떠 보니 놀랍게도 나는 당신과의 결혼을 거절하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어요.”

그레이스는 지금도 여전히 꿈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어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죠. 그러다 곧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 현실인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가장 먼저 당신과의 결혼을 받아들였어요.”

“……나와의 결혼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부인께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요.”

“그래도 또다시 결혼을 거절해서 첫 번째 생에서처럼 허무하게 죽느니, 차라리. 음, 미안해요. 차라리 저주받은 공작의 아내가 되어 잠깐이나마 시간을 벌자는 계획이었거든요. 그리고……. 음. 이건 당신에게 미안한 말인데.”

“괜찮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솔직히 고하자면 당신의 저주를 이용해서 도망치려고 했었어요. ‘펠릭스 공작과 연을 맺은 여성은 1년 안에 반드시 죽거나 미친다’. 그러니 난 죽기 전 ‘미친 여자’를 연기하며 당신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어요.

여느 전설 속 미쳐 버린 공주들이 그랬듯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 찢긴 드레스를 걸친 채 겁 없이 함박눈이 쏟아지는 겨울의 눈밭으로 사라진다거나 위험한 숲속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는 그런 장면을 연기하려고 했죠.”

“…….”

“그렇게 도망쳐서 적당히 날 찾으러 온 사람들을 피해 숨어 있다가, 세상이 날 잊으면 ‘앨버튼’도 ‘펠릭스’도 없는 이국으로 몰래 도망쳐 ‘그레이스’라는 한 여인으로서 살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늘 당신 몰래 펠릭스 성을 산책하며 기회를 엿보았어요. 어디로 도망치면 좋을까, 하고요. ……솔직히 고하자면 첫 산책 때 레온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그날 밤 당신이 나를 붙잡으러 와 주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그 계획을 진짜로 실행했을 거예요.”

불과 몇 달 전, 자신이 진심으로 시도하려 했던 그 계획들까지 그레이스는 전부 아서에게 털어놓았다.

아서는 그런 그녀의 말을 담담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그레이스는 마주한 아서의 눈에서 담담한 체념을 읽어 냈다.

만약 그때의 그녀가 그 당시의 그에게 솔직하게 모든 계획을 털어놓았더라면 그는 자신을 위해 새로운 신분과 수백 킬로미터를 너끈히 달릴 말을 내주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 그녀가 그것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는 울고 애원하겠지만 결국엔 자신을 위해 보내 줄 것이라는 것도 그레이스는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은 눈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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