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57화
동화책을 읽고, 주방장이 만들어 온 자허토르테와 밀크티를 마시며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어느덧 창 너머로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그레이스의 곁에서 연신 조잘조잘 떠들던 레온의 말소리가 조금씩 졸음으로 느려졌다. 그레이스는 이따금 고개가 툭 떨어졌다 올라오는 레온을 향해 다정히 미소 지으며 물었다.
“이제 그만 잘까, 레온?”
“……으응. 그치만.”
“왜, 자고 싶지 않아?”
레온은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머뭇거리며 말했다.
“……잠이 들 때까지,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돼요?”
그러면서 작은 손을 뻗어 그레이스의 손을 꼭 잡은 레온의 모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그 대답에 레온은 냉큼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언제 졸음을 참았냐는 듯 그레이스의 침대 위에서 눈을 꼭 감았다.
그 와중에도 작은 손으로 침대를 더듬어 그레이스의 손을 찾는 레온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기꺼이 자신의 손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 손을 양손으로 꼭 잡은 레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레이스는 곤히 잠든 레온이 자연스레 자신의 손을 놓을 때까지 다정히 아이의 몸을 토닥였다.
이윽고 레온이 몸을 뒤척이며 잡았던 손을 놓자, 그레이스는 잠든 레온의 머리를 쓸어 넘긴 후 드러난 이마에 짧게 입맞춤하고는 말했다.
“좋은 꿈꿔, 레온. 금방 다녀올게.”
침대에서 일어난 그레이스는 옷장으로 걸어가 안에 걸려 있던 두꺼운 코트를 꺼내 걸친 후 문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복도에서 시립하고 있던 샐리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샐리는 코트를 입고 나온 그레이스의 모습에 놀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 시간에 외출하시게요?”
“응, 잠깐. 아서, 아니 공작님을 만나고 올게.”
“……아. 그런 거라면야. 뒤를 따를까요?”
“아니, 됐어. 오늘은 둘이서만 있고 싶어.”
“네, 알겠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레온을 부탁할게. 잠이 깨서 날 찾으면, 날 부르러 와 줘.”
“예. 걱정 마세요.”
그레이스가 사정을 설명하자, 샐리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기꺼이 그녀를 배웅했다.
샐리에게 레온을 맡긴 후 그레이스는 양초가 켜져 있는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갔다. 별채의 1층 복도는 마치 아서와 처음 밤 산책을 했던 그날처럼 고요했다. 그레이스는 천천히 닫힌 문을 밀었다.
“오셨습니까, 부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문 옆의 기둥에 기대 있던 아서가 문을 열고 나온 그레이스를 발견하고는 다정히 웃으며 인사했다.
그레이스는 수줍게 웃으며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서를 바라보고 말했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나도 막 나온 참입니다.”
“거짓말이죠? 손이 차요.”
그레이스는 살짝 눈을 흘기며 아서의 차가운 손을 제 두 손으로 포갰다. 아서는 자신의 손을 감싸는 그레이스의 작은 손을 꽉 깍지 껴 잡으며 말했다.
“네,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은 좀 기다렸습니다.”
“……미안해요. 레온이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 있느라, 그만.”
“괜찮습니다. 내게 있어 부인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기에.”
“……아서.”
“부인께서는 언제든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 않고 나와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아서는 능청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가 또다시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자, 아서는 못 본 척 잡고 있던 그레이스의 손을 살짝 끌며 말했다.
“조금 전 이 앞을 지나다 보니, 서쪽 탑 앞에 있는 온실에 심어 둔 시네라리아가 아름답게 꽃을 피웠습니다. 보러 가시겠습니까?”
“어머, 네! 좋아요!”
그레이스는 아서의 제안을 선뜻 수락하며 그의 옆에 다가섰다.
아서는 자신과 나란히 선 그레이스를 다정히 바라보며 천천히 별채의 계단을 내려와 어둠이 내려앉은 저택 내 오솔길로 내려왔다.
그 후, 눈이 자주 내리는 펠릭스 성답게 채 치우지 못해 쌓은 눈을 밟으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 채 동쪽 탑까지 느린 산책을 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점점 서쪽 탑 앞에 있는 온실에 가까워질수록 그레이스는 고민으로 말이 없어졌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쪽 탑 앞 온실 앞에 도착했다. 아서는 잡고 있던 그레이스의 손을 놓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더니 그는 품속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그중 가장 작은 열쇠 하나를 빼내 잠겨 있는 온실 문 자물쇠에 그것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온실 문이 열리고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간 아서는 그레이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레이스는 기꺼이 그 손을 붙잡고 아서를 따라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그러자 그레이스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온통 붉고 파란 ‘봄의 정원’이었다.
왕가의 색이라 불릴 만큼 선명한 푸른색과 자주색의 꽃망울을 틔운 수천 개의 시네라리아가 오밀조밀 피어난 모습은 꼭 솜씨 좋은 화가가 그려놓은 양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활짝 피어난 꽃들 위로 날아다니는 색색의 나비까지.
마치 이곳에만 봄이 찾아온 것 같은 풍경에 감탄사를 내뱉은 그레이스는 잔뜩 들뜬 얼굴로 아서를 돌아보며 말했다.
“세상에, 꼭 이곳에만 봄이 온 것 같아요, 아서.”
“마음에 드십니까?”
“네! 너무 예뻐요!”
아서의 물음에 그레이스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서는 그런 그레이스의 손을 잡고 활짝 피어난 꽃이 가장 잘 보이는 벤치 앞으로 걸어가 그 위에 자신의 망토를 벗어 깔고는 그녀를 그곳에 앉게 했다.
그러고는 벤치에 앉은 그레이스의 옆에 이야기하기 좋도록 살짝 몸을 띄워 앉은 아서는 어느새 꽃을 향해 있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자신 또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곳은 내 부친께서 모친의 결혼 선물로 만들어 준 곳입니다.”
“어머, 아버님께서요?”
“네. 꽃과 나비를 좋아하셨던 모친을 위해 부친께서 직접 설계하고 만든 곳입니다.”
“……그러셨구나.”
아서의 설명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핀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관찰했다.
과연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들은 그녀가 수도에 위치한 앨버튼 성에 살 때 자주 보았던 종류였다.
그레이스는 이 추운 펠릭스 성안에 ‘수도의 봄’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선대 펠릭스 공작의 재력과 아내를 향한 마음에 새삼 감탄했다.
아서는 그런 그레이스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레이스는 화려한 온실 속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서를 향해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까. 모두 털어놓았을 때 과연 상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고 믿을 수 있다 생각했기에 전부 털어놓겠다 결심을 해 놓고도, 막상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상대가 자신을 꺼리거나 두려워하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그러던 그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아서였다. 그가 짧고 무거운 한숨을 내쉰 후 주저하듯 말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먼저 부인께서 궁금해하셨던, 오늘 오전 황태자 전하와 나눈 이야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그레이스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아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서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 걱정하셨던 것처럼 대단한 이야기가 오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전하께서는 내게 그레이스,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냐고 물었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서.”
“그러자 전하께서도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내가 앨버튼 성에 도착하기 전날 밤 남들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겼다고 하셨습니다.”
“……말도 안 돼! 밀회는 무슨! 그런 적 없어요!”
이어진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는 흥분으로 핏대를 세우며 거칠게 소리쳤다.
밀회는 무슨, 그것은 그저 비밀을 지켜 줄 것을 빌미로 황태자가 자신을 불러낸 것일 뿐이었다. 그레이스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설마, 그때 아서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그 말을 믿었기 때문일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레이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물론 상황 자체는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정말 신께 맹세코 자신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건만.
그레이스는 아서가 그 말을 믿고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픈 한편, 그가 자신의 해명을 듣기 전 황태자의 말만을 믿고 자신을 속으로 비난한 것은 아닐까 속상해졌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어느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서를 향해 물었다.
“……설마, 그 말을 믿었던 건 아니죠, 아서?”
“물론 아닙니다. 부인께선 내가 부인께 의도적으로 무례하게 굴던 시절, 애인을 만들어도 좋다고 말했던 내게 화를 내셨던 분이 아닙니까.”
그레이스의 물음에 아서는 다정히 대답하며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흰 손을 붙잡았다.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다가온 아서의 손을 꽉 깍지 껴 잡으며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내 도덕성을 믿기에 의심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러자 아서가 대답 없이 미소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설마 이 사람은 내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전보다 더 화가 났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잡고 있는 아서의 손을 확 끌어 그 강한 힘에 아서가 자신을 돌아보게 한 후 소리쳤다.
“아서, 잘 들어요. 내가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지 않는 이유는, 당신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귀부인으로서의 명예, 사람으로서의 도리 이전에 그냥 순수하게 당신이 좋으니 다른 사람과 그런 식의 감정교류를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알겠어요?”
“……부인.”
“믿지 못하겠다면 몇 번이고 다시 말해 줄게요. 좋아해요, 아서.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마음에 담은 적 없어요.”
그레이스는 깍지 껴 잡고 있던 아서의 손을 놓고 두 팔을 벌려 제 곁에 앉은 아서의 목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