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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54화 (54/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54화

온 세상을 비추던 해가 밤의 장막 아래 그 몸을 감춘 고요한 밤.

화려한 한 대의 마차가 황궁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늦은 밤, 졸음을 쫓으며 망을 보던 황궁의 근위병은 정문으로 들어서는 화려한 마차와 그 마부석에 앉은 황태자궁의 시종장의 모습에 얼른 흐트러져 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 경례를 표했다.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쉿. 전하께서 쉬고 계시니 소리를 낮추시오.”

“죄, 죄송합니다!”

“지금 황궁에 폐하께서 계신가?”

“물론입니다. 몇 시간 전 황태자 전하께서 환궁하신다는 연통을 받으시고, 폐하와 황후께서는 줄곧 전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알겠네. 자네는 지금 당장 황제 폐하께 전하의 환궁 소식을 고해 주게.”

“예. 알겠습니다!”

마치 꼬리에 불이 붙은 듯 황궁 쪽으로 달려가는 근위병의 모습을 잠시 눈으로 좇던 시종장은 곧 마부석에서 내려와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굳게 닫혀 있는 마차의 문을 가볍게 노크하며 그 안에 있는 황태자 오웬에게 말을 걸었다.

“전하, 황궁에 도착하셨습니다.”

“문을 열라.”

돌아온 오웬의 대답에 시종장은 냉큼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곧장 마차에서 내려온 오웬은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시종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황뿐만 아니라 모후께서도 날 기다리고 계신다고?”

“예. 그렇습니다, 전하.”

“굳이 두 분을 각각 찾아뵐 필요가 없어서 좋군.”

황제와 황후가 함께 있음을 시종장으로부터 확인한 오웬은 곧장 황궁의 본궁을 향해 걸어갔다.

시종장은 얼른 그의 뒤를 따랐고, 황태자를 보필하는 그의 시종들과 시녀들 또한 황태자의 움직임을 따랐다.

오웬이 본궁에 들어서자, 황제의 최측근인 로쉬 백작이 허리를 굽히며 그를 맞이했다. 오웬은 화려한 제복 차림에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반질반질한 그의 얼굴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내하게.”

“예. 전하. 저를 따라오시지요.”

오웬의 명령에 로쉬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굽실거리며 그를 안내했다.

오웬은 자신과 로쉬 백작이 지날 때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황궁 시종들과 시녀들을 무시하며 걸어갔다.

이윽고 로쉬 백작이 그를 안내한 곳은 황제의 공식 처소 중 하나인 ‘태양의 방’이었다.

오웬은 로쉬 백작이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태양의 방을 노크한 후 문을 여는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다, 문이 열리자 곧장 그 안으로 들어섰다.

“오오, 황태자!”

그러자 태양의 방에서 가장 단이 높은 옥좌에 앉아 있던 황제의 곁에 앉아 있던 황후 마리아가 얼른 일어나 걸어오는 제 아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웬은 자신을 꼭 닮은 녹색 눈에 금발을 곱게 틀어 올린 아름다운 중년의 마리아 황후의 고운 손을 꼭 붙잡으며 다정히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그래,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니? 앨버튼 가의 시종들과 시녀들은 황궁 같지 않았을 텐데, 그곳에서 불편한 점은 없었니?”

“뭐, 늘 그렇죠.”

자신을 붙잡고 연신 염려를 늘어놓는 마리아 황후에게 오웬은 마주 웃으며 말을 흐렸다.

그러던 중, 옥좌에 앉아 마리아 황후와 오웬이 대화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툭 말을 붙여 왔다.

“왔느냐.”

“예, 아버지.”

“생각보다 이른 귀환이었구나. 네 모후가 염려하는 것처럼 앨버튼 성에서의 하룻밤이 적잖이 불편했더냐?”

황제의 물음에 오웬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는 아들의 그런 모습에 금세 그의 속내를 파악해 낸 후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그랬던 모양이구나. 설령 그랬더라도 오늘 밤 파티까지는 보고 오지 그랬느냐. 네 약혼녀인 마리안느 영애의 체면도 생각해 주었어야지.”

은근히 자신을 질책하는 부황의 입에서 마리안느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오웬은 대놓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일과 관련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이냐?”

그러자 황제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오웬을 향해 물었고, 오웬은 잠시 황제를 올려다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 후 오웬은 결심한 듯 맞잡은 마리아 황후의 손을 꽉 붙잡으며 황제를 향해 말했다.

“마리안느 영애와 파혼하고 싶습니다.”

“……뭐라?”

“황태자!”

오웬의 말에 옥좌에 앉아 있던 황제도, 오웬의 곁에 서 있던 황후도 모두 새된 비명을 지르며 그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설마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농담이 지나치구나, 황태자.”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진정으로 마리안느 영애와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황태자!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러나 확인사살을 하듯 오웬이 마리안느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반복했다.

마리안느 황후는 단단히 결심을 굳힌 자신의 아들 오웬의 어깨를 다그치듯 흔들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심각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는 곧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듯 똑바로 자신을 마주하는 아들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아버지, 제발 이 불쌍한 아들을 굽어살펴 주세요. 지금 저더러 사랑의 묘약까지 써 가며 저를 붙잡으려 했던 추악한 여자를 황태자비로 맞이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 일은 앨버튼 공작의 사과를 받는 것으로 일단락된 일이다.”

“그래, 얘야. 그냥 귀엽게 보고 넘기렴. 원래 가문 전체가 떠받들어 가며 키운 영애들은 다 어느 한구석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구는 부분이 있단다. 마리안느 영애의 입장에서 보면 네가 자신에게 냉담하게 구는 것이 얼마나 속이 상했겠니? 그 일에 관해 남은 마음의 앙금은 털어 내고 이제라도 좀 귀엽게 봐 주렴.”

마리안느의 편을 들며 자신의 약혼과 결혼을 강행할 뜻을 비치는 황제 부부의 모습에 오웬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정말 모후의 말처럼 사랑의 묘약까지 써 가며 자신을 붙잡으려고 한 것이 진정 자신의 마음을 얻고자 해서 벌인 행동이었다면, 그 음습하고도 영악한 모습에 소름은 돋았어도 이렇게 증오스럽진 않았으리라.

오웬은 마리안느를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나는 제 기분을 가다듬으며 황제와 황후를 향해 말했다.

“사랑의 묘약까지 써 가며 내 마음 하나를 잡고자 했다면, 백번 양보해서 귀엽게 봐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 그 영애가 내게 원하는 것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내 몸에 흐르는 황실의 피를 이은 아이죠. 아버지께서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닐 텐데요.”

오웬의 싸늘한 일침에 황제와 황후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 사이 이어지던 대화가 잠시 끊기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던 그때, 황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웬에게 말했다.

“……황태자, 혹 마리안느의 마음을 읽은 것이냐.”

“네. 사랑의 묘약을 먹고 발작했던 그날, 그 영애의 추악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세상에! 황태자! 대체 왜 그런 거니!”

담담히 마리안느의 마음을 읽었노라고 고백하는 오웬의 말에 황후가 기겁하며 황태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또 피를 토하진 않았니!? 얘야! 이 어미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니! 네 능력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네 피 안에 흐르는 그 저주받은 힘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네 생명을 앗아 간다고 했잖니!”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심하세요. 그 힘을 사용한 것은 그때뿐입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이 어미와 약속하렴.”

“약속할게요.”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더 큰 아들을 살피는 마리아 황후를 바라보며 오웬은 안심하라는 듯 그 여린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았다.

황제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웬이 그렇게 읽어 냈다면, 분명 그것에 거짓은 없을 터였다. 황제 또한 이미 앨버튼 공작가가 어떤 목적으로 황실을 돕는지 짐작하고 있기는 했지만 오웬의 말로 확인사살을 당한 기분이었다.

황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황태자. 하지만 이미 늦었다. 파혼하기엔 앨버튼 공작과 그 가문 놈들이 황실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만약 이 결혼이 엎어지는 순간, 앨버튼 공작은 곧장 황실에 흐르는 저주받은 피와 그간 펠릭스 공작가에 벌어졌던 모든 불행한 일들에 대해 우리와 그들이 꾸며낸 거짓들에 대해 떠들어 댈 거다.”

“그렇겠지요. 앨버튼 공작부터 시작해서 그놈들은 태어나기를 그렇게 비열하게 태어난 놈들이니까요. 제 가문의 기준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는 버리고, 도움이 안 되는 자는 배신하는 것이 그들의 논리 아닙니까.”

오웬이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빈정거리자 황제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의 말대로 황제와 황실에게 있어 그들은 양날의 검이었다. 그날로 자신들을 위협하는 적을 상대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였지만, 그날이 언제 자신들의 살을 베어 내고 붉은 피를 쏟게 할지는 모르는 그런 검. 그랬기에 더욱 조심하고 몸을 사려야 하는 그런 도구가 바로 ‘앨버튼’이라는 족속들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한 표정으로 오웬을 돌아보며 대꾸했다.

“그래. 그런 놈들이지, 앨버튼 가문 놈들은.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은 우리 편으로 놔두어야 한다.”

“……아버지!”

“네 뜻을 잘 안다. 하지만 지금 그놈들을 잘라 내버릴 수는 없어. 만일 네 말처럼 그놈들에게 파혼을 선언하는 순간, 그놈들은 너부터 쳐 내려 할 테니까.”

또다시 황태자를 향해 파혼을 거부하는 뜻을 내비친 황제는 그대로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후 황제는 천천히 옥좌 아래로 내려와 자신의 아내 마리아 황후와 오웬이 선 곳까지 걸어갔다. 그러더니 그는 자신이 지극히 사랑하는, 단 하나뿐인 후계자인 아들 오웬을 위로하듯 그 얼굴을 주름진 손으로 느릿느릿 쓰다듬으며 말했다.

“참아 내거라. 본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하였다.”

“……저더러 그 끔찍한 계집과 기어이 결혼하란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그래. 마리안느 앨버튼과 ‘결혼’만 하려무나.”

“……아버지.”

그것이 무슨 뜻이냐는 듯 오웬이 되묻자 황제의 눈초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것은 조금 전까지 세상의 모든 고민을 끌어안은 것 같았던 얼굴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황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결혼식까지는 앞으로 두 달, 그 전에 수천 년간 이 황실을 괴롭혀 왔던 저주를 네게서 끊어 내고 나면 가장 먼저 앨버튼 놈들부터 없애 주마.”

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다정히 제 눈앞의 오웬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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