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53화
그 소리에 아서와 그레이스는 동시에 마부석이 위치한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서는 잠긴 목을 짧게 울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밖을 향해 대답했다.
“그리해라.”
“예, 공작님!”
그러자 마부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그레이스는 어느새 슬쩍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아서의 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다 곧 짧게 한숨을 쉬었다.
노골적으로 답답해하는 그레이스의 한숨 소리에 아서는 흠칫 몸을 떨었는데, 그레이스는 그 모습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세간에는 저주받은 공작이라 불리는 저 사람이 자신의 한숨 소리에 큰 몸을 움츠리는 것이 어쩐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참, 나. 저렇게까지 주눅이 들면, 더 추궁하면 안 될 것 같잖아.’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맞은편 아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후 긴장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레이스의 모습을 눈으로 좇는 아서의 어깨에 그레이스는 슬그머니 제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그럼 말을 고를 시간을 좀 줄게요. 마침 나도 공작님께 할 말이 있거든요.”
“……어떤.”
“공작님이 말해 줄 때까진 나도 말 안 해 주려고요.”
그레이스가 놀리듯 말하자 제 어깨에 기댄 그레이스를 내려다보는 아서의 시선이 축 가라앉았다.
그 모습이 꼭 잔뜩 주눅 든 레온의 것과 비슷했다. 그레이스는 남몰래 귀엽다고 생각하며 손을 뻗어 가면으로 가려지지 않은 아서의 아래턱을 다정히 쓰다듬고는 말했다.
“농담이에요. 저택에 도착해서, 우리 둘만 남았을 때. 그때 말해 줄게요. ……그러니까 공작님도 그때 말해 주세요. 전하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인.”
“우리 약속, 잊지 않았죠? 숨기지 않기로 한 거.”
그레이스는 여전히 속내를 꺼내기 망설이는 듯한 아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비밀과 알아낸 사실들을 전부 털어놓고 의논하길 원하듯, 그 또한 그렇게 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 모습에 잠시 말없이 그레이스의 곧은 눈을 마주하고 있던 아서는 곧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부 숨김없이 말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서의 대답에 그레이스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애교 많은 고양이처럼 아서의 어깨에 기댄 채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서는 그레이스가 좀 더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려 주며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에서 편안히 미소 짓는 그레이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마차가 펠릭스 성을 향해 갈 동안, 아서와 그레이스는 서로에게 기댄 채 고요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6. 가려져 있던 진실
태초의 대륙에는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었다.
그 신은 온통 공허뿐인 세상을 빛과 어둠, 그리고 생명으로 가득 채운 자였다.
모든 생명의 아버지인 위대한 그 신에게는 그를 꼭 빼닮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신이 가진 모든 권능을 갖고 태어난 자였기에, 모든 생명은 그를 신과 진배없이 여겼다.
태초의 대륙의 사람들은 신과 신의 아들인 그를 위해 신전을 만들었고, 그들이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들을 바치며 자신들에게 부와 건강과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도했다.
신의 아들은 자신과 형상이 똑같은 그들을 사랑했고, 힘닿는 대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고는 했다. 신은 그런 아들을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늘 한 가지 경고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인간을 어여삐 여기되, 그들을 믿지는 말아라. 그들은 빛과 어둠이 섞여 태어난 존재로, 나와 너처럼 진실하지 못한 존재이니라.’
그 엄중한 경고에 신의 아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충고를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신과 가장 닮아 있고, 또 신과 가장 가까운 그들을 어여삐 여기고 믿지 않는다면 대체 누굴 믿는단 말인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루하리만큼 길고 긴 평화가 이어지던 시절, 아버지인 신이 안식을 위해 어둠에 잠겨 있는 탓에 심심해진 신의 아들이 인간들을 살펴보고자 태초의 대륙에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분주히 수확물을 바치는 사람들 속, 마치 보석처럼 어여쁜 처녀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본 순간 그녀를 향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신의 아들은 친히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녀를 향해 물었다.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라.’
그러자 그녀는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제 소원을 말했다.
‘전능하신 당신을 닮은 아이를 갖게 해 주십시오.’
이미 애욕의 노예가 되어 있던 신의 아들은 그녀의 소원에 기꺼이 응했고, 그녀는 그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정확히 9달 뒤 그녀는 신의 힘을 가진 아이를 낳게 되었다. 신의 아이답게 그 아이는 빛을 만들어 내고, 어둠을 움직일 수 있었으며 생명체를 살리고 죽일 수도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 특출난 능력에 인간들은 전율했다. 인간들은 신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나 신보다는 아둔한 존재였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강한 권능보다 눈에 보이는 신의 아들의 피를 이은 인간의 조악한 권능을 믿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아이를 신처럼 모셨고, 더 이상 신을 위해 제물을 바치거나 신에게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인간들은 신전을 파괴하고 신을 모시는 인간들을 비웃고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어둠에서 안식을 마치고 돌아온 신은 그 어리석은 작태를 보고 진노했다. 감히 신의 권능을 업신여기고 조악한 권능만을 믿고 섬기는 인간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은 욕망에 휩싸여 함부로 처녀의 소원을 들어준 제 아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인간들에게는 저주를 내렸다.
‘누구든 마법의 힘을 가진 자, 그 강력한 힘으로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자는 그 가진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큰 저주를 받게 되리라.’
‘또한, 지금껏 그 조악한 권능으로 신처럼 추앙받은 현 왕가에도 저주를 내리리라. 다시는 신의 권능에 도전할 수 없도록, 저 조악한 인간의 왕의 피가 가장 짙게 흐르는 아이부터 신벌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
그 지엄한 신의 말은 곧장 인간들에게 향했다.
지금껏 조악한 권능으로 신에게 도전하던, 처녀의 아들이자 인간들의 왕은 저주의 신탁을 받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왕의 비참한 죽음에, 그의 왕비와 그의 아들들은 대경실색했다.
위대한 왕이 신의 저주를 받아 죽고 말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순간 왕의 권위는 추락하고, 자신들이 갖고 누리던 왕족으로의 권위 또한 사라지고 말리라.
그들은 남편과 아비의 시체를 두고 끊임없이 논의한 끝에, 왕과 왕가에 신의 저주가 내렸다는 것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또한 그들은 그들 중 가장 죽은 초대 왕을 닮은 막내아들과 그의 일족들에게서 왕족의 신분을 박탈하고 성 밖으로 내보냈다.
신의 저주대로라면 왕의 막내아들과 그 일족들은 빠른 시일 내에 저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왕에 이어 왕을 닮은 왕자와 그 일족들이 또다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져 종당에는 왕가의 저주에 대해 국민들 또한 알게 될 것이 그들은 두려웠다.
그렇게 저주의 비밀을 감춘 왕족들은 그들 중 가장 왕의 피를 작게 이어받은 왕자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왕족이 아닌 평민 출신을 왕비로 삼아 흐르는 피에 녹아 있는 저주를 희석하고자 했다.
다행히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저주받은 초대 왕의 피를 강하게 이어받지 않았고, 이후 점점 흐르는 피를 희석하고자 하는 왕족들의 노력에 그들은 신의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시간과 망각의 힘이, 그리고 신의 아들조차 말려들고 만 ‘탐욕’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간과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점점 저주받은 초대왕의 강력한 피가 희석되어, 초대왕의 일족들이 보통의 평민들과 비슷해지고 만 그때.
평민들과는 남다른 피의 강한 힘으로 정복 전쟁을 벌여 제국의 황족이 된 그들은 그 피에 흐르는 저주를 잊어버리고 또다시 그 ‘피에 흐르는 강한 힘’을 추구하게 되었다.
더욱더 넓은 영토와 더욱더 많은 황금과 부, 그리고 더욱더 높은 명예를 얻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리석은 초대왕의 일족들은 다른 일족과의 혼인으로 애써 피를 희석했던 조상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족내혼과 근친혼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왕적에서 쫓겨났던 초대 왕의 막내아들의 일족을 ‘앨버튼 공작’이라는 작위까지 수여하며 그들과 적극적인 결혼까지 감행했다.
그로 인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피는 짙어졌고, 그럴수록 그 피 안에 숨어든 초대 왕의 권능 또한 강해졌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들의 힘은 더욱더 커져 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또다시 직면하고 말았다.
지금껏 몇백 년간 고요히 잠들어 있다 그들의 탐욕에 다시 눈을 뜨고 만, 신의 저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