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52화
묘한 뉘앙스를 띤 그 말에는 자신을 향한 명백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 아서는 자신을 향해 빙글거리는 오웬을 서늘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지금, 전하께서 지난밤 제 아내와 부정을 저질렀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쎄. 어떠려나.”
아서의 직접적인 추궁에 오웬은 그저 묘한 미소를 띤 채 말을 돌렸다.
그 모습에 아서의 표정이 더 굳어지자 오웬은 속으로 재밌다는 듯 웃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잘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껏 제 아내들의 부정을 안 순간 그것을 검증하기보단 덮어 놓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 넘어가던 아서 펠릭스가 아니었던가.
비록 지금의 아내 그레이스에게 그가 쏟는 애정이 각별한 것 같다는 주변 사람들의 진술이 있었지만, 오웬은 지금껏 괴물로 불리며 살아온 아서의 열등감 앞에 그 사랑 따위 손쉽게 무너지리라 예상했다.
무릇 견고한 사랑을 깨부수는 것은 단 한 번의 의심이라 하였다.
오웬은 자신의 이 말 한마디로 아서가 열등감에 휩싸이기를, 그래서 조금씩 마음속에 그레이스를 향한 의심을 품기를 바랐다.
그래서 종국에는 사이가 벌어지고 아서가 그레이스를 버리는 그 순간, 자신은 그레이스를 가지고 저 괴물에게는 또 다른 아내를 붙여 준다. 그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결국에는 내가 의도한 대로 되겠지.’
오웬은 그렇게 되리라 의심치 않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레이스 영애를 만날 때마다 그대에게 그레이스 영애는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밖엔 안 들어.”
“…….”
“그래서 아쉬워. 마법 능력을 지닌 채 태어났다면, 아마도 미래의 황태자비는 마리안느가 아니라 그녀가 되었을 텐데. 정말이지, 아깝단 말이야.”
오웬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서슬 퍼런 살기만 감도는 아서의 가면 쓴 얼굴을 바라보며 연신 빈정거렸다.
정말이지 그레이스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어 주었다면, 그래서 이 괴물보다 자신의 실체를 먼저 바라봐 주었다면. 그래서 ‘괴물이라도 상관없다’ 말해 주었던 그 마음이 자신을 향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웬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조금만 더 이 겉으로는 단단하지만 속으로는 여리기 짝이 없는 괴물의 열등감만 부추긴다면.
“……하하.”
그런데 줄곧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오웬의 빈정거림을 듣고 있던 아서가 갑자기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이채 어린 오드아이를 들어 똑바로 오웬을 응시하더니 말했다.
“전하께서 제 아내를 마음에 두고 계시는 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리 속 보이는 이간질까지 하실 만큼 간절한 마음을 갖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 속 보이는 이간질?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네,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그레이스 영애를 믿고 있나 보군? 하지만 이를 어쩌나. 어젯밤 그레이스 영애와 내가 늦은 밤, 단둘이 이 앨버튼 저택의 비밀정원에서 만난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을.”
“그랬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하.”
오웬의 말에도 아서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마치 자신의 말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레이스를 향한 굳은 믿음을 가진 아서의 모습에 오웬은 부아가 치밀었다.
고작 두어 달 남짓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열등감 가득하고 자존심 낮은 괴물이 이리 단단한 얼굴을 하게 된 걸까.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것이 익숙하다는 듯 공허한 얼굴로 제 아내들의 부정을 목격하고, 그녀들이 죽거나 미쳐 나갔을 때도 그녀들의 불행을 슬퍼할 뿐 그녀들 때문에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듯했던 그 괴물은 어디로 사라졌나.
오웬은 단단한 신뢰로 굳건해진 아서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정확히 말하면 질투가 나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저 단단한 신뢰의 기반에는 반드시 그레이스 앨버튼, 그녀가 있음이 분명했으니까.
불과 얼마 전까진 자신과 똑같은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아서 펠릭스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오웬은 질투가 나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웬은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태도를 버리고,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아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아주 아내를 향한 신뢰가 굳건한가 보군, 아서 펠릭스 공작.”
“그렇습니다.”
“웃기는군. 그런 사람이 왜 아직도 그 악마 같은 가면을 쓰고 다니지? 솔직히 말해 봐, 사실은 그 가면 밑에 가려져 있는 진짜 그대의 얼굴을 그녀에게 보여 주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닌가? 그 빨려들 듯 기묘한 오드아이와 그 아래 자리 잡은 얼굴에 홀려 점점 이상해졌던 그 공녀처럼?”
“……!”
“그대도 알고 있겠지. 그대를 사람들이 괴물 공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비단 그대의 가족에게 닥친 불행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대가 그대 입으로 말했듯, 그대는 존재 자체가 불행을 몰고 다니는 자야.
그 공녀가 잘못되고 그대에게 저주받은 공작이라는 악명이 씌워졌을 때, 여자들이 왜 겁도 없이 그대에게 달려들었다고 생각하나? 바로 그대가 가진 명성과 돈, 그리고 그 마성 짙은 얼굴에 홀려서였지.”
“…….”
“그대의 외모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전, 집착과 소유욕 같은 어두운 감정부터 불러일으켰다는 걸 그대도 잘 알 테지? 그래서 지금껏 그레이스 영애와 마음을 통하고도 그 얼굴을 보여 주지 못한 것 아닌가. 그 영애 또한 그럴까 봐.”
오웬은 자신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어둠이 내려앉는 아서의 오드아이를 바라보며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같은 괴물이면서, 자신보다 먼저 구원을 얻으려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처음으로 갖고 싶어진 그 여자, 그레이스를 통해서.
오웬의 눈동자는 그레이스를 향한 탐욕과 눈앞의 아서를 향한 열등감으로 저열하게 빛난 채, 눈앞의 아서를 향했다.
“그대 같은 괴물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 아마 그레이스 앨버튼도 그대의 가면 아래 감춰진 얼굴을 보면, 다른 여자들처럼 그렇게 되고 말 거야.”
오웬은 마치 저주를 퍼붓듯 잔인하게 아서를 향해 선언하며 승리자처럼 미소 지었다.
이제 저 괴물의 낮은 자존감을 있는 대로 박살 내 놓았으니 그 마음 위에 질 낮은 의심이 깃드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라 생각하며 오웬은 미련 없이 일방적인 대화를 멈추고 뒤돌아 가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저 두 사람의 견고한 관계의 종말과 결국은 자신에게 그레이스가 손을 내밀게 되는 일뿐일 터였다.
“……젠장.”
그리고 아서는 점점 멀어지는 황태자 오웬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제 약한 부분을 거침없이 찔러 대는 그 비수 같은 말들에 자신 있게 반박하지 못한 것이 분했다.
그것은 그레이스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자신 안에 있는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정말 오웬의 말처럼, 그레이스가 세간에 알려진 자신의 악명보다 한층 더 괴물 같은 자신의 본질을 보고 멀어질까 봐. 그런 마음이 들자 아서는 덜컥 겁이 났다.
‘……사랑하는 그레이스. 나는 겁이 납니다.’
당신은 나의 어디까지 사랑해 줄 수 있을까.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한층 더 괴물 같은, 진짜 ‘나’를 보고도 당신은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당신만은 진짜 괴물 같은 내 모습을 모르기를 바라지만, 당신을 내게서 떼어 놓으려 하는 자들은 결국 내 비밀들을 당신에게 전부 털어놓고야 말리라.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때도, 당신은 나를 지금처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 줄까.’
아서는 그레이스가 자신을 경멸하는 듯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상상만 해도 두려워져서 미칠 것만 같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가능하다면 조금만, 조금만 더.’
신이시여. 할 수만 있다면, 조금만 더 이 위태로운 행복을 만끽하게 하소서.
아서는 괴물 같은 스스로의 처지를 또다시 자각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그레이스를 놓고 싶지 않다는 제 욕심에 자괴감을 느끼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참담한 기분이었다.
* * *
한편, 마차 안에서 초조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던 그레이스는 드디어 할 말을 마친 듯한 오웬이 뒤돌아서자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혼자 마음만 졸이고 있던 시간이 끝났다. 그레이스는 오웬이 떠난 후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서 있다가 천천히 마차를 향해 걸어오는 아서를 몰래 훔쳐보았다.
그러다 아서가 마차 가까이 오자, 그레이스는 마치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듯 후다닥 마차의 창문에서 몸을 떼었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리고, 아서가 조금 지친 듯한 얼굴로 마차 안에 들어섰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맞은편에 와 앉는 아서와 시선을 맞추려 노력하며 물었다.
“대화는 무사히 잘 끝내고 오셨나요?”
“……네, 부인.”
“안색이 영 좋지 않아요. 혹시 전하께서 무슨 좋지 못한 말이라도 하신 거예요?”
“아닙니다. 그저 부인의 귀를 더럽히기 딱 좋은 이야기들뿐이었습니다.”
힘없이 웃으며 대답하는 아서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 아서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의구심을 품고 또다시 그를 불렀다.
“……공작님.”
“네, 부인.”
“솔직히 말해 줘요. 대체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레이스가 대답을 듣기 전엔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묻자 힘없이 축 처져 있던 아서의 얼굴에 쓴웃음이 맺혔다. 그러더니 아서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진득한 감정이 서린 눈으로 말없이 그레이스를 응시했다.
꼭 차마 제 입으로 말을 꺼내기 어렵다 호소하는 듯한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살짝 마음이 약해졌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어쩐지 여기서 조용히 덮고 물러났다간, 앞으로도 순탄치 못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서로 복잡한 속내를 품은 시선이 아서와 그레이스의 사이를 오가고,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였다.
“공작님, 마님! 이제 슬슬 출발해도 될는지요?”
마침 펠릭스 성으로의 귀환 준비를 마무리한 것인지, 마차 밖 마부석에서 자신들을 향해 출발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