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49화
그 후 어느새 꽤 거리를 벌린 오웬을 단숨에 쫓아가며 소리쳤다.
“전하!”
마리안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오웬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에 마리안느는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설마, 황궁으로 돌아가실 건 아니죠?”
그 물음에 오웬은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차갑게 비웃더니 대답했다.
“내가 굳이 여기에 더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그게 무슨 소리세요? 설마 저더러 오늘 밤에 있을 파티에 전하 없이 참석하란 말씀이세요?”
자고로 브라이덜 샤워는 이틀째 밤 이뤄진 파티에서 결혼의 두 당사자가 왈츠를 추는 것이 제국 관례였다.
결혼 전 처음으로 하는 공동작업인 왈츠를 추며, 파티에 초대된 이들의 축복을 만끽하며 그들에게 두 사람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자리란 말이었다. 그런데 그 관례를 무시하고 먼저 황궁으로 돌아가겠다니, 마리안느는 기가 막혔다.
어젯밤 치러진 파티에도 억지로 참석한 티를 팍팍 내며 제게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된 티아라 하나만 턱 던져 주고는 20분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비웠던 오웬이 아니었던가.
그 때문에 안 그래도 그레이스의 차림과 태도로 말이 많았던 귀족 부인들이 오웬의 태도로 인해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 댔는지.
마리안느는 어젯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숙녀로 만든 것도 모자라 오늘 밤에 더한 망신을 안겨 주고자 하는 오웬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지금까지 줄곧 그의 무심하고 차가운 태도를 참고 견뎌 왔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마리안느는 서운함을 가득 담아 오웬을 향해 소리쳤다.
“전하께서 이러실 수는 없어요! 아무리 제게 마음이 없다고 해도, 약혼자로서의 할 도리는 다하고 가셔야죠!”
“……도리? 어젯밤 그 지긋지긋한 파티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내 도리는 다한 것 같습니다만.”
“전하! 어찌 그리 말씀하세요? 정말이지, 전하께 너무 서운하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자신이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오웬의 말에 마리안느는 더욱 흥분하며 언성을 높였다.
“하!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지금껏 줄곧 제게 차갑게 굴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노골적으로 저를 피하고 계시고요!”
“…….”
“지금껏 아카데미를 핑계로 정식 약혼 절차를 미루신 것까진 어떻게든 인내를 끌어모아 참아 보려 노력했어요. 전하께서 이 제국의 훌륭한 황제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전하께서 귀국하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저예요. 그런데 그런 저를 어떻게 이렇게 실망시킬 수 있으신가요?”
“……나는 대체 영애가 내 어떤 부분에 대해 그리 실망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또 그리 피하고 모른 척하시는 건가요? 좋아요! 그럼 감히 수치를 무릅쓰고 묻겠어요.”
“뭘 말입니까?”
“……전하, 정말 그럴 리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혹시 그레이스 그것에게 삿된 마음을 품고 계신가요?”
마리안느의 마지막 물음에 지금껏 냉정한 태도로 마리안느의 항의를 듣고만 있던 오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알기 쉬운 태도에 마리안느는 기가 차 헛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고작, 고작 그따위 무능력자에게 마음이 간다고? 나보다 더?’
마리안느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마리안느는 새파랗게 독이 오른 시선으로 오웬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어쩐지 계속 신경이 쓰이더라니! 지금껏 그레이스에게 줄곧 ‘펠릭스 공작 부인’이 아니라 ‘그레이스 영애’라고 부른 것도 그래서였나요?”
“내가 그녀를 어떻게 부르든, 그것이 그대에게 왜 중요한지 나는 잘 모르겠군요.”
“전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는 전하의 약혼자예요! 제겐 당연히 전하에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있죠!”
그러나 마리안느의 말을 듣는 오웬의 표정은 그녀의 심정을 조금도 헤아릴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듯 무심했다.
이 상황에서 당당하지 못해야 하고, 또 미안해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여야 했는데, 오히려 자신을 예민하고 부당한 항의를 하는 사람 취급하는 오웬의 태도에 마리안느는 기가 막혔다.
“……권리?”
그런데 오웬은 오히려 마리안느의 태도가 우습다는 듯 갑자기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그는 냉기가 뚝뚝 흐르는 눈으로 마리안느를 노려보며 그녀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고는 흥분으로 끝이 빨갛게 익은 그녀의 귓가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가 언제 영애에게 그런 권리를 허락했지?”
“……!”
마리안느는 갑자기 자신에게 하대하는 오웬의 말과 그 아래 깔린 섬뜩한 증오의 감정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웬은 얼음처럼 굳어 버린 마리안느의 귓가에 한 겨울 눈보라보다 더 냉혹한 어투로 속삭였다.
“영애와 영애의 가문인 앨버튼 공작가와 부황께서 내게 바란 것은 그대와의 형식적인 결혼이지, 사랑이 아니었을 텐데? 영애 또한 내게 바란 것은 권력이었고 말이야.”
“……저, 전하.”
“그럼 권력만 가질 것이지, 왜 내 마음 따위를 욕심내는가. 응? 왜, 내 마음을 가지면 영애가 원하는 권력을 얻기 한층 더 수월할 것 같아서?”
“……아, 아내가 남편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다고 하는 것이 그, 그리 잘못인가요?”
마치 눈앞에 먹잇감을 둔 맹수처럼 더없이 냉혹하게 자신을 몰아세우는 오웬의 기세에 눌려 마리안느는 더듬더듬 어렵게 말대꾸했다.
그 말을 들은 오웬이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 진짜 내 사랑을 받고 싶기는 한 건가?”
“……그, 그럼요. 다, 당연하죠.”
“내 ‘진짜 모습’에 역겨워 토악질한 끝에 혼절했으면서?”
“……그, 그 일은!”
마리안느는 어렵게 반론했지만, 곧 이어진 오웬의 말에 마리안느는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뿐인가. 마리안느는 안색까지 새파랗게 질린 채 몸을 떨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래, 잊고 있었다. 그 끔찍했던 모습을.
마리안느는 여전히 생생한, 아버지 앨버튼 공작에 의해 모든 비밀을 알게 된 ‘그날’을 떠올리자 또다시 혐오감에 속이 메스꺼웠다.
오웬은 마리안느의 얼굴에 떠오른 생생한 혐오의 감정과 그로 인해 잔뜩 겁을 먹은 채 떠는 그녀의 모습을 차갑게 비웃었다.
“아직도 그날의 일만 떠올리면 이리 혐오스러워하는 주제에, 내 마음을 갖고 싶다고? 정말이지 그대의 탐욕은 끝이 없군.”
“……저, 전하.”
“감당할 능력도, 마음도 없으면서. 다 갖겠다고 탐욕스럽게 덤벼드는 그대의 모습이 나는 참으로 역겨워.”
“…….”
오웬은 끊임없이 빈정거리며 제게서 뒷걸음질 치는 마리안느를 쫓았다.
그 위압적인 모습에 마리안느는 잔뜩 겁을 먹고 더 빨리 뒷걸음질 쳤다. 그러던 중, 마리안느는 그만 길게 늘어진 제 드레스 자락을 밟고 꼴사납게 비틀거렸다.
그러자 오웬은 한 팔에 마리안느를 잡아챘다. 덕분에 망신스럽게 넘어지는 일은 피했지만 오웬에게 단단히 붙잡힌 마리안느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오웬은 그런 그녀를 비웃고는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나는 내 진짜 모습까지도 사랑해 줄 사람을 원해. 그리고 그것은 그대가 아니지.”
“…….”
“그러니 쓸데없는 욕심이나 오지랖 같은 것은 부리지 마. 나는 그대와 그대의 아비에게 ‘계약한 것’ 이상의 무엇을 줄 생각은 없으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웬은 마리안느를 밀어냈다. 밀어내는 손길은 지나치게 정중했으나, 딱 그만큼 냉정했다.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하죠, 마리안느 영애.”
그 후 오웬은 마치 언제 그녀를 겁박했냐는 듯 정중해진 어투로 마리안느에게 인사를 건넨 후 완전히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마리안느는 점점 멀어지는 오웬의 뒷모습을 두려움과 증오가 섞인 복잡한 시선으로 좇았다. 아직 다 떨쳐 내지 못한 앙금을 생각하면 얼른 쫓아가서 한 소리 더 퍼붓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저 괴물’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이윽고 더 이상 오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마리안느는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얼굴로 주저앉아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 하하…….”
늘 오만한 빛이 감도는 푸른 눈동자에 빛을 꺼뜨린 채 연신 맥 빠진 웃음을 터트리던 마리안느는 곧 갖은 보석으로 치장한 두 손을 들어 올려 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트렸다.
분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황실이 건재하게 유지 중인데, 그 공도 모르고 감히 자신과 가문을 우습게 아는 황태자가 죽도록 미웠다.
그럼에도 자신은 황태자비가 되기 전까진 저 무도한 자의 비위를 맞춰야만 하다니, 그런 자신의 처지가 더없이 짜증스러웠다.
‘어디 한번 두고 보라지.’
황태자비가 되어서, 후계자만 낳으면 그때 지금 받은 수모를 그대로 갚아 주고야 말 것이다. 마리안느는 이를 갈며 연신 눈물을 터트렸다.
“마, 마리안느!”
그 서러운 울음소리에, 앨버튼 공작 부인이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채 드레스 자락을 추스를 새도 없이 꼴사납게 주저앉은 마리안느의 곁에 마주 앉은 앨버튼 공작 부인은 눈물로 젖은 딸의 얼굴을 연신 애처롭다는 듯 매만지며 물었다.
“우리 아가, 대체 왜 우는 거니? 응?”
“어, 어머니. 정말 속상하고 슬퍼서 당장이라도 죽고 싶어요.”
“어미 앞에서 그 무슨 소리니, 우리 아가! 네가 왜 죽어? 응? 곧 황태자비가 될 귀한 우리 딸이 왜.”
“으흑.”
그러나 앨버튼 공작 부인이 달랠수록 마리안느는 더 서럽게 울 뿐이었다. 그 모습에 더 애가 탄 앨버튼 공작 부인이 웅크린 마리안느의 등을 쓸어내리며 채근하듯 물었다.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네게 모진 말이라도 한 거니?”
“……어머니.”
“그래, 우리 예쁜 마리.”
“저는 정말이지 그분이 밉고 싫어요. 증오해요. 괴물이면서, 괴물인 주제에! 은인인 나를 핍박하고 은연중에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그가 싫어요. 그 뿐인 줄 아세요? 제가 싫대요. 사랑 같은 건 기대하지 말래요.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는 정식으로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인데, 계약한 것 이상을 바라지 말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어떻게?”
“……그건 어쩔 수 없잖니, 마리안느. 처음부터 황태자 전하는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잖니? 게다가 ‘사랑의 묘약’을 쓴 것이 부작용을 일으켜 널 미워하는 마음만 더 증폭되었고 말이야.”
“나도 알아요! 안다고요! 백번 천번 양보해서 거기까진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어머니께서도 보셨잖아요. 조금 전 전하의 시선이 줄곧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요!”
자신을 위로하는 어머니 앨버튼 공작 부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마리안느는 분한 듯 이를 갈았다.
사랑 없이 돈과 권력,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정략결혼을 하고 뒤로 애인을 두는 일은 황족이나 귀족들에게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거기까진 괜찮았다.
상관없었다. 사랑의 묘약을 쓴 것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이미 마음을 얻는 것은 포기했다. 지금으로선 솔직히 마리안느로서도 그 괴물이 자신에게 후계자만 안겨 준다면 정부를 몇을 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애정의 대상이 하필 그 그레이스 펠릭스 공작 부인이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랐다. 마리안느는 울화가 치밀어 답답한 가슴을 손으로 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