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48화
그 모습에 마리안느는 짜증스럽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제 곁에 앉은 오웬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그런 눈빛은 감히 황실을 언급하며 제게 건방진 언사를 내뱉은 그레이스에게 오웬이 한마디 해 줄 것을 바라는 듯했지만, 오웬은 그런 마리안느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분명 마리안느는 큰 실례를 범했지요. 하지만 그러는 ‘펠릭스 공작’께서도 주인을 독살 같은 비열한 짓을 벌이는 자로 몰아가시지 않았습니까.”
“…….”
“어찌 보면 서로 같은 크기의 실례를 범한 셈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정작 그런 마리안느의 편을 든 것은 앨버튼 공작이었다.
분명 아서를 향해 말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그레이스를 향한 채, 앨버튼 공작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서로 범한 실례를 상쇄하고 일을 덮는 차원에서……. 그레이스 펠릭스 공작 부인, 부인께서 직접 케이크를 드시고 그 안에 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면 될 것 같은데.”
“……!”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레이스를 돌아보는 앨버튼 공작의 얼굴에는 기묘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그레이스는 단순히 그 미소가 예의상 짓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검은 속내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했다.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대체 아버지 앨버튼 공작은 어디까지 예상해 놓고 있었던 걸까. 설마 자신이 케이크를 보고 놀랄 것을 알고 있었나?
만약에, 정말 만약에 혹시 앨버튼 공작은 자신이 죽음을 맞은 후 살아 돌아왔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대체 아버지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아냐, 그 일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어. 절대로.’
그레이스는 순식간에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것을 느끼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제 눈앞의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아서가 코웃음을 치며 앨버튼 공작을 노려보더니 말했다.
“하. 웃기는군. 앨버튼 공작. 부인께서 공작에게 왜 사과를 해야 하지? 더 큰 실례를 범한 것은 마리안느 영애인데. 그리고 애초에 가겠다는 사람을 붙잡고 이 자리까지 끌고 온 것도 모자라, 음식까지 강제로 권하는 것이 더 큰 실례가 아닌가?”
“오랜만에 본 딸을 보내기 싫어하는 것도 죄입니까?”
아서의 힐난에 드물게 웃으며 대답하는 앨버튼 공작의 얼굴에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이 역력했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의 태도가 황태자 오웬과 그 뒤에 있는 황제가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나왔음을 눈치챘다. 실제로 황태자 오웬은 아서와 앨버튼 공작 사이에 오가는 날카로운 언쟁을 묘한 시선으로 관망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건가요, 아버지.’
그렇다면, 좋다. 어디 한번 눈앞에서 기꺼이 그 개수작에 놀아나 드리리다.
이쯤 되니 이판사판이다 싶었다. 그레이스는 이를 악물며 포크를 집어 들고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한 스푼 떴다.
“모두 그쯤 하지.”
그런데 그때, 줄곧 사태를 관망하던 오웬이 툭 한마디 던졌다. 그러더니 잠깐 묘한 눈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하던 그는 곧 시선을 돌려 앨버튼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자리는 이만 파하는 게 좋겠어, 앨버튼 공작.”
“전하!”
“펠릭스 공작은 그레이스 영애를 데리고 이만 영지로 돌아가게. 아무래도 남은 환담은 나중에 나누어야 할 것 같군.”
전혀 예상치 못한 오웬의 말에 아서와 그레이스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 오웬을 향해 예를 표했다.
“그럼 전하,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끼친 무례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
먼저 작별의 인사를 꺼낸 것은 아서였고 그 후에 사과를 건넨 것은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는 조금 전부터 줄곧 자신을 진득한 눈길로 바라보는 오웬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에스코트를 위해 내민 아서의 팔에 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제 팔에 올라온 그레이스의 손을 다정히 토닥인 아서는 고개를 돌려 서늘한 시선으로 앨버튼 공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앨버튼 공작. 이번 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아서는 그레이스와 함께 빠르게 응접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를 따라 앨버튼 저택 밖으로 나가며, 그레이스는 자신을 위해 싸늘한 분노로 이글거리는 아서의 가면 속 오드아이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아서가 살짝 고개를 숙여 그레이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부인.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레이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자신의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던 어제의 응접실은 그저 답답하고 서러웠는데, 오늘은 당신이 편을 들어 주고 대신 화를 내준 것에 그 설움이 사라지고 그저 기분이 좋아졌다고 하면 너무 어린애 같은 사고일까.
그레이스는 새삼스레 자신이 진짜로 펠릭스 공작 부인이 되었음을, 자신에게도 진짜 자기편이 생겼음을 자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남들이 보면 왜 저러는 건가 싶은 자신의 이상한 호들갑에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검을 뽑으려 할 만큼 화를 내는 이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야겠다고.
그레이스는 여전히 자신을 다정히 내려다보는 아서의 가면 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서.”
“음? 왜 그러십니까, 부인?”
“펠릭스 성으로 돌아가면, 우리 얘기 좀 해요.”
“……내가 혹 잘못한 것이라도 있었습니까?”
이야기 좀 하자는 그레이스의 말에 아서는 조금 당황한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조금 전 자신의 표정이 너무 비장했든가. 그레이스는 살짝 소리 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음.”
“……그냥?”
“아니다. 그냥 우리 저택에 가서 말해 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그레이스는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웃었다. 이상하지, 저택으로 돌아가 꺼낼 화제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것들뿐인데 자꾸 웃음이 났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자신의 말에 같이 웃고, 울고, 아파해 줄 것임을 어느 정도 확신했기에 가능했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무서운 일도 더 이상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은 순간에도 당신과 함께라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끔찍했던 죽음의 기억에서 자신이 빠져나온 것은 당신이 불러 주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이렇게 마음이 또 자라난 걸까.’
그레이스는 불과 며칠 사이 또다시 커져 버린 스스로의 마음에 대해 새삼스레 신기해하며 설레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과 미소에 잠깐 멍청한 표정을 짓던 아서가 곧 그레이스를 따라 환하게 미소 지었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아서에겐 그저 그레이스가 자신의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아서는 조금 더 바짝 그레이스의 곁에 붙어 서며 저택 밖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한편 그레이스와 아서가 문밖으로 나가자, 응접실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웬은 여전히 소파에서 일어난 채 조금 전까지 그레이스가 서 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고, 앨버튼 공작은 그런 그를 관찰했다.
마리안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와 닿지 않는 오웬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레이스의 잔상을 좇고 있는 것에 짜증이 치밀어 손톱을 물어뜯었고, 앨버튼 공작 부인은 그런 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럼 나 또한 이만 실례하지.”
그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오웬이었다.
그는 거만한 태도로 소파에 앉은 앨버튼 일가를 휙 돌아보고는 곧 별다른 인사도 없이 척척 응접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앨버튼 공작이 그런 오웬의 태도에 당황하며 그를 불러 세웠다.
“전하. 아직 전하와 저는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요.”
“오늘 채 나누지 못한 ‘그’ 이야기들은 전서구로 하게. 미안하지만, 오늘은 공작과 딱히 길게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군.”
아직 ‘그 일’에 대해 나눠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이건만,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게 딱 자르는 오웬의 태도에 앨버튼 공작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태도에 안달이 난 것은 앨버튼 공작 부인이었다. 지금 기세로 보면 황태자 오웬은 당장 황궁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그리되면 마리안느는 또다시 망신을 당하고야 만다. 앨버튼 공작 부인은 남편 앨버튼 공작이 한마디라도 더 해 주길 바랐지만, 앨버튼 공작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오웬은 응접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러자 줄곧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오웬만을 노려보던 마리안느가 덩달아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도 이만 실례할게요, 아버지. 어머니.”
“그래라.”
“그, 그래! 네가 좀 나서 보렴!”
마리안느는 마치 자신이 일어나길 기다렸다는 듯 동조하는 제 부모에게 짧게 예를 표한 후 곧장 오웬을 따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