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46화 (46/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46화

그 진득한 시선을 눈치챈 것은 아서였다.

아서는 슬쩍 표정을 굳히며 팔을 내려 그레이스의 손을 꼭 깍지 껴 잡았다. 그러자 그레이스 또한 살짝 떨리는 손으로 제 손을 맞잡는 아서의 손에 손가락을 얽었다.

그 후 그레이스는 자신을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아서에게 생긋 미소 지었다.

“전하, 오늘 이국에서 온 차가 마음에 드신다 하셨지요? 괜찮으시다면 환궁하실 때 따로 챙겨 드릴까요?”

“……아아, 뭐. 좋지요.”

그리고 그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오웬은 앨버튼 공작 부인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보고 있었다.

오웬은 앨버튼 공작 부인을 향해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시선은 오직 세상에 서로 뿐이라는 듯 바라보는 아서와 그레이스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그 시선에 지금껏 오웬이 이곳으로 나온 이래 줄곧 그만 보고 있던 마리안느의 표정이 파삭 일그러졌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에게는 보낸 적 없는 저 집요한 시선. 묘한 눈빛. 마리안느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리안느는 슬쩍 곁에 선 앨버튼 공작의 팔을 손으로 툭툭 치며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앨버튼 공작은 알았다는 듯 제 팔 위에 올라온 마리안느의 팔을 툭 치며 오웬에게 말했다.

“자, 전하. 더 깊은 대화는 이제 자리를 옮겨서 하심이 어떨는지요.”

“……아, 그렇군. 숙녀분들을 이렇게 계속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럼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예, 전하.”

“기왕이면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도록 하지. 다른 숙녀분들께는 미안하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가족’이 모였으니, 오붓하게 가족들끼리만 차를 나누고 싶어서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전하.”

앨버튼 공작의 자리를 옮기자는 제안에 오웬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 후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인 양 자연스레 명령을 내리는 오웬의 모습에 저택 정문 앞 공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삼삼오오 모여 앨버튼 공작가의 사람들과 펠릭스 공작 부부, 그리고 황태자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귀족 부인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시종들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고, 앨버튼 공작 부부와 마리안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오웬과 함께 등을 돌려 저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아서와 그레이스는 그 자리에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아서의 말에 올라타 레온이 기다리고 있는 펠릭스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강권하는 황태자의 태도에 별수 없이 또 앨버튼 성에서 시간을 쓰게 되었다. 그레이스는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축 떨어뜨렸고 아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뭐 하는가, 펠릭스 공작. 그리고 그레이스 영애. 얼른 따라 들어오지 않고.”

그렇게 두 사람이 다정한 시선을 교환하고 있을 때, 마리안느에게서 조금 거리를 둔 채 걸어가던 오웬이 몸을 돌려 두 사람을 향해 채근했다.

그제야 아서와 그레이스는 여전히 손을 잡은 채 느릿느릿 그들의 뒤를 따라 걸어왔다. 오웬은 두 사람이 조금씩 움직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오웬의 시선은 줄곧 꼭 붙잡은 아서와 그레이스의 손을 흘긋거렸다. 더없이 신경이 쓰인다는 듯.

그리고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리안느는 싸늘한 시선으로 오웬을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 *

앨버튼 공작 부부와 마리안느, 오웬, 그리고 아서와 그레이스까지 차례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시종들과 시녀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앞에 차와 디저트를 내왔다.

그레이스는 어제 자신이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시종들과 시녀들이 내놓았던 차와는 사뭇 다른, 한 묶음에 족히 금화 몇 닢은 되고도 남을 고급 차와 은색 트레이에 올린 에클레어와 설탕이 잔뜩 묻은 웨이퍼 등 호화로운 디저트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차별을 겪을 때면 괜스레 또 마음이 상했다.

그러자 줄곧 그레이스의 시선이 차와 디저트에 머물러 있는 것을 눈치챈 아서가 살짝 그녀의 귓가에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부인. 저 중에 마음에 드는 디저트가 있으십니까.”

“네? 아, 아뇨. 그냥 참 다르다 싶어서요. ……어제 저 혼자 이곳에 왔을 땐 그저 평범한 다즐링이었거든요. 그마저도 제대로 마시지 않았지만요.”

“그래서, 많이 속상하셨습니까.”

“아뇨. 뭐. 익숙한걸요.”

혹여 자신의 말을 듣고 아서가 속상할 새라 그레이스가 일부러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자 아서는 별말 없이 그레이스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귓가에 더욱 자신의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대며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는 그런 취급에 익숙해지시면 안 됩니다.”

“네?”

“그런 의미에서, 만약 다음번에 앨버튼 공작이 내 성에 방문한다면.”

“음?”

“그땐 찻잔에 먼저 우유에 부어 차를 대접하고자 합니다.”

“푸핫!”

이어진 그 말에 그레이스는 그만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본디 차를 즐겨 마시는 제국에서는 밀크티를 마실 때 찻잔에 우유를 먼저 붓는지 뜨거운 차를 먼저 붓는지로 출신 계급을 따지곤 했는데, 찬 우유를 먼저 찻잔에 붓는 것은 뜨거운 차를 감당하기 어려운 싼 도기를 쓰는 ‘서민’들이 차를 마시는 방법이었다.

즉, 아서의 대접은 주인이 대접받는 상대가 자신보다 위에 있음을 과시할 때 황족들이나 귀족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었다.

그레이스는 그 유치하고도 모멸적인 복수를 하겠다 당당히 선언하는 아서의 진지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것이었다.

아서는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린 그레이스를 보며 다정히 미소 지었고, 그레이스는 그 시선에 살짝 볼을 붉히며 다급히 지니고 있던 부채로 웃고 있는 입을 가렸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그리 즐거우신 건지 감히 물어도 될까요, 펠릭스 공작님?”

그러자 줄곧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아니꼽다는 듯 보고 있던 마리안느가 그들을 향해 톡 쏘듯 물어 왔다. 그 말에 웃고 있던 표정을 수습하는 그레이스를 대신해 아서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것 아닙니다. 나와 내 아내만이 아는 내밀한 농담을 좀 했을 뿐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아서는 다정히 제 곁에 앉은 그레이스와 눈을 맞추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 또한 가벼운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두 사람이 자아내는 다정한 분위기에 마리안느는 날이 선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았고, 그 곁에서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오웬의 표정 또한 굳어졌다.

앨버튼 공작 부인은 화기애애한 두 사람과 그들을 서늘하게 노려보는 마리안느와 오웬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다 제 곁에 앉은 남편 앨버튼 공작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소중한 큰 딸 마리안느의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것은 가만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앨버튼 공작 부인이 아무리 눈치를 줘도 앨버튼 공작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정한 아서와 그레이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서를 향해 툭 말을 걸었다.

“신혼이어서 그런지 사이가 아주 좋아 보여 보기 좋습니다, 펠릭스 공작.”

“이게 다 앨버튼 공작께서 제게 귀한 영애를 시집보내 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새삼스럽지만 이 사람을 제게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앨버튼 공작.”

“제 부족한 딸을 그리 사랑해 주시니 나야말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펠릭스 공작.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제국을 걸고 한 맹세처럼, 이 사람을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아서는 그레이스의 손을 꼭 쥐며 대답했고, 앨버튼 공작은 그 모습을 드물게 웃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대화인데, 그레이스는 이상하게도 그 대화에서 자꾸만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뭐랄까, 자신들을 바라보며 흐뭇하다는 듯 웃는 앨버튼 공작의 저 시선에 무언가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계획이 숨어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 불길한 예감이 그저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그레이스는 애써 불길한 기분을 떨쳐 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마음속 불안과 공포는 커졌다. 그래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아서의 손에 꾹 힘을 실었다.

“어머, 그레이스. 결혼 전엔 그렇다 싫다, 싫다 하며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더니. 내숭이었나 봐.”

그러던 중, 꼭 맞잡은 아서와 그레이스의 손을 노려보고 있던 마리안느가 툭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레이스는 그 말투 속 담긴 노골적인 질투심을 비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네, 뭐. 그땐 공작님께서 이리 좋은 분인 줄 몰랐으니까요.”

“세상에. 어쩜 정략결혼임에도 연애로 맺어진 사이보다 더 열렬할 수가 있니? 대단하구나. 역시 결혼은 비슷한 처지끼리 해야 하나 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죠?”

“뭐. 사람들은 공작님과 무능력한 네가 안타까운 서로의 처지를 보듬어 주다 사랑이 싹텄다고 하더구나.”

이어진 마리안느의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깎아내림에 그레이스는 화가 나기에 앞서 헛웃음이 터졌다.

그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아서가 줄곧 굳어져 있던 입술을 떼려 하자, 그레이스는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을 꽉 실어 제지했다.

그 후 그레이스는 빙글거리며 자신을 비웃는 마리안느를 향해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왜요? 부러우세요?”

“……뭐?”

“부러우시면 솔직히 부럽다고 말씀하시면 될 것을. 언니는 참 여전히 말도 마음도 가난하시네요.”

“하, 뭐? 이 무슨 무례한……!”

“네, 조금 전 말은 제가 무례했네요.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그 전에 언니도 제게 사과하세요. 그리고 제 남편에게도요.”

그레이스는 어느새 웃고 있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꾸며 분노로 흥분해 새빨갛게 달아오른 마리안느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내가 예전처럼, 당신 말 한마디에 울고 상처받을까 봐?’

이미 자신은 그때의 그레이스 앨버튼이 아니었다. 한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나면서 가족애를 버렸고, 아서와 결혼하기로 결심하면서 앨버튼이라는 이름도 버렸다.

그런 자신에게 더 이상 마리안느 따위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황태자비가 된 이후에도 말이었다.

그레이스는 잔뜩 흥분한 채 씨근덕거리는 마리안느를 비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