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44화
다음 날 아침, 그레이스는 샐리가 자신을 깨우러 오기 전에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겪었던 일들과 그로 인해 생겨났던 공포심을 생각하면 골백번 잠을 설쳤어야 맞는데, 이상하게도 간밤에는 꿈조차 꾸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
그래서인지 피로감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개운한 몸으로 그레이스는 일어나 자신을 깨우러 온 샐리를 맞았다.
언제나 그랬듯 부지런하고 세심한 샐리는 낡은 트레이 위에 더운물이 담긴 은 대야와 간단한 아침 식사를 담아 그레이스의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 펠릭스 저택에서 그랬던 것과 똑같은 아침 준비를 위해 몇 시간 전부터 앨버튼 저택의 시종들과 말다툼을 나누었을 것이 빤히 보이는, 조금은 새침한 얼굴로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샐리는 이미 잠에서 깨어나 앉아 있는 그레이스를 보고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어요?”
“응. 꿈도 안 꾸고 잤어.”
“어머, 그것참 다행이네요. 사실 어제 마님을 홀로 두고 제 침실로 돌아가도 되나 걱정이 많았답니다. 그도 그럴 게, 어젯밤 안색이 영 심상치 않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샐리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말간 그레이스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 다정한 시선에 그레이스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러게.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어젯밤은 마음 편하게 잘 잤어.”
“정말이세요?”
“응. 오랜만에 이 침대에서 잠을 청해서 그런지, 아니면 운동을 해서 그런지 개운하게 잘 잤어.”
그레이스가 일부러 농담처럼 넌지시 어젯밤의 일을 언급하자 샐리의 표정이 엄하게 굳어졌다.
그러더니 어젯밤의 일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는 듯 샐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운동이라뇨, 거의 한밤의 탈주극에 가까웠죠.”
“하하, 그런가?”
“제게 침실에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해 달라는 거짓말을 하시고, 대체 무슨 이유로 앨버튼 저택을 뛰어다니신 것인지에 대해서 굳이 캐묻지는 않겠습니다. 분명 때가 되면 제게 다 말씀해 주실 테니까요.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벌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제가 어제 얼마나 두려웠는지 아세요?”
“……미안해, 샐리.”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시면 그냥 절 시키셔요. 아랫사람을 잘 다루는 것도, 귀부인이 가져야 할 훌륭한 미덕 중 하나랍니다.”
샐리는 연신 훈계를 늘어놓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그레이스를 일으켰다.
그 후 자연스럽게 그레이스를 낡은 화장대 앞으로 인도한 샐리는 살짝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하듯 그레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머리를 만져 드릴까요? 어젯밤처럼 목이 훤히 드러나게 해 드릴까요?”
“음. 글쎄?”
“말씀만 하세요. 설령 마님께서 머리에 요정을 잡아다 장식하고 싶다고 하셔도 그 뜻을 따르겠어요.”
손에 든 빗을 마치 마술봉처럼 휘두르며 말하는 샐리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명백히 그레이스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었다. 조금 전 샐리의 충고는 타당했고, 그녀는 그 충고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푹 잠을 자서 그런 걸까. 그레이스는 현재 봄바람처럼 가볍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대체 왜 자신의 기분이 이토록 즐거울까. 잠깐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곧 간단히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아주 예쁘게 해 줄 수 있어? 오늘은 공작님이 날 데리러 오실 테니까.”
“어머,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가요?”
“응. 이틀 뒤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데리러 오신댔어.”
“어머나. 그럼 구체적으로 몇 시에 올 거라고도 하셨어요? 설마, 아침에 오시겠다고 하셨나요?”
만약 그렇다면 더욱 분주히 움직여야겠다며 호들갑을 떠는 샐리를, 그레이스는 웃으며 만류했다.
“아니, 음. 오전에 오시긴 하겠지만, 샐리가 날 단장할 수 있을 시간은 충분히 있을 것 같아.”
“어머. 두 분께서 미리 시간까지 맞추신 거예요? 몇 시까지 데리러 오시겠다고요?”
그런 거라면 자신에게도 알려 달라고 말하는 샐리에게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은 후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느낌이 그래.”
“그러세요? 음. 그럼 마님의 느낌을 믿고 조금 여유롭게 솜씨를 부려 봐도 될까요?”
“응. 아, 그리고 오늘 드레스는 기왕이면 붉은색이 좋겠어. 기왕이면 짙은 색으로.”
“어머, 오늘은 평소와 다른 색을 고르시네요.”
“응. 어쩐지 오늘 공작님께서 검은색에 가까운 청색의 제복을 입고 오실 것만 같거든.”
그레이스의 말에 샐리는 두 분께서 제복과 드레스 색도 미리 의논하신 거냐며 놀리듯 말했다.
마치 갓 자유연애를 시작한 연인을 놀리는 듯한 샐리의 태도에 그레이스는 살짝 볼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서로 그런 논의가 오간 적은 없었다. 그저 막연히 느낌이 그랬다.
뭐랄까, 머릿속으로 검은 말 위에서 짙은 청색의 제복을 입은 아서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면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그 기분 좋은 상상에 맞춰 일부러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붉은색의 드레스를 골랐다.
샐리는 늘 비슷한 차림만 고집하는 검소한 제 주인의 변화에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미리 준비해 오길 잘했다며 조금 화려하다 싶은 붉은색 드레스를 그레이스에게 입혔다.
그 후 아서가 선물했던 펠릭스 공작 부인의 목걸이를 걸치고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 후 에메랄드로 된 나비 핀을 꽂아 장식했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화장까지 마치고 그레이스는 낡은 은거울 속 비치는 자신을 잠깐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이대로 앉아 있으면 안 될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마치 아서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직접 전해 들은 것처럼.
“샐리, 나가자.”
“네? 어디로요?”
“앨버튼 저택의 정문 앞으로.”
“아, 네. 모실게요.”
그레이스가 얼른 밖으로 나가자며 샐리를 재촉했다. 대체 뭐가 그리 바쁜지 자신을 재촉하며 먼저 일어나 닫힌 침실 문 앞으로 가는 그 모습에 샐리가 허둥지둥 가벼운 코트를 챙기던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침실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그 소리에 그레이스는 침실 문을 열려던 것을 멈추고 곁에 선 샐리에게 눈짓했다.
샐리가 얼른 문밖의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펠릭스 공작 부인, 안에 계십니까?”
“왜 그것을 물으시는지요?”
“아, 그것이. ……조금 전 펠릭스 공작께서 앨버튼 성의 정문을 통과해 저택으로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어머나.”
“그래서 미리 알려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리 실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들려온 목소리는 별채를 돌보는 시종의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시종이 전한 아서의 도착 소식에 반색하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전부터 자꾸 나가고 싶어지더라니. 이러려고 그랬나 싶어 그레이스는 수줍게 웃었다.
‘내가 어지간히 그분이 보고 싶었나 봐.’
고작 하루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이리 그리워질 줄이야.
그레이스는 얼른 나가고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듯 샐리는 얼른 문밖의 시종을 향해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네, 그럼 저는 이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인사를 마치자 곧 문밖의 시종은 몸을 돌려 가 버린 듯했다.
대답을 마치자마자 가 버린 듯 점점 시종의 발소리가 멀어져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그레이스는 제 곁에 선 샐리를 향해 말했다.
“얼른 가자, 샐리.”
“네. 앞장서겠습니다.”
샐리는 얼른 문을 열었고, 그레이스는 빠른 걸음으로 침실 밖을 나와 복도를 내려갔다.
어젯밤, 꼭 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처럼 제 언니 마리안느의 브라이덜 샤워 파티에 참석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곧장 별채의 정원을 가로질러 앨버튼 저택의 정문으로 향한 그레이스는 곧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던, 어젯밤 파티에 참석해 있던 귀족 부인들과 섞여 있던 앨버튼 공작과 공작 부인, 그리고 자신의 언니 마리안느를 발견했다.
그들 또한 그레이스를 발견하고는 안 그래도 굳어 있던 안색을 서늘하게 했다.
그레이스는 자신에게로 쏠리는 그들의 서늘한 시선에 화사했던 안색을 고치며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가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그래. 간밤에 잠자리는 편안했느냐.”
“네. 감사하게도 제가 결혼 후 저택을 떠난 이래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으셔서인지 아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답니다.”
지난밤 잠자리가 편안했냐 묻는 앨버튼 공작의 말이 영 곱게 들리지 않아, 그레이스는 일부러 말에 뼈를 실어 대답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앨버튼 공작의 인상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그 뒤에 서 있던 앨버튼 공작 부인과 마리안느의 어색한 미소는 덤이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말 한마디로 만들어진 불편한 공기를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들의 앞에 섰다. 물론 뒤에서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또한 그레이스는 모른 척했다.
그러던 그때, 닫혀 있던 저택의 정문이 열리고 저 멀리서 몇 필의 말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그레이스는 그 소리에 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 멀리, 거친 숨소리를 내뱉는 말들과 그 위에 앉은 가장 멋진 제 남편이 한 시라도 더 빨리 제게 가까워졌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그레이스의 바람처럼 펠릭스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안장으로 장식된 말들은 앨버튼 저택을 향해 더 빠르게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