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43화
“무슨 이성을 어떻게 찾으라는 거죠?”
그레이스가 겨우 용기를 짜내 오웬에게 되묻자, 오웬은 그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나를 선택해. 그러면 돼.”
“……뭐라고요?”
“나를 선택하면 그대는 목숨도 지위도 모두 가질 수 있겠지만.”
그러더니 오웬은 일부러 그레이스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그러고는 여전히 불안감과 혼란에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는 그레이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 괴물을 선택하는 순간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오웬은 미소 지었다. 그것은 마치 신으로부터 선택 받아 미래를 엿본 예언자의 것과도 같았다.
그레이스는 그 모습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지금 오웬의 말은 그저 잘못된 구애일 뿐이다. 저자는 예언자도 아니다. 그러니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없다.
그저 이 공포는 저 잘못된 구애를 하는 그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이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웬의 말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 애쓰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할수록,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오전에 꾸었던 꿈이 겹쳐지며 떠올랐다.
자신의 몸을 묶은 수많은 병사,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심장에 거침없이 칼을 꽂고, 쏟아지는 자신의 피를 맞고 있던. ……그 남자.
“……!”
그 순간 그레이스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한 폭의 그림을 펼친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바로 자신이 꾸었던 그 끔찍한 악몽 속 자신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눈앞의 남자, 오웬과 꼭 닮아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레이스는 한 발짝 정도의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오웬을 거칠게 밀친 후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잠깐만! 그레이스!”
뒤에서 오웬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났지만, 그레이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더 이상 자신이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서재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숨겨 달라 애원하거나, 조금 전 스스로를 괴물로 지칭한 이유에 대해 물을 만한 이성 따위 없었다.
그저 허리춤에 숨겨 둔 앨버튼 공작의 노트를 챙기는 것만이 유일하게 붙잡은 이성의 끈인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저 자신의 심장에 거침없이 칼을 꽂던 그 남자에게서 도망치고자 하는 생존 본능뿐이었다.
대체 자꾸만 자신에게 도망치라 경고하는 이 공포심은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진정 겨우 되찾은 삶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나온 걸까, 아니면 이 또한 제게 씌워진 저주인 걸까. 그 이유도 모른 채 그레이스는 이 끔찍한 공포에서 달아나고자 끊임없이 달렸다.
도망치고, 또 도망쳐서 이 저택에서 유일한 자신의 편인 샐리를 만난다면 이 공포가 사라질까. 그레이스는 지금 이 순간 샐리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아니, 아서와 레온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마님!”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그레이스의 눈앞에 별채의 낡은 문과, 그 앞에서 초조한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샐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그 반가운 얼굴을 마주한 순간 곧장 샐리에게로 달려들었다.
“어머, 세상에! 대체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이 꼴은 뭐고요?”
“……미안해, 아무것도. 아무것도 묻지 말아 줘. 그냥, 나 좀 부축해 줘. ……침실까지.”
그레이스는 온몸이 식은땀에 젖은 채 헐떡이며 자신을 붙잡은 샐리에게 애원했다.
그 필사적인 애원에 샐리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그녀를 부축할 뿐이었다.
사실은 대체 어딜 다녀오신 것이냐고, 왜 이리 땀에 온몸이 젖을 만큼 경박스럽게 뛰어오신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레이스의 절박한 모습에 샐리는 그 모든 질문을 그저 삼킬 뿐이었다.
“네, 저를 꽉 붙잡으세요.”
“……고마워.”
그레이스는 자신의 팔을 꽉 붙잡고 부축하는 샐리에게 기대 걸어가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 후 자신이 지시한 대로, 촛불을 전부 꺼 둔 자신의 침실까지 걸어간 그레이스는 샐리의 도움을 받아 낡은 소파 위에 몸을 뉘었다. 그레이스는 긴 소파 위에 눕듯 앉아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익숙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더운물을 준비할게요.”
샐리는 식은땀과 밑단이 흙에 젖어 엉망인 그레이스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한 후 침실에 딸린 욕실로 사라졌다.
그레이스는 미처 그녀에게 ‘밖에 들킬지도 모르니 조용히 준비하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겨우 도망쳤다는 생각과 조금씩 평정을 되찾는 마음을 추스를 뿐이었다.
그렇게 욕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샐리가 일으키는 인기척을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힌 그레이스는 느릿한 손길로 허리춤을 더듬어 겨우 가져온 앨버튼 공작의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래도, 이것을 잃지 않아 다행이었어.’
비록 황태자 오웬에게 들켜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었고 또다시 끔찍한 공포를 겪고야 말았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이것을 가져온 것이 큰 수확이었다.
아니, 사실상 이것을 위해 그 모든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노트로 자신은 자신과 아서를 괴롭히는 그 저주에 대해 밝혀낼 것이었기에.
‘반드시 밝혀내겠어.’
이 저주에 얽힌 자들도.
‘저주’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비밀들도.
어느새 공포가 조금 가라앉아 이성이 돌아온 그레이스는 오웬이 자신을 향해 내뱉었던 말들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되뇌었다.
괴물, 나 같은 괴물. 나 같은 괴물도 사랑해 주리라는 그 말. 그리고 황태자의 미래를 언급하며 기뻐했던 이 노트 속 아버지의 기록까지도.
또한, 끊임없이 꾸고야 마는 이 악몽의 원인과 그 꿈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내고 말리라. 그레이스는 그렇게 다짐했다.
“목욕을 도와드릴게요.”
“응. 고마워.”
어느새 준비를 마친 것인지 샐리가 그레이스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그레이스는 얼른 조금 전 자신이 앉아 있던 쇼파 아래에 노트를 끼워 넣고는 샐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 * *
샐리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레이스는 샐리가 화로로 데워 놓은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샐리가 얼른 시트를 그레이스의 어깨까지 올려 덮어 주고는 마치 아이를 재우는 어머니처럼 그레이스를 토닥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주무세요.”
“응, 그럴게.”
“또 저 몰래 빠져나가고 그러지 않으실 거죠?”
“이젠 안 그래.”
“정말이시죠?”
“그렇다니까.”
“……믿을게요.”
조금 전 일 때문에 여전히 불안한 모양인지 샐리는 연신 그레이스를 추궁했고 그레이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해명했다.
그 모습에 샐리는 겨우 안심한 듯 어렵게 몸을 돌려 침실 밖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 어두워진 침실 안. 침대에 파묻히듯 누워 있던 그레이스는 몸을 일으켜 소파로 걸어갔다.
그 후 조금 전 자신이 소파의 쿠션 사이에 끼워 놓았던 앨버튼 공작의 노트를 꺼내 침대로 가져온 그레이스는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의 양초를 켰다.
그리고 침대 위에 엎드리듯 누운 그녀는 앨버튼 공작의 노트를 펼치고는 계속 마음에 걸렸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7월 28일. 마법의 시전 조건, 황제 폐하께서 뛸 듯이 기뻐하셨다. ……그리고 7월 29일. 이 제국의 미래는 내 것이다. ……황가의 존속, 황태자의 미래. 그리고 이 제국의 흥망성쇠…….”
그레이스는 그 부분의 기록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연신 곱씹었다.
대체 앨버튼 공작이 알아낸 ‘그 마법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마법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황제가 기뻐했을까.
아무리 봐도 알쏭달쏭한 그 기록들에서 뭔가 자신이 놓친 단서는 없을까. 그레이스는 계속 그 부분을 들여다보며 고민했지만 딱히 짚이는 것은 없었다.
“그저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버지가 알아낸 그 마법과 황태자 전하는 연관되어 있다, 정도이려나.”
그리고 그 ‘마법’의 시전 조건을 알아낼 수 있도록 실마리를 준 것이 바로 아서의 전 부인과 약혼자들에게 일어난 불행이라는 것.
지금까진 그레이스가 알아낸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레이스는 끙, 하고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노트를 덮었다.
더욱더 진상에 접근하기 위해선 뭔가 더 실마리가 필요했다. 역시 또 앨버튼 공작의 서재에 숨어들어야 하는 걸까 하고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그리 허술한 사람이 아니야. 분명 오늘 일로 경계를 더욱 강화할 테지.’
그러니 만약 또 단서를 얻기 위해 숨어들었다간 이번엔 제대로 들켜 경을 칠 게 뻔했다.
그레이스는 또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완전히 드러누웠다. 정말이지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더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고 노트를 제 베개 밑에 밀어 넣은 후 옆에 켜진 촛불을 후, 불어 껐다.
그러자 다시 침실 안은 어두워졌다. 그레이스는 어두운 천장을 잠시 바라보다 곧 눈을 감았다. 그리 피곤하진 않았지만, 또다시 내일을 버티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눈을 감고 있던 그레이스가 한참을 뒤척인 끝에 잠이 들었을 때였다. 또다시 지난밤처럼, 아무것도 없던 천장에 기괴한 문양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진한 녹색의 빛을 띠며 마치 덩굴처럼 길에 뻗어져 나온 그 마법의 힘은 잠든 그레이스의 몸을 휘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 기괴한 문양에서 뻗어 나온 힘이 그레이스의 몸을 휘감던 그때, 그레이스의 몸에서 옅은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그 힘에 녹색의 기괴한 빛이 푸른빛을 삼키듯 달려들었고, 잠시 동안 두 빛은 격렬하게 불꽃을 튀기며 싸워 댔다. 마치 한쪽은 그녀를 지키려는 듯 보였고, 한쪽은 그녀를 해치려는 듯했다.
그러다 결국 패배한 쪽은 천장에서 뻗어져 나온 녹색의 빛이었다. 그 빛은 잠든 그레이스의 몸 위로 단단히 방어진을 구축한 푸른빛의 기세에 점점 뒤로 물러나더니 곧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그레이스를 단단히 보호하고 있던 푸른빛마저 천천히 사그라들더니 곧 그 빛을 감춰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