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42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오웬을 노려보며 당차게 대꾸하는 모습에 오웬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그녀가 앨버튼 공작의 서재에서 숨겨 온 서책을 가리켰다.
그레이스는 혹여 그가 서책을 빼앗을세라 얼른 두 손으로 그 부분을 감싸며 오웬을 향해 이를 갈며 말했다.
“……대체 내게 뭘 원하시는 건가요, 전하.”
“조금 전부터 계속 말했을 텐데요. 나와 대화를 좀 하자고, 그거면 된다고요.”
“전하께서 저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으시다고요? 지금 전하께선 저보다 오늘 이 파티의 주인공인 마리안느 영애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셔야 할 텐데요.”
기어코 그레이스의 입에서 마리안느의 이름이 나오자 오웬의 미간이 구겨졌다. 오웬은 불쾌하다는 듯 그레이스를 마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는 그대야말로 내게 딱 30분 정도만 내준다면 그 모든 것을 숨겨 주겠다는데 왜 거절하는 거지? 그대에게 내 제안은, 꽤 이득이 되는 제안이지 않나?”
“……!”
“그리고 아무리 그대가 공작 부인이라고는 해도, 황태자인 내게 태도가 너무 불손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내가 이 문제를 트집 삼아 펠릭스 공작을 문책해도 상관없는 모양이지?”
고집스런 그레이스의 모습에 오웬은 어느새 말까지 낮추며 그녀를 향해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분한 눈으로 오웬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러자 오웬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그가 이 지리멸렬한 알력다툼에서 승기를 거머쥐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그레이스는 복잡한 표정을 한 채 한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말했다.
“대체 저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알겠습니다. 전하. 이 그레이스 펠릭스, 전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라는 대로 깍듯이 황태자로서 그를 대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오웬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오웬은 묘하게 굳은 얼굴로 그레이스를 잠시 내려다보다 곧 한숨을 내쉬며 근처의 벤치를 가리켰다.
“그럼 저곳에 잠깐 앉지.”
이제 완전히 공대를 집어치우고 거만한 태도로 그레이스에게 명령하는 오웬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따랐다.
그 후 벤치 중앙에 앉은 그를 최대한 피해 끄트머리에 기대듯 앉은 그레이스는 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웬을 향해 말했다.
“자, 이제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했어요. 그러니 이제 전하 차례예요. ……대체 저와 이렇게까지 하며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 거죠?”
오웬은 얼른 자신과의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듯 재촉하는 그녀의 말에 별다른 대답 없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기를 몇 분, 그레이스는 자꾸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웬의 모습에 결국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또다시 그를 재촉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고 이리 뜸을 들이시……!”
“그 괴물, 아서 펠릭스 공작을 진심으로 사랑하나?”
그런데 그 순간 지금껏 묘한 침묵을 유지한 채 그녀만 바라보고 있던 오웬이 그녀에게 그렇게 물어 왔다.
그 질문은 그레이스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그레이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그것을 왜 궁금해하시죠?”
“왜, 대답하기 곤란한가?”
그레이스는 이기죽거리듯 묻는 황태자 오웬을 향해 꽤 건방진 헛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하, 네. 전 그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레이스의 그 대답은 오웬을 향한 선언이자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확언이었다.
아직 서로가 가진 모든 비밀을 터놓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상대는 서로뿐일 것이라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더욱 묘하게 시선이 짙어진 오웬이 그레이스를 향해 또다시 물었다.
“그 괴물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죽게 된다고 해도?”
그 말에 당당하던 그레이스의 당당했던 표정이 잠시 멈칫했다.
죽음이라, 글쎄. 과연 죽음의 앞에서도 그를 사랑한다 확언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며 생각하던 그레이스는 곧 오웬에게 대답했다.
“대체 왜 제 감정에 대해 이토록 궁금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대가를 운운하시며 절 협박하시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
“그래.”
“솔직히 아직은 모르겠어요. 공작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반반이에요.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요? 어찌 되었든 사랑을 하려면 내가 ‘살아’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공작님 곁에 있으면 난 죽거나 미쳐 버릴 두려움에 늘 노출되어야 하죠. ……그래서.”
“그래서?”
되묻는 오웬에게 그레이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고민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어떻게든 그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 발버둥 쳐 보겠다는 거예요.”
“……!”
“더 이상 공작님, 아니, 아서가 저주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건 싫고 또 그가……. 나 말고 다른 아내를 맞는 것도 싫으니까요.”
그레이스의 그 대답을 들은 오웬은 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스는 그것이 대화의 종료 사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미련 없이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며 눈으로 자신을 좇는 오웬을 향해 말했다.
“……그럼 더 이상 제게 궁금하신 것은 없어 보이시니,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한 밤 되시길.”
더없이 정중히 인사를 마친 그레이스는 종종걸음으로 벤치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그런데 멀어지던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가라앉은 오웬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그대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
“……!”
그와 동시에 그레이스는 뒤에서 자신의 손을 붙잡는 오웬의 억센 손에 붙잡혔다. 그레이스는 기겁하며 그 손을 뿌리치기 위해 흔들며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십니까, 전하! 당장 놓아주세요!”
“그대에게 반했어.”
“……뭐라고요?”
“아마도 처음 본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제게는 기억에도 없는 일입니다!”
그레이스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손을 잡은 오웬의 손을 뿌리쳤다.
대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상황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건지 아직도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저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도망치라는 경고음만이 울렸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힘껏 뿌리친 손을 또다시 제게 뻗으려는 오웬을 향해 소리쳤다.
“제발, 이성을 되찾으시길 바랍니다. 전하!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대체 제 어떤 면에 반하셨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착각이 아니야.”
“아니요, 착각이십니다! 설령 착각이 아니라도 착각이어야 합니다! 전하께선 장차 저희 언니의 남편이 되실 분이고, 저는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이니까요!”
“내 약혼은 이 일에서 거론될 이유가 없어. 나는 마리안느 영애에 대해 단 한 톨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전하. 제발.”
그레이스는 더없이 열렬한 눈으로 자신을 좇는 오웬에게서 자꾸만 뒷걸음질 쳤다.
대체 이 사람이 제게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혹여 자신이 무언가 그에게 여지를 준 걸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자신이 오웬에게 특별히 호의를 베푼 기억 따위 없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답답해하며 소리쳤다.
“전하! 저는 단 한 번도 전하께 특별한 친절을 베푼 적도, 전하를 위해 무언가를 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전하께 어떤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오나, 그 행동은 전하께 그 어떤 호의가 없었음을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니…….”
“아니, 내 마음을 사는 데 그대의 호의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어.”
“……그게 무슨…….”
“나는 그대가 그 괴물 놈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모습에 반했으니까.”
“네!?”
이어진 오웬의 말에 그레이스는 기가 막혀 되물었다.
그사이 오웬은 도망치는 것을 멈춘 그레이스의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레이스의 살짝 흐트러져 내려온 긴 은발을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알기로, 그대는 아직도 펠릭스 공작의 가면 밑 얼굴을 본 적이 없지?”
“……그건 또 무슨…….”
“그 가면 밑의 얼굴이 흉측하기 짝이 없다 해도, 그대는 그자를 사랑하겠지? 변함없이?”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전하. 알아듣게 말씀해 주세요.”
“그래. 나는 그대의 이런 모습에 반했어. 그대가 이전의 다른 여자들처럼 그 검은 가면 밑 얼굴에 대해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혼자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공포감에 휩싸여 갖은 호들갑을 떨었다면 김이 샜을 텐데.”
그 말과 함께 싸늘하게 웃는 황태자, 오웬의 잘생긴 얼굴은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레이스는 오웬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대체 왜 그가 아서와 그를 거쳐 간 여자들에 대해 언급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여전히 서늘한 미소가 걸린 오웬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서 고작 그 태도 때문에 저를 마음에 두셨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고작이 아니야.”
오웬은 그레이스의 반문을 차단하듯 일갈하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더니 그는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은 그레이스의 푸른 눈을 홀린 듯 바라보며 달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잖아? 그따위 괴물을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여자라면, 나 같은 괴물도 사랑해 줄 테니까.”
“……네?”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레이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 같은 괴물이라는 건, 본인을 말하는 거지? 대체 왜?’
대체 무슨 의미로 오웬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 말의 의미를 되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그 말을 되묻기 전, 마치 키스를 할 듯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황태자 오웬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다급히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가렸다.
그러나 오웬의 얼굴은 그레이스의 입술이 아닌 그레이스의 귓가에 와 닿았다. 마치 밀어를 속삭이려는 듯 그레이스의 귓가에 얼굴을 바싹 가까이 댄 오웬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 조금 전 나에게 이성을 되찾으라 간언했지?”
“……!”
“아니, 틀렸어. 이성을 찾아야 할 것은 그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