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40화
벌써 파티를 시작한 지 세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
그때까지도 도착하지 않은 황태자 때문에 파티는 여전히 시작하지도, 끝난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지속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루해진 귀족 부인들은 하나둘 자리를 잡고 카드놀이를 하거나 악사들의 연주를 듣고, 음유시인들의 노래를 들으며 술과 음식을 즐겼다.
더 이상 그들의 안중에, 가득 쌓인 선물들 사이에 앉아 날카로운 눈으로 입구만을 노려보는 예비 황태자비는 없었다.
몇몇 젊은 귀부인들이 마리안느에게 다가가 말도 걸고 음식도 내밀었지만, 날 선 거절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겉으로는 화기애애하지만, 속으로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의 파티가 이어지던 그때. 파티장 구석에서 샐리가 가져온 물만 들이켜고 있던 그레이스는 슬슬 눈치를 살폈다.
와인에 취한 부인들이 하나둘 파티장 구석의 살롱으로 가고, 남은 사람들이 카드놀이와 음악에 빠져 있는 지금이 몰래 빠져나가기엔 최적의 순간이었다.
그레이스는 다시 한번 주위를 살피고는 제 곁에 앉아 지루한 듯 눈을 깜빡이는 샐리를 향해 귓속말했다.
“……샐리.”
“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샐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샐리, 이제 그만 나가자. 나 좀 부축해 줘.”
“……네? 부축이요? 어지러우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일단 나가자.”
그레이스는 눈치를 살피며 샐리의 부축을 받으며 파티장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아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복도의 구석진 모퉁이 앞에 도착한 그레이스는 샐리에게서 기대 있던 몸을 떼어 내며 말했다.
“샐리, 혹시 사람들이 오늘 밤 내 행적에 대해 묻거든 홀로 와인에 취해 먼저 침실로 갔다고 전해 줘.”
“……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나랑 걸치고 있는 코트 바꾸자. 그리고 이것들 좀 들고 먼저 침실로 올라가서 내 침실의 불을 다 꺼 줘. 와인에 취해 깊은 잠이 든 척.”
“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시게요?”
“미안. 그럴 일이 있어.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다 설명할게. 알았지? ……혹시 날 찾으러 오거든 샐리는 내 침대에 누워서 나인 척 좀 해 줘. 부탁해!”
“마, 마님!”
“쉿! 미안! 그럼 좀 부탁해!”
그레이스는 걸치고 있던 보석 목걸이와 장신구를 전부 떼어 낸 후 샐리의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샐리에게 신신당부를 건네곤 고개를 숙인 채 경계심 어린 얼굴로 어둠이 길게 내려앉은 복도를 빠르게 지나쳤다.
혹여 복도에서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나 다른 앨버튼 공작가의 사람들과 마주칠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었다.
‘……만약 황태자가 파티장 안에 있어 그들의 이목을 확 사로잡고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런 상황을 기대하기 힘든 지금, 스스로 조심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그레이스는 긴장감으로 두근거리는 제 심장을 진정시키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후 발소리를 죽인 채 빠르게 복도를 지나쳐 아무도 없는 본채의 계단을 오른 끝에, 그레이스는 앨버튼 공작의 서재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모두 황태자를 마중 나간 것인지 서재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하나 찾아보기 힘들 만큼 고요했다.
안심한 그레이스가 천천히 문고리에 손을 뻗던 그때였다.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레이스는 화들짝 놀라 서재 문 근처의 기둥에 숨어 어둠에 잠긴 주변을 살폈다.
‘……뭐야.’
그러나 그 이후 들려오는 수상한 소리나 인기척은 없었다.
‘잘못 들은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레이스는 더욱 경계심을 높여 숨소리마저 죽인 채 조심스럽게 서재의 문을 열었다.
“……윽!”
그러자 책과 서류가 가득 쌓인 방 안에서 매캐한 먼지 냄새가 확 느껴졌다. 그레이스는 그 순간 절로 재채기가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얼른 서재의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윽!”
그리고 홀로 남은 서재 안에서 격렬한 기침을 토해 낸 그레이스는 구토와 가까운 기침을 하느라 살짝 눈물이 맺힌 눈으로 서재를 살폈다.
책상, 의자, 벽난로 등 무언가 올려놓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되는 모든 곳에 책과 양피지 서류들로 한가득 쌓여 있는 그곳은 늘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던 어릴 적 기억과 너무도 달라 당황스러웠다.
그레이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빼곡히 쌓인 책과 서류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하지?”
쌓여 있는 책과 서류의 양, 그리고 어둠 속 희미하게 내려오는 달빛만을 의지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로는 도저히 단 몇 시간 만에 다 살펴보고 헤집어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떡해야 할까, 잠깐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곧 책상 위에 놓인 것부터 차례차례 살피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버지 앨버튼 공작은 가장 중요한 서류는 책상 위에 놓고는 했으니, 분명 자신이 찾는 것도 거기 있을 터였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쌓인 종이와 서책을 밀어내며 샐리가 보았다던 그 ‘작은 서책’을 찾던 끝에, 가장 아래 서랍에 그것과 비슷한 작은 책이 놓인 것이 눈에 띄었다.
그레이스는 얼른 그것을 집어 들고 첫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자 익숙한 앨버튼 공작의 필체로 무언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1월 28일. 펠릭스 공작 부인의 시신에서 해석할 수 없는 고대 마법의 문양을 발견했다. 아마도 이것이 그 저주인 듯하다.]
‘……어?’ 그 문구에 그레이스의 표정이 멍해졌다.
고대 마법의 문양이라니, 그건 대체 뭘까. 그리고 펠릭스 공작 부인이라면 아서의 어머니이신 선대부인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엘렉트라 공녀를 말하는 걸까.
의문 가득한 얼굴로 그레이스는 얼른 기록된 서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3월 24일. 지난 두 달간 그 고대 마법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려 했지만 찾아내지 못했다.]
[5월 1일. 남은 시간이 자꾸 줄어들고 있다. 내게는 남은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레이스는 군데군데 뜯어지고 검은 잉크로 지워진 서책의 알쏭달쏭한 문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고, 대체 왜 남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까. 그 기록들을 읽고 있는 그레이스에게도 의문이 가속되던 그때였다.
[7월 28일. 드디어 알아냈다. 그 마법의 정체를, 그리고 그 마법을 시전하기 위한 조건을. 나는 곧장 황제 폐하에게 그 사실을 전했고, 폐하께서는 뛸 듯이 기뻐했다. 아아, 드디어 내가 해낸 것이다.]
[7월 29일. 이제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 제국의 미래는 내 것이다. 황가의 존속, 황태자의 미래, 그리고 이 제국의 흥망성쇠는 내 손에 달려 있다.]
“……뭐?”
드디어 앨버튼 공작이 비밀을 밝혀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레이스는 흥분과 기대감, 그리고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뒷장을 넘겼다. 제발, 자신이 찾고자 하는 ‘저주의 비밀과 해법’이 그곳에 있기를 기대하며.
그러나 그레이스의 기대와는 달리 그 뒷 페이지에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중간중간 거칠게 그 부분을 뜯어낸 듯한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그레이스는 안타까움에 아랫 입술을 깨물며 일단 그 수첩을 제 속 드레스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다시 책과 서류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수색을 멈출 수는 없었다. 뭔가, 조금이라도 더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이 분명 아직 이 안에 남아 있을 터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찾고 있던 그때였다.
끼이익.
“……!”
서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그레이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임이 분명한 형체가 그레이스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그레이스는 다급히 몸을 웅크려 책과 서류가 가득 쌓인 책상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가득 쌓인 책 때문에 그레이스는 몸을 다 숨기지 못했다.
‘이런!’
그레이스는 조금씩 자신이 서 있는, 희미한 달빛이 내려오는 창가로 다가오는 그 형체의 모습을 피해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서 있는 그레이스의 허리를 억센 팔로 확 휘어 감더니 억센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으읏!”
“쉿, 조용히!”
그레이스는 그 남자에게 거세게 반항했지만 이미 억센 팔로 그녀의 몸을 구속한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발버둥 치고 있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그레이스의 몸을 책상 밑으로 거칠게 떠밀었다.
“……!”
그와 동시에 희미한 달빛이 내리쬐는 창가를 제외하고 어둠에 잠겨 있던 서재에 불이 들어왔다.
“대체 누구냐! 내 서재를 소란스럽게 하는 자는!”
동시에 그레이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그 목소리,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켰다. 이젠 다 틀렸어.’
그리고 그 목소리에 그레이스가 몸을 웅크린 채 절망감으로 눈을 질끈 감던 그때였다.
“미안하네, 앨버튼 공작. 내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지 뭔가.”
조금 전 자신을 책상 밑으로 밀쳐 넣은 그 남자가 앨버튼 공작의 날카로운 추궁에 대꾸했다. 마치 자신이 곁에 서 있는 책상 밑에 있는 그레이스를 숨겨 주려는 듯이.
그레이스는 파들파들 떨며 조심스럽게 눈을 떠, 자신을 숨겨 주는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바로 오늘 브라이덜 샤워 파티의 또 다른 주인공, 황태자 오웬이 서 있었다. 그는 정말로 길을 잃어버려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제 앞에 서 있는 앨버튼 공작을 바라보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