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39화
그레이스는 긴장감에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샐리를 향해 말했다.
“이제 가요, 샐리.”
“네, ……아, 참. 그 전에.”
“응?”
앞장서서 침실 밖을 나가려던 그레이스를 붙잡아 세운 것은 샐리였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돌려 굳은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샐리를 향해 왜 그러냐는 듯 되물었다.
“마님, 앞으로는 제게 말씀을 높이지 말아 주세요.”
“……샐리.”
“저 같은 아랫것에게도 말을 높이시는 것이 마님의 착하고 배려심 깊은 성품 때문이겠거니 했고, 또 마님께서 말씀을 고치는 것을 어려워하시기에 별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이 저택이나 다른 저택에서 샤프롱으로 따라온 시녀들은 마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비굴하다, 우습다 여길 겁니다.”
“……하지만, 지금껏 나는…….”
“아시겠죠?”
지금까지 그 어떤 시종이나 시녀에게도 하대한 적이 없었고 앨버튼 가의 시종들과 시녀들 또한 그레이스의 그런 화법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기에 샐리의 그런 제안은 그레이스를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다.
“지난번 저를 매섭게 추궁하셨을 때처럼 저를 하대하시면 된답니다. 보통 다른 황족들이나 귀족들에겐 그런 모습이 보통이에요. 그러니 어색하셔도 제게 말을 높이시면 안 돼요. 아시겠죠?”
그래서 그레이스가 머뭇거리자 샐리는 단호한 얼굴로 그녀의 확답을 요구했다.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그 기세에 결국 그레이스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아니……, 알겠어.”
“잘하셨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그레이스가 편히 하대하자 샐리는 그제야 웃으며 그레이스의 뒤를 따랐다.
존대하는 것보다 하대하는 것에 더 기뻐하다니, 샐리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그레이스는 괜히 자신의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하대해 보니 괜히 기분이 머쓱한 탓이었다. 그레이스는 그 머쓱하고 어색한 기분을 떨쳐 내려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자 샐리가 그레이스의 드레스 자락을 살짝 붙잡으며 말했다.
“조금만 천천히 가세요.”
“네? 아니, 응? 왜?”
“굳이 뭐 빨리 갈 필요 있으신가요? 마님께서는 펠릭스 공작 부인이신데.”
“그게 왜?”
“오늘 열리는 이 파티에서 마님보다 더 작위가 높으신 부인은 없으시잖아요? 자고로 높은 작위를 가진 귀부인일수록 파티장에 늦게 들어가는 법이랍니다.”
단호한 얼굴로 그레이스에게 충고하는 샐리의 모습에 그레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 뭐야. 그게.”
“뭐, 귀부인들의 사소한 신경전? 알력 다툼이라고 할까요.”
샐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고는 그러니 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더 도도하게 걸으시라고 충고를 덧붙였다.
그레이스는 어깨를 떨며 웃고는 샐리의 말대로 느릿느릿 걸었다. 그 모습이 스스로 느끼기에 꼭 거만한 오리 같았다. 그레이스는 연신 킥킥거리며 자신을 따르는 샐리를 향해 말했다.
“고마워, 샐리.”
“별말씀을요.”
조금 전까진 어떻게 하면 몰래 빠져나갈까 하는 일로 마음이 무거웠는데,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감사 인사를 천연덕스럽게 받는 샐리 때문에 또다시 가볍게 미소 지었다.
* * *
그레이스로서는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는 길을 지나 파티장 앞에 도착한 그레이스는 그 문 앞에서 남몰래 심호흡을 했다.
파티장 문 앞에 서자 잠시 후 자신이 벌일 일들로 인한 긴장감이 확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레이스의 뒤에 서 있던 샐리는 파티장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다소 거만한 어조로 말했다.
“펠릭스 공작 부인께서 도착하셨다 고해 주게.”
“알겠습니다.”
문지기는 샐리의 말에 얼른 닫혀 있던 문을 열며 소리쳤다.
“그레이스 펠릭스 공작 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그레이스가 열린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서 삼삼오오 몰려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확 그레이스에게로 쏟아졌다.
브라이덜 샤워 파티답게 파티장 안은 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로 가득했다.
그레이스는 파티장 중앙의 샹들리에에서 뿜어져 나오는 촛불과 그에 반사된 크리스털의 반사광이 무색하게 화려한 차림을 한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이런 차림의 그녀들 사이에 섞여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보면 와인과 흥에 취한 그녀들은 자신 하나쯤 빠진다 해도 전혀 알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일단 구석으로 가서 적당히 시간을 죽여야겠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은 파티장 내의 시선이 막 도착한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게다가 파티의 주인공인 언니 마리안느에게 축하 인사도 건네기 전이기도 했다. 딱히 축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공적인 자리이니 성의를 보임이 옳았다.
적당히 할 도리만 하고 빠지자. 그레이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샐리와 함께 걸어가던 그때였다.
“어머, 펠릭스 공작 부인 아니세요?”
“반가워요, 공작 부인. 성혼 파티 이후로 처음이죠?”
꽤 통통한 체격에 각각 연두색과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두 명의 귀부인이 그레이스에게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그레이스는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그녀들을 향해 예의 바르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모두 반가워요. 잘 지내셨죠?”
“저희는 잘 지냈죠! 그러는 공작 부인께선 잘 지내셨나요? 그날 공작 부인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저희가 어찌나 놀랐던지!”
“어휴, 저도요. 새로운 펠릭스 공작 부인을 또 그 흉측한 저주로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저희가 얼마나 놀랐던지! 설마 오늘도 또 그러시는 건 아니겠죠? 아, 하긴. 앨버튼 공작님과 마리안느 영애가 계시니 문제없겠죠?”
얼핏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그 말 아래 어떤 속내가 담겨 있는지, 그레이스는 모르지 않았다. 아마 꽤 멀쩡해 보이는 자신이 흥미롭고 신기하다는 감정과 ‘일단은’ 공작 부인인 제게 눈도장을 찍어 두겠다는 의미이리라.
그레이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는 그 귀부인들과 조금씩 자신을 향해 동그랗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난 괜찮답니다.”
“어머, 그것참 다행이네요.”
“네. 그러니 나보다는 저기 있는 ‘마리안느 영애’에게 집중해 주세요. 일단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저기 마리안느 영애니까요.”
그레이스는 일부러 강조하듯 마리안느의 이름을 언급하며 파티장 중앙의 단상에 앉은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레이스가 도착하고 줄곧 날카롭게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마리안느의 시선이 더욱 새파랗게 날이 섰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녀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내게 주목을 빼앗기는 게, 그리 못 견디게 싫은 건가.’
고작 이런 얄궂은 흥미만 담긴 시선조차도 자신에게 빼앗기는 건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건지,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빼앗아 간 그레이스를 마리안느는 서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못내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 후 여전히 자신을 매섭게 쏘아보는 마리안느를 향해 살짝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인사했다.
“황태자 전하와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리안느 영애. 드디어 그토록 소원하시던 황태자비 전하가 되시는군요.”
“……고맙구나, 그레이스.”
그 인사를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는 마리안느를 향해 더 뻔뻔히 미소 짓던 그레이스는 제 뒤에 선 샐리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샐리가 침실에서부터 챙겨 온 큰 벨벳 상자를 내밀었다. 그레이스는 그것을 건네 받아 상자를 연 후 마리안느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은 내가 마리안느 영애께 드리는 선물이랍니다.”
그 상자 안에 든 것은 금화 한 닢 정도 크기를 가진 수십 개의 페리도트가 박힌 목걸이였다.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연두색을 띤 그 보석들이 눈부시게 빛나자 마리안느의 눈에 희미한 탐욕과 동시에 강렬한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그레이스는 그런 언니 마리안느의 시선을 살피며 말했다.
“예로부터 페리도트는 부부애를 상징한다고 하지요. 그 보석이 가진 의미처럼 황태자 전하와 평생 지금처럼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부부처럼요.”
“……뭐?”
이어진 그레이스의 말에 마리안느의 표정이 갑자기 서슬 퍼렇게 날이 섰다.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는 그 모습에 그레이스 또한 똑같은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딱히 자신이 안 좋은 소리를 했던가, 대체 왜 이런 표정을 하는 걸까? 아, 혹시 아랫사람 대하듯 말해서 그런가?’
어쩐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뒤통수가 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레이스는 일단 모른 척했다.
지금 마리안느와 이렇게 소모적인 대화를 나눌 여유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자신을 뚫릴 듯 노려보는 마리안느와의 대화를 마무리하듯 인사했다.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 베풀어 주신 파티, 즐겁게 즐기다 가겠습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인사에도 별 대꾸 없이 노려보며 분한 듯 손을 떠는 마리안느를 내버려 두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속 시원한 듯한 표정을 짓는 샐리와 함께 파티장 구석으로 갔다.
이제 인사도 했겠다, 할 일을 마친 기분에 홀가분한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대로 황태자가 도착해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하고 사람들의 주의가 분산될 때까지 시간을 때울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레이스는 자신과 마리안느를 둘러싸고 입방아를 찧어 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럭스 백작부인, 조금 전 펠릭스 공작 부인이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요? 세상에. 지금처럼 서로 사랑하라며 행복하라니요.”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마리안느 영애를 탐탁지 않아 하는 걸 모르는 귀족이 있나요? 그런데 지금처럼 살라니, 그건 이대로 남편에게 외면 받으며 살라는 뜻이랑 진배없지 않겠어요?”
“펠릭스 공작 부인은 앨버튼 공작가에서 내놓은 자식처럼 자랐다더니 그 말이 맞나 봐요. 쯧쯧.”
“……그런데 나만 그랬나? 좀 속 시원하지 않던가요? 솔직히 그런 말 나올 만도 했잖아요. 봐요, 아무리 애정이 없다 해도 새신부의 브라이덜 샤워 파티인데 저렇게 신부만 홀로 두는 신랑이 어디 있나요?”
“하긴, 아카데미 일로 바빠서 늦게 오시는 거라 핑계를 대셨긴 하지만. ……아마 오고 싶지 않으셨을 수도 있겠죠.”
“여러모로 자매의 처지가 우습긴 하네요. 한 사람은 저주받은 공작 부인에, 한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는 황태자비라니.”
“쉿! 말씀을 삼가세요. 이러다 나중에 경을 치겠어요.”
그리고 그레이스와는 달리 그 말을 전부 듣고 있던 마리안느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하게 구겨지는 것도, 그레이스는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