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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38화 (38/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38화

또다시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음울한 녹색 빛이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다시 찾아온 꿈속, 그곳에서 길을 잃은 그레이스는 어둠만이 가득한 그곳을 헤매고 있었다.

‘……또 여긴가.’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둠 속을 헤집으며 걸었다.

또 무언가가 보이고, 들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꿈에서 깨어나고 말 것임을 알고 있기에 두려움은 전보다는 덜했다.

“――님께서는 괴물을 낳으신 겁니다. ―――해서는 살 수 없는 괴물을요.”

‘……!’ 그렇게 어둠 속을 헤매며 걷고 있던 그레이스의 귀에, 누군가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기만 해도 절로 소름이 돋을 것 같은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그레이스의 귀에 익었다. 누굴까, 누구였더라.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곧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그 목소리야! 성혼 축하 파티에서 들렸던 그 목소리!’

그리고 오늘, 마차 안에서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

그레이스는 놀란 듯 입가를 가리며 잠시 멈춰 섰다. 그 후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레이스의 머리를 울리듯 들려오는 섬뜩한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더 들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레이스가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님께서는 아무래도 오래 사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그만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녀에게 들려온 그 목소리는 바로 그녀의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대체 왜 지금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정말로 이번 일에 아버지는 개입한 걸까, 그렇다면 얼마나 개입한 것이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이미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내뱉었던 질문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레이스는 더욱더 소리가 들려오는 깊은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생명을 잇기 위해, 저기 저 미쳐 버린 펠릭스 공작 부인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 순간, 갑자기 주변이 확 밝아지더니, 그레이스의 몸이 단단한 무언가로 확 묶여 버렸다.

그레이스는 스스로 방어를 할 틈도 없이 단단히 온몸이 묶인 자신의 몸과 그 주위를 둘러싼 수십 명의 사람을 멍청히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확 바뀌어 버린 ‘꿈’의 풍경에 그레이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 뭐 하십니까. 심장을 단번에 찔러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반드시 단번에 저 심장을 찔러야만 합니다.”

“……!”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묶여 있는 자신을 보며 흉측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날카로운 칼을 쥔 한 남자가 머뭇거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점점 뒷걸음질 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죽이라 명한 그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너무나 익숙했다.

‘설마, 아닐 것이다. 설마, 또 그럴 리가.’

그레이스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그러자 그곳에는 무섭도록 차가운 표정을 한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앨버튼 공작이 서 있었다. 그레이스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절규했다.

‘대체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세요――! 그때, 수――. 커헉!’

그때, 수도원에서 한 번 내 목숨을 앗아 가신 걸로는 부족했어요? 왜 또 내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려 하시나요? 네?

그러나, 그런 그레이스의 절규는 얼마 가지 못했다.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는 것보다 더 빨리 다가온 칼을 든 남자가, 기어코 그녀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기 때문이었다.

‘윽――――!’

싫어,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나는 미치지 않았어. 미치지 않았단 말이야!?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앨버튼 공작 각하! 제발 그만하세요!

그레이스는 제 가슴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절규했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앨버튼 공작의 눈은 차갑고 무심했다.

마치 신을 위해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의 눈처럼.

* * *

―너는 죽어야만 한다.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이제 나에겐 살아서 곁을 지켜야 할 사람도 생겼단 말이야.’

―너는 저주를 받았지, 그래서 미쳐 버렸어.

‘나는 미치지 않았어, 저주받지도 않았어.’

나는……, 나는 멀쩡하다고.

“윽! 켁! 쿨럭, 쿨럭.”

“마님! 세상에, 마님!”

“싫어―――!”

들려오는 이명 같은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끊임없이 저항하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목소리가 탁 트이는 것을 느끼며, 그레이스는 스스로의 비명에 눈을 번쩍 떴다. 그레이스는 멍한 눈으로 숨을 헐떡이며 제 어깨를 꼭 붙잡고 있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떨쳐 냈다.

“손대지 마! 내 몸에서 손 떼란 말이야!”

“마, 마님! 마님! 저예요, 샐리!”

“……샐리?”

자신을 붙잡는 손을 뿌리치던 그때 들려온 샐리의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정쩡하게 자신의 몸 위에 붕 떠 있는 샐리의 손과 눈에 익은 자신의 낡은 침실을 돌아보았다.

이제야 선명히 들어오는 방의 풍경에 그레이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골랐다.

‘……아아, 꿈이었어. 또, 그 꿈.’

조금씩 천천히 진정되어가는 그녀의 곁에서 샐리는 연신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마치 경기를 일으킨 아이를 돌보듯 다정한 손놀림이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그레이스는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레이스는 식은땀으로 푹 젖은 자신의 이마를 소매로 닦아 내며 자신을 염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샐리를 향해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샐리.”

“정말이세요? 이렇게 식은땀이 많이 나는데…….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뇨. ……괜찮아요. 절대, 절대로 부르지 마요.”

의사를 부르겠다는 샐리의 말에 그레이스는 정색하며 거절했다.

이미 샐리의 말을 통해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저주’의 증상에 관해 조사하고 또 사례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자신의 ‘이런’ 모습을 이 저택의 의사에게 보이는 것은 위험했다.

샐리가 한층 더 근심 어린 얼굴로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파티에 참석하시려면 진찰을 받아 보시는 게…….”

“……아, 그랬었지.”

“그냥 오늘 파티는 참석하지 않으시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내일도 파티가 열리잖아요.”

그러니 오늘은 쉬시는 게 어떠냐며 샐리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가야겠어요. 미안하지만, 내가 단장하는 것 좀 도와줘요.”

순간 샐리의 다정한 제안에 솔깃했지만, 그래도 그레이스는 이번 파티에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든 파티에 참석한 척, 그곳에 녹아든 척 제 집안사람들을 속인 후 그들 몰래 빠져나와 서재로 향하는 것. 그것이 이유였다.

사실 참석을 거절하고 몰래 서재로 향하는 것이 어쩌면 더 빠른 방법이었겠지만, 그러면 반드시 앨버튼 공작이 자신에게 의사든 시종이든 제게 별도로 그의 감시자를 붙여 둘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절대 내색해서는 안 돼. ……이미 성혼 축하 파티 때 한 번 쓰러진 일로 아버지는 내게 저주가 깃들었다고 생각할 텐데.’

그 증상이 점점 심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간.

조금 전 보았던 그 꿈속에서처럼, 아버지 앨버튼 공작은 저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는 그런 확신이 그녀의 마음속에 깃들었다. 딱히 확신할 만한 증거가 없음에도 말이다.

그레이스는 마치 물에 푹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화장대로 걸어가며, 여전히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샐리를 향해 말했다.

“자요, 얼른 저 좀 도와주세요.”

“아, 네. 마님.”

샐리가 허둥거리며 그레이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조금 전 준비해 놓은 듯한 드레스와 보석을 그녀의 곁에 가져왔다.

그 후 분주히 자신을 단장하는 것을 돕는 샐리를 보며 그레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오늘 밤, 모든 일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말 것이라 다짐하며.

* * *

샐리의 도움을 받아 단장을 마친 그레이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머리는 밝은 실버 블론드색 머리카락을 높게 틀어 올린 후 라일락 모양의 다이아몬드 장식으로 마무리하고, 목에는 저택을 떠나기 전 아서가 주었던 목걸이를 걸쳐 더없이 화려한 장식과는 달리 드레스는 차분한 회색빛이었다.

샐리는 화장대에서 일어나 파티장으로 갈 준비를 하는 그레이스를 향해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그 색으로 입으셔야 해요, 마님? 화려한 장식이 더 돋보이게 연한 분홍색 드레스도 좋을 테고, 그것이 싫으시다면 짙은 사파이어색 드레스도 가져왔는데요.”

“아니에요. 이게 딱 좋아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샐리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예비 신부인 마리안느가 가장 돋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딱 이 정도의 색이 딱 좋았다.

그러자 샐리가 더욱 속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샐리는 그레이스가 자신을 미워하는 언니를 위해 배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속내는 달랐다.

‘그래야 몰래 파티장을 빠져나가도 모를 테니까.’

일부러 시녀들이 입을 법한 회색빛 드레스를 입은 것도 그래서였다.

장신구를 벗고 낡은 코트를 뒤집어쓰면 그 누구도 자신이 펠릭스 공작 부인인지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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