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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36화 (36/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36화

톰을 따라 그레이스는 익숙한 복도를 지나, 곧 익숙한 응접실의 문 앞에 섰다. 톰은 그레이스와 샐리를 잠시 멈춰 세운 후 은으로 된 문고리를 두 번 두들기며 말했다.

똑똑―.

“공작님, 펠릭스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시게.”

그러자 문 안에서 무뚝뚝하고 고압적인 앨버튼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톰은 얼른 문을 열고 제 뒤에 선 그레이스와 샐리에게 길을 터 주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고마워요.”

그레이스는 도도하게 살짝 고개를 까닥여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온통 크림색 비단과 연녹색 에메랄드로 호화롭게 꾸며진 응접실 안, 상아로 장식된 흰 가죽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앨버튼 공작과 공작 부인, 그리고 마리안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그레이스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나란히 소파에서 일어나 그레이스를 맞았다.

그레이스는 도무지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고압적이고 멸시 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먼저 짧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아버지. 그날 제 성혼 축하 파티 이후로 처음인가요?”

“오랜만이구나.”

“네. 아, 오랜만이에요, 어머니. 잘 지내셨나요? 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

“너도 안색이 참 좋아 보이는구나.”

“네, 펠릭스 성의 모든 분들이 제게 잘해 주셨거든요. 제게는 과분하다 싶을 만큼요.”

그레이스는 제 부모인 앨버튼 공작 부부와 의례적인 안부 인사를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 후 도로 자리에 앉는 그들을 따라 따로 떨어진 작은 소파에 앉은 그레이스는 앨버튼 공작 부부 곁에서 집요한 시선으로 자신의 목 부근을 바라보는 마리안느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언니. 황태자 전하와의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드디어 어릴 적 소원을 이루셨네요.”

“……그 목걸이, 어디서 난 거니?”

“아, 이거요?”

그레이스의 축하 인사에 마리안느는 대답 대신 조금 전부터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레이스의 목걸이를 언급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살짝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 후 마치 보란 듯 과시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레이스는 살짝 손가락으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어루만진 후 말했다.

“제 남편, 아서 펠릭스 공작님이 제게 주신 거예요. 대대로 펠릭스 공작 부인에게 내려오는 목걸이라고 하면서요.”

“그 냉혹한 성정의 괴물 공작이, 네게? 차라리 네가 몰래 펠릭스 공작의 재산을 빼돌려 샀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겠어.”

그러자 비꼬는 듯한 어조로 무례한 말을 쏟아 내는 마리안느의 모습에 불쾌해진 그레이스가 미간을 구겼다.

그렇게 두 자매 사이에서 날 선 시선이 오가던 그때, 그레이스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의 그레이스에겐 마리안느가 저렇게 제 신경을 긁는 이유가 뭔지 훤히 보였다. 아마도 마리안느는 잔뜩 겁에 질린 채 초라한 몰골로 올 자신을 예상했으리라. 그랬는데 자신의 차림이 멀쩡하다 못해 화려한 것이 어지간히도 기분이 나빴을 게 뻔했다. 그레이스는 그 속 좁은 태도가 참으로 우스웠다.

‘가족의 사랑도 앨버튼 가문의 상속녀라는 직위도, 황태자비라는 직위까지 전부 다 가졌으면서.’

그럼에도 자신이 가진 것을 탐내며 시기하는 것이 딱 어릴 적 그녀 몫의 큰 딸기 케이크를 다 먹고 제 몫의 맛없는 오트밀 쿠키마저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던 그녀의 모습과 같았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조금도 자라지 않았을까.’

그레이스는 속으로 비웃으며 조금 전 마리안느가 그랬듯 똑같이 비꼬는 어투로 자신을 시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마리안느에게 말했다.

“어머. 그렇게 질투하실 것 없어요, 언니. 설마 황태자 전하께서 ‘사랑하는’ 약혼녀에게 이보다 더 한 선물을 주시겠어요? 고작 이런 다이아몬드, 진주 수백 개 정도 박힌 목걸이보다 더 화려하고 귀한 것을 주시겠죠.”

“……당연한 거 아니니? 넌 고작 공작 부인이지만 나는 황태자비가 될 텐데. 당연히 더 좋은 것을 받아야지.”

“그렇죠. 정말 부럽네요.”

그레이스는 앞으로 자신이 받을 것들을 과시하는 듯한 마리안느를 향해 예의상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 감탄을 들은 마리안느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레이스는 더 이상 표정을 감출 생각도 없다는 듯 날것의 적의를 드러내는 언니 마리안느를 향해 더욱 뻔뻔히 미소 지었다.

“두 사람 다 그쯤 해 둬라.”

그런 날 선 두 사람의 신경전을 막아 세운 것은 앨버튼 공작이었다. 앨버튼 공작은 연신 그레이스를 날카롭게 노려보는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장차 이 제국의 황태자비가 될 것이고 나아가 황후가 될 사람이다. 아랫사람에겐 마음을 넓게 써야지.”

“……네, 아버지.”

그 말에 마리안느는 여전히 석연치 않다는 듯 얄밉게 입술을 삐죽거리다 팩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앨버튼 공작 부인이 다정히 마리안느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마음을 넓게 가지렴. 아무리 그레이스 저 아이가 화려한 차림을 하고 있어도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마리안느 너잖니.”

“……하.”

그레이스는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노골적으로 언니 마리안느의 편을 드는 그들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다른 사람들이 보면 꼭 자신은 그들의 자식이 아니라 남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새삼스럽게 그런 그들의 태도에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상하는 것은 별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불러다 놓고 노골적인 편애를 보여 줄 거라면 차라리 이런 인사치레도 하지 말지.’

정말이지, 더 이상 이 불편한 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이제 인사도 대충 했겠다, 이만 이 자리에서 빠져나와 쉬고 싶었다. 그레이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자리에서 일어난 자신을 돌아보는 제 가족들을 향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제 제 안부는 다 물으신 것 같은데, 이만 일어나도 되겠죠?”

“뭐? 오랜만에 본 건데, 조금 더 앉아 있다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지 그러니?”

“마차를 오래 타고 와서 그런지 피곤하네요. 죄송해요, 어머니. 좀 쉴게요. 제 거처는 예전 제가 쓰던 방인가요?”

“어? 그, 그래. 그렇단다.”

“알겠어요. 전 그럼 이만 물러가 쉴게요. 파티는 언제 열리죠?”

“오늘 저녁이란다. 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마.”

“알겠어요.”

자신을 붙잡으려는 듯한 앨버튼 공작 부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그레이스는 드레스 끝자락을 잡고 그들에게 예를 표했다.

그 후 그레이스는 곧장 등을 돌려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뒤를 쫓은 샐리가 제 주인을 위해 문고리를 잡고 열어 주려던 그때였다.

“펠릭스 공작이 널 아주 많이 아끼는 듯 보이더구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뭐죠?”

앨버튼 공작이 툭 던지듯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그 말이 어쩐지 아주 의미심장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제 착각일까. 어쩐지 그 말이 영 좋지 않게 들려, 그레이스는 조금 불손하다 싶을 만큼 날카로운 어조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불쾌하다는 듯 잠시 인상을 찌푸린 앨버튼 공작은 곧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그녀에게 말했다.

“그 마음 변치 않게 아내로서, 여자로서 열심히 노력해라.”

그리고 이어진 말에 그레이스는 아주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인즉 네 주제에 맞지 않는 분에 넘치는 행복을 지키기 위해 아양이나 잘 떨라는 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아버지란 사람은 그녀의 속을 뒤집었다.

그레이스는 속으로 조용히 끓어오르는 화를 삼키며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앨버튼 공작을 똑바로 쏘아 보여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그분은 제가 노력하지 않아도, 절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거든요. 어느 가문의 누구들과는 다르게 말이죠.”

“……!”

“그러니 그런 당부는 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럼 전 이제 정말로 쉬러 갈게요. 피곤하네요.”

그 말을 끝으로 그레이스는 홱 소리 나게 고개를 돌려 열린 문밖을 나갔다.

뒤에서 싸늘한 시선들이 날아와 꽂혔지만 지금의 그레이스에겐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문밖에서 자신을 놀란 눈으로 응시하는 시종장 톰에게 일부러 한 번 입꼬리를 올려 보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왔다.

그러자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던 샐리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굳은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정말로요?”

“괜찮다니까요. 난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오히려 저 사람들이 내게 다정하게 굴었으면 그건 그것대로 더 꺼림칙했을 거예요.”

그레이스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샐리를 향해 일부러 활짝 웃어 보였다.

말 그대로였다. 이전의 자신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자신은 새삼 저런 그들의 태도에 기분이 상할 뿐, 진심으로 상처받지 않았다.

싸구려 생일 케이크에 감격하며 기뻐하던, 가족의 애정에 굶주렸던 그날의 자신은 첫 번째 죽음으로 이미 사라졌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얼른 거처로 돌아가 시간이나 죽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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