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35화
아직 어린아이인 그레이스는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서인지 비명을 지를 겨를조차도 없었다.
그레이스는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한 채 몸을 웅크리고는 멍한 눈으로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한 사람이 그레이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라기엔 체격이 너무 왜소했고, 여자라기엔 손이 크고 거친 그 사람은 방문 앞에 주저앉아 자신을 멍한 눈으로 응시하는 그레이스를 향해 킥킥거리며 말했다.
“……이런, 이런. 누군가 했더니만. ‘그 하자품’이로군.”
“……!”
“아가야, 길을 잃었니?”
“…….”
“이곳에서 뭘 보거나 뒤진 것은 아니겠지?”
그자는 마치 뱀이 쉭쉭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그레이스의 앞에 서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레이스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은근히 고압적인 태도에 비춰볼 때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 대답에 그자는 또다시 기분 나쁘게 킥킥거리더니 말했다.
“킥킥킥, 다행히 눈치는 아주 빠르구나. ……그래, 눈치 빠른 아이는 싫어하지 않아.”
“…….”
“눈치 빠른 아이에게 답례로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할까.”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그 크고 거친 손을 그레이스의 머리로 뻗었다. 그레이스는 그 모습이 못내 두려워 뒤로 기어갔지만, 그 큰 손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기어코 벽에 달라붙은 그레이스를 쫓아가 사마귀 같은 깡마르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작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
그러자 마치 번개가 내리친 것과 같은 녹색의 섬광이 보이더니 점점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왜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인지, 그리고 조금 전 눈앞의 사람이 어떤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더니 점점 눈꺼풀을 뜨기 어려울 만큼 지독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무거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 곧 툭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점점 의식이 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 푹 잠들렴. 조금 전 네가 본 것은 모두 잊고.”
그 기괴한 말소리를 끝으로 의식은 끊어졌다.
이후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레이스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 * *
덜컹.
거친 돌길을 달리는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허억!”
그 순간, 마차 안에서 불편하게 잠을 청하고 있던 그레이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레이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또 그 수상한 꿈을 꾸었다.
대체 누가 어떤 목적에서 자꾸 보여 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기묘한 꿈, 혹은 저주. 마치 편안하게 잠겨 있던 머릿속 기억을 누가 손으로 헤집어 놓은 것처럼 그레이스는 혼란스러워했다.
‘……그 서책으로 가득했던 방,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나왔던 남자.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인데.’
그런데 그 꿈속에서 본 모든 것들이 마치 현실처럼 생생한 것은 왜일까.
꿈속에서 그 수상한 자가 자신의 머리를 틀어쥐었을 때의 감촉, 그리고 그자가 다가올 때 느껴졌던 케케묵은 먼지 냄새와 기묘한 약초 냄새까지 전부 다.
마치 자신이 정말로 ‘잊고 있었다’가 ‘다시 기억난 것’처럼 그 꿈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정말로 조금 전 꿈속에서 보았던 일들이 진짜 나에게 일어난 일인 걸까?’
그렇다면 그자는 왜 자신을 잊게 만든 걸까. 그곳에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될 중요한 정보라도 있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그자는 누구고,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이 모든 것들이 기억난 걸까.
……아니, 애초에 이것이 진짜 ‘잊힌 기억’은 맞긴 한 걸까. 어쩌면 자신은 단순한 악몽을 현실인 것처럼 착각해 과대해석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레이스는 또다시 엉키는 생각들에 머리가 아파 왔다. 아무래도 자신은 아직도 꿈의 여운 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마차가 많이 덜컹거리죠?”
그때 마차를 모는 마부가 밖에서 그레이스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그 순간, 그레이스는 드디어 완전히 꿈의 여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때마침 말을 걸어 준 마부에게 내심 고마워하며 잔뜩 엉킨 복잡한 생각들을 머릿속 한편으로 미뤄 두었다. 그래, 고민한다고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다. ……또한.
‘어차피 곧 내 눈으로 모두 확인할 테니까.’
그레이스는 속으로 결의를 다진 후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으며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요.”
“이제 곧 앨버튼 저택에 도착하니, 죄송하지만 불편하셔도 조금만 더 견뎌 주십쇼. 이랴!”
그러자 마부의 활기찬 대답과 함께 마차는 더욱 빨리 달려 나갔다.
그레이스는 덜컹거리는 마차의 안장에 등을 기대며 살짝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부의 말처럼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앨버튼 영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 풍경들을 향수에 젖어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마차는 영주인 앨버튼 공작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자 문이 열리고 평소보다 갖춰 입은 샐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난 성혼 축하 파티에서처럼 이번에도 그레이스의 샤프롱 자격으로 그녀를 따라온 샐리는 가장 먼저 그레이스의 흐트러진 머리를 살폈다.
그 후 살짝 풀린 드레스의 리본을 고쳐 매 준 샐리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의 그레이스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멀미를 하셨나요? 안색이 영 좋지 않으신데 약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잠깐 졸다가 악몽을 꿔서 그런가 봐요.”
“언제든 몸이 좋지 않으시면 말씀하세요?”
“응. 고마워요.”
“그럼 준비를 마치셨다 알리고 올게요.”
그레이스의 괜찮다는 대답에 샐리는 군말 없이 물러났다.
그레이스는 마차 밖으로 나가는 샐리의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곧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또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가족들을 만나, 무시와 조롱으로 일관하는 그들과 신경전을 벌이기 전 일종의 마음의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레이스가 가볍게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밖에서 누군가가 그레이스가 타고 있는 마차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레이스는 작게 목을 울린 후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그러자 마차의 문이 열리고, 앨버튼 저택의 집사장 톰이 마차 안에 탄 그레이스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레이스 아가씨. 그 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랜만이에요, 톰.”
자신을 보는 것이 반갑다는 듯한 그의 인사에도 그레이스는 무심히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톰은 익숙하게 그녀를 정중히 에스코트했다. 그레이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 보는 그의 정중한 에스코트가 낯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차에서 내린 후 그레이스는 제 곁에 샐리가 다가와 선 것을 확인하고서 톰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 계시죠?”
“앨버튼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는 응접실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리안느 아가씨 또한 그곳에 계시고요.”
그녀의 물음에 집사장 톰은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샐리의 표정은 단번에 일그러졌다.
아무리 가족이지만 엄연히 초대를 받아 온 손님이고 그들은 초대한 주인인데 마중도 나오지 않은 그들의 태도가 불쾌했다.
다른 귀족이었다면 당장 날 선 소리가 오갈 만한 상황이건만, 그레이스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응접실까지 안내를 부탁드릴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그레이스는 마치 ‘처음 와 본 사람처럼’ 태연하게 응접실로의 안내를 부탁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톰은 흠칫 어깨를 떨긴 했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후 그레이스는 안내를 위해 자신의 앞에 서서 걸어가는 톰을 향해 말했다.
“아, 참. 그리고 톰.”
“……네?”
“난 이제 그레이스 아가씨가 아니고 펠릭스 공작 부인이에요.”
“……!”
“한미한 지방 귀족 가문도 아니고 대대로 대마법사를 배출한 앨버튼 공작 가문의 집사장이신데, 작위와 호칭은 제대로 불러줘야 하지 않겠어요.”
“……소, 송구합니다, 펠릭스 공작 부인.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번만 특별히 사과를 받아 주겠어요.”
당황한 듯 허둥거리는 톰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그레이스는 거만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그녀에겐 톰의 머릿속이 훤히 읽혔다. 아마 응접실까지 안내해 달라 말하지 않았다면 이미 그녀가 저택 구조를 잘 알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그는 뒤로 빠졌을 게 뻔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귀부인이면서 에스코트도 없이 시녀와 걸어온 자신의 모습을 보고 또다시 날선 소리를 내뱉었을 게 뻔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또다시 자신의 기를 꺾어 놓을 심산이었으리라.
‘누가 그 속을 모를 줄 알고.’
그레이스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얄팍한 기만에 넘어가 주지 않을 참이었다.
그레이스는 조금 굳은 얼굴로 자신을 안내하는 톰의 뒷모습을 흘긋 바라보다 곧 제 곁에 서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샐리와 시선을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