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34화
그 모습에 아서는 결국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아, 참.”
“네?”
“잠시만…….”
그러더니 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갑자기 그레이스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야말로 고개를 살짝 돌리면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는 아서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심장이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깜짝 놀랐다.
‘아,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데! 처, 첫 입맞춤을 이런 식으로!’
그레이스는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서의 따뜻한 체온은 그레이스의 얼굴을 지나쳐 그녀의 목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그녀의 목 뒤에서 무언가 채우는 듯했다.
잠시 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목 위로 어떤 물체가 묵직하게 닿은 느낌에 그레이스는 슬며시 실눈을 떠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그러자 그레이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힌 화려한 목걸이였다.
족히 수백 개는 넘어 보이는 작은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화려한 그물 모양을 이루며 내려오는 목걸이는 보석의 가치를 잘 모르는 그레이스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레이스는 홀린 듯 그 목걸이를 만져 보다 곧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아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대체 뭐예요?”
“대대로 펠릭스 공작 부인에게 내려오는 목걸이입니다.”
“……이걸 왜…….”
“그야 펠릭스 공작 부인이니까요. 그리고…….”
“네?”
“기왕이면 그곳에 모이는 다른 영애들과 부인들에게, 부인께서 내 단 하나뿐인 ‘공작 부인’이라는 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그것을 하고 가시면 좋을 것 같아 드리는 겁니다.”
“……아.”
“싫으십니까?”
쑥스러운 듯 웃더니 곧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묻는 아서에게 그레이스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잃어버릴까 걱정이 될 뿐이지, 절대로 싫은 건 아니에요.”
그렇게 대답하며 그레이스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비단 자신이 이렇게 비싼 선물을 받았다는 것보다 그가 자신을 ‘부인’으로서 자랑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더 기뻤다.
‘……아. 가기 싫다.’
그레이스는 다정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서의 곁으로 다가가 그 몸에 푹 파묻히듯 안겼다.
아서는 기다렸다는 듯 다정히 그녀를 안아 주며 말했다.
“잊지 않으셨죠. 이틀입니다. 나는 이틀만 기다릴 겁니다.”
“네.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요.”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신신당부하는 아서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나도! 안을 거예요!”
그러자 꼭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질투가 난 것인지 줄곧 곁에 서 있던 레온이 그레이스의 다리를 꼭 안으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까르르 웃으며 손을 뻗어 레온의 긴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아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말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자, 결국 마부가 은근슬쩍 그레이스를 향해 재촉하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시각이었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후 제 앞에 선 아서와 레온을 향해 다정히 웃으며 인사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서, 레온.”
“다녀오세요, 형수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부인.”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레이스는 황급히 몸을 돌려 마차로 걸어갔다.
마음 같아선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더욱 미련이 남아 영영 마차에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제 등 뒤로 와 닿는 아서와 레온의 시선을 모른 척하려 애쓰며 마부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그레이스가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 마부는 얼른 조종석으로 올라가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이랴!”
그렇게 마차가 빠르게 펠릭스 성을 떠나 멀어졌다.
그레이스는 뒤에 선 아서와 레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 후, 마차가 완전히 펠릭스 성을 떠난 후에야 창문을 닫았다.
커튼까지 완전히 내린 그레이스는 안정적으로 흔들리는 마차의 안장에 머리를 기댔다.
앞으로 한나절은 족히 달리게 될 마차 안에서 아서와 레온도 없이 홀로 지루한 시간을 죽일 방법이라고는 자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레이스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행스럽게도 금세 잠이 찾아왔다.
* * *
열어 놓은 창을 넘어 따뜻한 햇살이 한 줄기 쏟아졌다.
작은 침대와 낡은 화장대, 그리고 오래된 옷장이 전부인 넓은 침실 안에는 작은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낡은 청록색 드레스와 흰 리본을 맨 그 아이는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아이의 유모 겸 가정교사인 에스메랄다 부인이 곁에서 그 작은 아이를 달랬지만 아이의 기분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스메랄다 부인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기분을 풀 것 같지 않은 아이의 모습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어휴.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레이스 양, 기분이 풀리면 그때 다시 수업을 시작하죠.”
“…….”
그렇게 토라진 어린 그레이스를 두고 매정히 돌아서는 에스메랄다 부인의 뒷모습에선 은은한 짜증이 느껴졌다.
닫혀 버린 침실 문을 흘겨보던 그레이스는 작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조그만 손으로 젖어 드는 눈가를 가렸다.
조금만 더 에스메랄다 부인이 제 속상한 기분을 이해해 주고 어리광을 받아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언제나 사무적인 그녀는 이번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홀로 훌쩍이며 울적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도 마법 수업에 따라가고 싶어.”
자신도 마법을 배워 보고 싶은데, 마법진도 그려 보고 자연 원소도 소환해 보고 싶은데.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아버지 앨버튼 공작은 언니인 마리안느만 데리고 가 버렸다. 그럴 때면 마리안느는 한 번 깔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고는 곧 의기양양한 몸짓으로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 뒤에서 홀로 남은 그레이스는 또다시 앨버튼 공작으로부터 냉정하게 외면당한 자신의 처지를 속상해하며 오늘처럼 에스메랄다 부인에게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렸다.
언제나 그랬듯 에스메랄다 부인은 몇 번 형식적으로 달래다 그녀를 놓고 나가 버렸고 말이었다.
그렇게 홀로 빈방에서 작게 훌쩍이던 그레이스는 어느 정도 감정이 진정되자 작은 손으로 얼굴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혼자 울다 보니 어린 마음속에서 문득 울컥 억울한 기분이 치솟은 탓이었다.
아직 마법 능력이 정확히 뭔지, 그 능력이 노력이나 의욕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임을 모르는 작은 아이는 그저 자신에게 시켜 보지도 않고 못 한다 단정하며 차별하는 아버지 앨버튼 공작에게 오기가 치밀었다.
‘나도 가르쳐 주면 언니처럼 할 수 있어!’
오늘만큼은 그냥 방에서 울고 있기 싫었다.
이제 겨우 다섯 살. 언니와의 차별로 매사 주눅이 들어 있긴 했어도 타고난 성정이 씩씩하고 오기가 넘치는 어린 그레이스는 오늘 일을 치기로 결심했다.
언니 마리안느와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마법 수업을 하는 본채의 서재에 무작정 들이닥치기로 말이었다.
아무리 울며 떼를 쓰고, 마법 수업이 이루어지는 서재 앞까지 쫓아가도 매정하게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오늘은 그냥 물러나지 않으리라. 오늘만은 꼭 언니처럼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기 전까지 버티며 떼를 쓸 작정이었다.
‘가자!’
그레이스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연 그레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침실 앞 복도에는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레이스는 기억을 더듬어 늘 언니와 아버지가 자신만 두고 가 버렸던 그 길을 따라갔다.
“어머, 그레이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응? 잠깐 화원에요!”
지날 때마다 자신을 알아보는 시녀들에게 대충 거짓말로 둘러댄 그레이스는 기어코 앨버튼 저택의 본 채 앞까지 걸어왔다.
그레이스는 종종걸음으로 본 채 안으로 들어가 1층 복도로 숨어들었다.
‘……어?’
그런데 거기까지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1층 복도에서 보이는 똑같이 생긴 수많은 문에 어린 그레이스는 당황했다.
이 수많은 문 중 앨버튼 공작의 서재로 통하는 문은 대체 어딜까. 그레이스는 작은 머리를 기울이며 골똘히 생각했다.
‘문을 다 열어 볼까? 아니면 개중 기억 속 서재와 가장 비슷한 문을 열어 볼까?’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곧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저걸 열어 보자!’
그나마 가장 비슷한 문을 먼저 열어 보고, 그 후에 하나씩 하나씩 다 열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레이스는 1층 복도의 가장 안쪽에 있는 문 앞으로 걸어가 까치발을 들고 문고리를 비틀어 열었다.
“……아버지?”
사방이 책으로 가득 꽂힌 책장으로 막혀 있고 환기를 위해 터놓은 작은 창마저도 빛에 약한 책들을 보호하기 위해 검은 커튼으로 가려 놓은 그 방은 분명 기억 속 서재 같았지만, 그곳에는 아버지도 언니도 없었다.
‘방을 잘못 찾았나 봐.’
그레이스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방 밖으로 나오기 위해 몸을 틀었다.
툭―.
그런데 그때 빼곡히 책이 꽂힌 책장 너머에서 누군가가 벽면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마치 짐승이 먹이를 향해 입을 벌리듯 스르르 옆으로 벌어지는 책장 너머로 아득한 어둠을 품은 한 공간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