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33화
5. 비밀의 방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음산한 붉은빛으로 물든 밤.
거대한 저택을 둘러싼 유령나무의 가지 위, 어둠을 틈타 활동을 시작한 올빼미들이 샛노란 눈을 빛내며 이리저리 저택 주변을 살폈다.
그들은 삿된 마음을 먹고 저택을 찾은 그 어떤 이라도 날카로운 부리로 모두 쪼아 버릴 것처럼 험악한 기세로 마른 유령나무들의 가지 위를 날아다녔다.
그중 가장 크고 밝은 눈을 빛내던 올빼미 한 마리가 푸드덕 큰 날개를 퍼덕이며 저택의 한 창가 앞으로 날아갔다.
그 창가 너머의 방에서는 다른 방들과는 달리 빛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검고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올빼미는 마치 주변을 살피듯 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크고 날카로운 부리로 창가를 쪼아 대기 시작했다.
톡, 톡.
마치 돌이 날아와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몇 번이나 났을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 로브로 몸을 가린 누군가가 창가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는 거칠게 창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이런, 그레고리. 너였구나. 이 시끄러운 녀석.”
그는 듣기 싫은 쇳소리로 창가에 앉은 올빼미를 반기며 커튼을 걷고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올빼미는 크고 동그란 눈을 굴리며 큰 날개를 펴고 방 안의 횃대로 날아가 앉았다.
그는 그 모습을 확인한 후 재빨리 창을 닫고 다시 검은 커튼을 쳤다. 그러자 창가로 새어 들어오던 달빛이 사라진 방은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 위 수정구슬이 내뿜는 기묘한 녹색 불빛으로 가득 찼다.
그는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횃대 위에 앉은 올빼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레고리, 네가 보고 듣고 온 것들을 내게 말하렴.”
그러자 올빼미가 낮게 목을 울리더니 마치 바람이 거세게 부는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더니 곧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그러더니 그는 쿵쾅거리며 한 면이 다 책장인 벽으로 걸어가더니 한 층에 있는 책들을 아무렇게나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법처럼 책들이 둥둥 뜨더니 저절로 펼쳐지며 날아왔다. 그는 펼쳐진 책들을 일일이 앙상한 손으로 붙잡아 확인하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대체 왜지? 왜 저주의 진행이 느려지는 거야! 빌어먹을, 역시 그때 ‘축복’의 주문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 컸어! 젠장! ……역시 아무 능력도 타고나지 못한 하자품이라 해도 위대하신 선조의 피는 흐르는 모양이지? 다른 계집들과는 달리 숨겨진 마법의 힘을 알아챌 줄이야.”
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허공에 둥둥 뜬 책을 거칠게 쳐 냈다.
그러자 책들이 힘없이 날아가 방 안을 가득 채운 양피지 조각들 위로 떨어지며 종이가 흩어졌다. 그는 엉망이 된 방을 빙빙 돌며 연신 무어라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해야 해.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단 말이야. 빌어먹을! 멍청한 황제 놈. 그 누구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길 원하는 주제에 그때 훼방을 놓을 건 또 뭐람! ……아냐, 그때 만일 황제가 그 괴물 놈의 편을 들지 않았다면 그 괴물 놈이 또다시 의심을 품고 무슨 짓을 저지르려 했을 거야. 그래선 안 되지. 그렇긴 하지. 아! 하지만 시간이 없단 말이야! 빌어먹을! 대체 일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그가 혼자 납득했다가 또 짜증을 반복하던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그가 홀로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그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누구야!”
“저예요.”
그러자 방 밖에서 높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문밖에 서 있던 여자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늦은 밤임에도 화려한 차림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여자는 사뿐사뿐 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여자가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후 다시 한번 허공에 손을 휘둘러 굳게 문을 닫았다.
그 후, 여자를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
“이 늦은 시간에 뭐지? 또 그 ‘약’이라도 받으러 온 건가?”
“하! 그 효과도 없는 약은 또 받아서 뭣하게요? 그건 아니니 안심하세요.”
“그 약이 효과가 없었던 것이 아니야. 네가 그 약에 걸린 마법이 성립될 조건을 맞추지 못한 거지! ……어쨌든, 이 늦은 시간에 날 찾은 용건이 뭐야?”
그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여자는 그의 태도가 불쾌하다는 듯 서늘한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러더니 슬쩍 비꼬는 듯한 어조로 그를 향해 말했다.
“오늘만큼은 날 귀찮은 보부상 대하듯 하면 안 될 텐데요.”
“그게 무슨 소리지?”
“바라시던 소식을 가져왔어요. 그레이스, 그 계집이 초대장에 응했다는군요. 겁이 없는 건지 멍청한 건지, 그 괴물 남편까지 떼 놓고요.”
“그게 정말이야?”
여자의 말에 그는 반색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여자가 신경질적인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네. 바로 조금 전에 답신이 도착했더군요.”
“그래? ……좋아.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이군.”
그는 여자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앙상한 두 손을 마주 비비며 낮게 킥킥거렸다.
그 모습에 여자는 징그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날 선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저주를 완벽히 그 계집의 몸에 심어 놓아야 해요. 알죠? 더 이상 시간이 없는 거.”
“나도 아니까 재촉하지 마! 빌어먹을. ……어쨌든 됐어. 이제 됐어.”
여자의 재촉에 그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는 또다시 혼자 중얼거리며 방 한편에 놓인 횃대 위에 앉아 있는 올빼미 그레고리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올빼미가 목을 울리며 반응했고, 그는 앙상한 손가락으로 올빼미의 뺨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이젠 그 ‘방’에 제물을 무사히 몰아넣기만 하면 돼.”
자신이 쳐 놓은 마법으로 가득한 방 안에 들어간 제물이 잠들기만 하면…….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이 쳐 놓은 덫에 걸려 들 그녀를 상상하며 음산한 웃음을 터트렸다.
* * *
한편, 시간은 잘만 흘러 그레이스가 앨버튼 저택으로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지난번 성혼 축하 파티에 참석할 때와는 달리 시종들과 시녀들이 들고 나르는 행장은 가벼웠다. 이번에는 그레이스 혼자만의 외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샐리의 도움을 받아 단장을 마치고 별채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서와 레온이 그녀를 맞았다.
“형수님!”
“레온!”
그레이스는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레온을 번쩍 안아 들며 제 곁으로 다가오는 아서에게 눈인사를 했다.
아서는 그런 그녀에게 다정히 웃어 주며 팔을 벌렸다. 레온을 이리 달라는 뜻 같았다. 그레이스는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금 더 안고 있을게요.”
“팔이 아플 텐데요.”
“괜찮아요.”
“형수님이랑 좀 더 안고 있을 거예요!”
결국 아내와 동생의 고집에 아서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그레이스는 레온을 품에 안은 채 아서와 함께 마차가 서 있는 펠릭스 저택의 정문 앞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아서는 오늘따라 그레이스에게 더욱 어리광을 부리며 안겨 있는 레온을 흘긋 보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레온이 떨어지기 싫은가 봅니다.”
“그러게요.”
“얼른 내려와서 걸어야지. 네가 아기도 아닌데.”
그레이스는 아서의 말을 못 들은 척 고개를 홱 돌리는 레온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아이의 작은 몸을 고쳐 안았다.
그 모습에 아서는 쓴웃음을 짓더니 그레이스와 어깨가 맞닿을 만큼 가까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부럽기도 하군요. 저리 솔직하게 떼를 쓸 수 있는 것이.”
“……공작님.”
“부인과 떨어지기 싫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어른이어서, 또 공작이어서, 체면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참 개탄스럽습니다.”
그 말에 그레이스의 양 볼이 순식간에 확 하고 붉게 타올랐다.
그레이스는 괜히 어색하게 입바람을 불며 시선을 피했고 아서는 그런 제 아내의 모습을 다정하고 애달픈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레이스는 제 볼을 따갑게 하는 그 시선에 민망해하며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 고작 며칠만 있다 돌아올 건데 뭘 그래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아는데……. 어쩐지 느낌이 좋지 못해서 그럽니다.”
“……뭐, 별일 있겠어요? 하하.”
아서의 걱정 어린 말에 그레이스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마치 자신의 마음에 남은 찜찜한 구석을 털어 내려는 듯.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별말 없이 걸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걷자, 그레이스가 타고 갈 마차가 선 공터의 앞에 도착했다.
그레이스는 줄곧 품에 안고 있던 레온을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놓은 후 잔뜩 울상을 한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온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럼 레온, 나 다녀올게. 그동안 공작님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해?”
“이번에는 몇 밤이나 자고 오세요?”
“음. ……아마도 이틀 밤?”
“정말로 이틀 밤만 자고 오셔야 해요?”
“응. 약속.”
그래도 지난번과는 달리 레온은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더 이상 떼를 쓰지 않았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아이가 내민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그 후 그레이스는 몸을 일으키며 이번에는 레온의 곁에 선 아서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이틀 뒤에 데리러 가겠습니다.”
“네. 꼭 그래 주세요.”
“그보다 더 빨리 돌아오시면 더 기쁠 겁니다.”
“하하, 네. 최대한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해 볼게요.”
아서의 조금은 팔불출 같은 말에 그레이스는 소리 내 웃고는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