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32화
“……왜 그러십니까?”
그런데 그때, 아서가 그런 그레이스를 살피며 조심스레 떨리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물어 왔다.
그 순간 그레이스는 서신에서 시선을 떼고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서를 마주 응시하며 대답했다.
“네? 뭐가요?”
“지금 손이 떨리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추운 겁니까?”
“……아, 아뇨. 춥지 않아요. 난 괜찮아요.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랬나 봐요.”
그레이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일부러 서신을 쥔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아서는 걱정스럽다는 듯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러던 중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서는 안타깝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뗐다.
“……부인.”
“네?”
“혹시 그 파티에 가고 싶지 않은 겁니까? 그런 거라면 내가 얼마든지 적당한 핑계를 대고 거절하겠습니다.”
“……예? 아뇨. 난 괜찮은데…….”
“듣기로 앨버튼 공작은 부인께서 나와의 결혼을 준비할 때 ‘시일이 촉박하다’는 핑계를 들며 제대로 된 예물도, 새 웨딩드레스를 맞추는 것도, 지금처럼 브라이덜 샤워를 여는 것도 다 생략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집안과 가족이 자신을 차별하고 멸시할 때의 그 기분은 감히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괴로움이었겠지요. 그런 사람들과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고, 눈앞에서 부인 때와는 달리 진심으로 축복받는 마리안느 영애의 모습을 볼 부인을 생각하니 내 가슴이 아픕니다.”
“……공작님.”
“……미안합니다. 만약 부인께서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황족이나 귀족과 결혼했더라면 부인께서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필 나 같은 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부인께서 그런 취급을 받았다 생각하니 미안하고, 또 그런 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서는 쓰게 웃었다.
그레이스는 그런 아서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찡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자신은 그런 가문의 푸대접이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푸대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법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자신에게는 그런 대접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런 자신더러 가슴이 아프다고, 더 귀한 대접을 받았어야 한다고 말해 주는 아서가 그레이스는 더없이 고마웠다.
그레이스는 괜히 울컥하는 기분을 감추듯 밝게 웃으며 아서를 향해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내 처지로는 그 누구와 결혼했다고 해도 언니와 같은 대접을 받진 못했을 테니까요. 아마 아버지의 기준으로 한참 ‘격 떨어지는’ 상대를 찾아서 내게 붙여 줬을 게 뻔해요.”
“……부인.”
“괜찮아요, 난. 그런 처지에 익숙해요. 그리고 언니가 받게 될 그런 것들에 대해선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정말입니까?”
“네. 정말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그런 것들을 받는 대신, 날 이리 아껴 주는 공작님을 남편으로 맞게 되었다 생각하면 하나도 아쉽지 않으니까요.”
“……그,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야……. 다행입니다.”
그 대답에 아서는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돌린 아서의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늘 무뚝뚝한 그가 사실은 누구보다 애정 많고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자신만 안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면서, 어떤 날은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이런 사람을 더러 ‘저주받은 괴물 공작’이라 손가락질하며 밀어내다니, 사람들은 뭘 몰라도 한참을 몰랐다.
역시 이 사람에게 씌워진 오명을 벗겨 줘야겠다. 설령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신을 반듯이 접어 올리버 경에게 내밀고는 말했다.
“올리버 경, 이 서신에 대한 답신을 꼭 제가 써야 할 필요는 없겠죠?”
“물론입니다. 부인의 뜻을 제게 알려 주신다면, 제가 답신을 써서 전해 주겠습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답신 부탁드릴게요.”
“어떻게 쓰면 될까요?”
올리버 경의 물음에 그레이스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길게 쓸 것 없이 ‘하나뿐인 언니를 축복하기 위해 기꺼이 참석하겠다’고만 써서 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샐리, 그날 입을 드레스 준비와 짐을 챙기는 것 좀 부탁할게요.”
“예, 알겠습니다.”
그 모습에 올리버 경은 한쪽 무릎을 꿇었고 샐리는 살짝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그레이스는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움직이는 샐리와 올리버 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또다시 둘만 남은 긴 복도에는 조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서가 연신 그레이스의 얼굴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가야겠습니까.”
“네. 가고 싶어요.”
“내가 같이 가 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 초대장에 부인의 이름만 있어서…….”
“원래 새 신부를 축하하기 위한 파티에는 신랑 될 사람을 제외하곤 여성들만이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잖아요.”
짧게 욕설을 내뱉으며 혀를 차는 아서를 그레이스는 웃으며 다정히 토닥였다.
그러나 아서는 여전히 마땅찮은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했다. 그레이스는 지금 아서가 어떤 심정일지 이해가 되었다.
이제 겨우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나름대로 평온한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자신과 떨어져 적대적인 앨버튼 공작가의 초대를 받아 그곳으로 가겠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만 했다.
아서와 레온에게 씐 저주를 완전히 벗겨 내고 완전한 평온함을 찾을 실마리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레이스는 다정히 손을 뻗어 아서의 가면 쓴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사실은 나도 딱히 가고 싶진 않아요.”
“그런데 왜 가겠다는 겁니까?”
아서가 답답한 듯 되묻자 그레이스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확인한 후,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금 전 내가 본 환상에 대해 샐리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죠?”
“네.”
“그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금껏 펠릭스 가문이 이상한 일이 생길 때마다 아버지가 제자들을 이끌고 펠릭스 저택으로 와 그 일들에 관해 조사를 했다고 들었어요.”
그 말에 아서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부인께서는 그 ‘저주’에 앨버튼 공작이 개입했다고 보시는 겁니까.”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뭔가 알고 있는 건 확실해요. 공작님의 부모님, 그러니까 제 시부모님에 관한 일과 공작님의 전 부인과 약혼자들에게 수상한 일이 생기거나 ‘저주’가 내릴 때마다 아버지가 무언가 기록했다고 들었거든요. ……분명 그 기록이 앨버튼 저택 안에 있어요.”
“그래서 그것들을 부인께서 찾겠다는 겁니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요?”
“아뇨. 전 알아요. 한 군데 짐작 가는 곳이 있거든요.”
굳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서는 그 목소리에도 전혀 안심되지 않는다는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어찌 혼자서 그런 일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위험합니다.”
“뭐, 분명 들키면 위험하겠지만……. 그래도 할 가치가 있어요.”
“꼭 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샐리나 다른 사람들을 시키면 안 되겠습니까? 그들을 못 믿겠다면 내가 직접…….”
“내가 짐작하는 그곳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앨버튼 가문의 사람들뿐이에요. 괜히 다른 사람들을 시켰다가 들키면 공작님 입장만 우스워질 거예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눈’으로 직접 아버지가 숨기고 있는 비밀에 관해 확인하고 싶어요.”
“……부인.”
“뭐, 어디까지나 진짜 아버지가 뭘 알고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사실 가능성은 반반이에요. 그래서 걱정이에요. 기껏 열심히 찾아봤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하죠? ……아,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게 나으려나요?”
그레이스는 여전히 굳은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서를 향해 일부러 가볍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서는 그 모습에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젠 어쩔 수 없겠다는 듯.
“……알겠습니다. 내가 어찌 부인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아서.”
그레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아서의 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가겠다고 결정을 해 놓고서도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숨기고 있는 진실에 대해 알고 싶기도 하고, 영영 모르고 싶기도 했다.
정말 앨버튼 공작이 그 모든 ‘저주’에 개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과 전 부인을 비롯한 약혼자들 전부를 다치게 한 ‘끔찍한 가문의 사람’이 되는 거니까.
‘……그것이 사실이라 밝혀져도, 날 지금처럼 좋아해 줄 건가요?’
그레이스는 그 질문을 속으로 삼키며, 자신을 마주 안아 주는 아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서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치사합니다. 이럴 때만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겁니까?”
“괜찮으시다면 앞으로 계속 이름으로 부를게요.”
“부디 그래 주십시오. 날 공작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이제 부인 밖에는 없으니까요.”
“……그건 내가 특별하다는 뜻인가요?”
그레이스가 웃으며 묻자 아서는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이제 내게 특별한 사람은 부인과 레온 말고는 없어요.”
“……아서.”
“그러니 다치지 말고 무사히, 그리고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네. 걱정 마세요.”
“이틀입니다. 이틀이 지나면 부인께서 저어하셔도 앨버튼 저택까지 부인을 데리러 갈 겁니다.”
“어머, 데리러 와 주실 거예요? 나야 좋죠.”
아서의 엄포에 그레이스는 킥킥거리며 그의 어깨에 제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자신의 머리와 어깨를 다정히 쓸어내리는 아서의 큰 손에 그레이스는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사히 다녀올게요. ……반드시.”
“네. 믿겠습니다.”
본가에 가는 것이 이리 비장한 각오를 먹어야 할 여자가 자신 말고 또 있을까. 그레이스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서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곳에서 무사히 비밀을 찾고 다시 이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자신이 숨기고 있는 또 한 가지 비밀에 대해서도 털어놓을 용기가 생길까.
그리고 그 모든 비밀들을 알게 되었을 때 지금처럼 아서가 자신을 향해 웃어 줄까.
꼭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더 이상 걱정 말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