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31화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주시니, 조금 용기가 생겼어요.”
“……어떤?”
아서가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그레이스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제부터는 공작님, 아니, 아서 당신에게 내가 본 환상이나 겪은 두려운 일에 대해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을게요.”
“……!”
“적어도……. 내가 아서의 곁에 있으면서 겪거나 겪게 될 일들에 대해서는 전부 말하고 싶어졌어요.”
“……그레이스.”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이 두려움을 같이 짊어져 주세요.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지, 어떡하면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같이 생각하고 또 고민해 줬으면 해요. ……그래도 되죠?”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그레이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집요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서가 대답 대신 살짝 떨어져 있던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감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말해 주세요. 내가 다 감당하고 짊어지겠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어떤 일이든 부인께서 물으신다면 숨김없이 전부 털어놓겠습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나야말로 고맙습니다. ……사실 당신은 겪지 않아도 될 일인데, 고작 나 같은 사람의 곁에 있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겠다는 당신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고맙고 또 미안한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아서.”
“감히 나 같은 자가 당신 같이 고귀한 사람의 마음을 받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서는 그 말에 담긴 열기만큼이나 타오를 듯 열렬한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했다.
그 순간 그레이스는 푸르고 붉은 기묘한 오드아이에 마치 자신의 영혼이 빨려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아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고, 공작님! 공작님!”
누군가가 황급히 아서를 부르며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레이스는 확 정신이 들어 다가오는 아서의 품에서 떨어졌고, 아서는 불쾌한 표정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한 손에 서신 한 통을 든 올리버 경과 그 곁에 선 샐리가 머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올리버 경은 어색하게 웃으며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살피더니 물었다.
“아, 혹시 제가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겁니까?”
“……분명 내가 누구도 이곳으로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서는 올리버 경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 곁에 선 샐리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샐리가 깊게 허리를 조아리더니 난처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조금 전 올리버 경이 서신을 갖고 오셔서 무작정 마님을 뵙게 해 달라고 하셔서…….”
“뭐?”
“네? 나에게요?”
샐리의 대답에 아서의 곁에서 어색하게 시선만 내리깔고 있던 그레이스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통상 자신에게 도착한 서신은 샐리 편을 통해 들어오곤 했는데, 대체 누구기에 아서 편으로 제게 서신을 보낸 걸까 싶었다.
그레이스는 의아한 시선으로 아서를 돌아보았고, 아서 또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서신을 보낸 이가 누구지, 올리버 경?”
“……그게, 앨버튼 공작입니다.”
“네? 아버지가요?”
올리버 경의 대답에 그레이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벌써 아서와 결혼한지도 어언 한 달이 가까워지는 시점에 새삼스레 편지를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하필 샐리로부터 ‘저주’의 배후 혹은 원인에 자신의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난 이후여서인지 더욱 꺼림칙했다.
“……전해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공작 부인.”
그레이스는 일단 올리버 경이 내미는 서신을 받아 들고 그 겉면을 살폈다.
앨버튼 가문을 상징하는 올빼미 인장이 찍힌 그 서신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특이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손가락 사이에 서신을 끼우고 겉면을 이리저리 살피며 올리버 경을 향해 물었다.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이걸 왜 그리 급하게 전하려고 하신 거죠?”
“서신 안쪽, 올빼미 인장 옆에 작은 문양을 봐 주십시오, 공작 부인.”
그 물음에 올리버 경은 서신 한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레이스는 올리버 경이 시키는 대로 서신을 살폈다. 그러자 발신자가 적히지 않은 그 서신에는 올빼미 인장과 그 옆에 희미하게 새겨진 황금으로 된 나비 인장만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황금 나비네요? 이게 왜요?”
“공작 부인, ‘황금 나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 아뇨.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올리버 경의 물음에 그레이스는 민망함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서가 올리버 경에게 슬며시 눈총을 주고는 그레이스를 향해 다정히 말했다.
“그러고 보니 부인께서는 얼마 전 성혼 축하 파티로 처음 황궁에 가 보셨다고 하셨죠.”
“네, 맞아요. 지금껏 앨버튼 저택 밖에서 벌어지는 파티에는 한 번도 초대받은 적도 없고, 참석한 적도 없었어요.”
“그렇다면 이 문양에 대해 아시는 것이 없을 만도 합니다. 그리 부끄러워하실 것 없어요.”
“……그런가요.”
아서의 위로에 그레이스는 살짝 아랫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그 모습이 꼭 레온 같아서 아서는 작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이마 위로 살짝 삐져나온 잔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는 말했다.
“부인, ‘황금’으로 아로새긴 인장은 예로부터 ‘황족 여성들’만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머, 정말로요?”
“네. 그중에서도 ‘황금 나비’는 ‘황태자비’나 그 내정자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아.”
아서의 대답에 그레이스는 알겠다는 듯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대놓고 인상을 구기며 제 손에 들린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이런 사교계 문화에 밝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서신을 보낼 사람, 그리고 이런 문양을 찍어 보낼 사람은 딱 한 사람, 자신의 언니 마리안느 말고는 없었다.
그레이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예전부터 자신이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에 꽤 자부심을 갖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날 대놓고 무시하는 형태로 과시할 거라고는…….”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제 불찰이었습니다.”
“아니에요. 황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빨리 전할 수밖엔 없었다고 내게 설명하려 했던 거죠? 괜찮아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앨버튼 가에서 직접 사람까지 보내 이 서신을 부인께 전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네? 정말요?”
그레이스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올리버 경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올리버 경이 난처한 듯한 얼굴로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게다가 답변은 오늘 안에 꼭 받아서 전해야 한다고 하며, 공작 부인께서 답신을 써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안에 답변을 보내라 했다? 게다가 답신을 받기 전엔 돌아가지 않겠다니, 꽤 무례한 처사로군.”
“대체 무슨 일이기에……. 하, 일단 빨리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요.”
그 대답에 아서는 불쾌한 듯 입매를 굳혔고, 그레이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서신을 뜯으려 했다.
그러자 올리버 경이 준비해 온 페이퍼 나이프를 꺼내더니 그레이스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올리버 경.”
“천만에요, 공작 부인.”
그레이스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 들고는 밀랍으로 된 인장을 뜯어 서신을 펼쳤다.
그러자 모서리 끝이 금박으로 아로새겨진 화려한 양피지가 드러났다. 그레이스는 함부로 쥐기조차 부담스러운 그 서신을 눈으로 훑으며 내용을 입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대제국의 1황자이자 황태자이신 에우제니우스 클라이브 님과 내가 한 달 뒤에 결혼식을 거행하게 되었어.
딱히 이렇게 알리지 않아도 너 또한 알게 될 테지만, 그 전에 이리 서신을 보내는 까닭은 아버님께서 ‘새 신부’가 되는 내게 ‘파티’를 열어 주시기로 하셨거든.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동생인 너를 초대하지 않아서야 내 체면이 서지 않을 테니, 이리 초대장을 보내. ……아.”
그러던 중 그레이스는 곧 그 서신의 내용을 파악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곁에 서서 그레이스와 함께 눈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아서가 마땅찮은 듯 입매를 일그러뜨리더니 올리버 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전에 황제 폐하께서는 황태자 전하와 마리안느 영애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빨라도 여섯 달 뒤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저 또한 그리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껏 황태자 전하께서는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으니까요.”
“뭐, 처음부터 황태자 전하는 마리안느 영애에게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최근 파티장에서 보았을 땐 그 정도를 넘어서서 험악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서두르시는 모양이군.”
“앨버튼 공작가 또한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 없다는 폐하의 의견에 동조한 걸 겁니다. 그쪽에서도 이렇게 자꾸 결혼이 미뤄지면 좋을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겠죠.”
“……그렇겠지.”
올리버 경의 추론에 아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가 오가는 사이, 그레이스는 둘 사이에 이어지는 대화를 흘려들으며 오로지 서신의 문구에만 집중했다.
새 신부에게 열어 주는 브라이덜 샤워, 앨버튼 저택에 초대. 그 말인즉 자신이 다시 앨버튼 저택으로 방문할 빌미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불과 며칠 전이었다면 이 서신을 받은 순간, 어떻게 하면 잘 거절할 것인가를 고민했겠지만 샐리와 대화를 나눈 지금은 달랐다.
‘어쩌면 ‘저주’에 대해, 그리고 아버지가 ‘저주’가 일어날 때마다 기록했다던 그 노트에 대해 살펴볼 수도 있겠어.’
언제나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연구한답시고 틀어박혔던 서재. 분명 그곳에 조금 전 샐리와의 대화에서 나왔던 기록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파티가 한창일 틈을 타서 몰래 그 방으로 들어가서 ‘숨겨진 비밀’을 확인해야겠어.’
마침 샐리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감춰 놓은 비밀에 대해 궁금해하던 자신에게, 이 파티는 어쩌면 신이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저주를 풀 실마리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아, 하지만 그러다 들켜 버리면, 그땐 어떡하지?’
그레이스는 희미한 기대감과 의미 모를 두려움으로 서신을 쥔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