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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30화 (30/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30화 ‘반드시 알아내야 해. 아버지가 이 일에 얼마나 개입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분명 그것을 알아낸다면 ‘저주’를 풀 방법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자신의 앞에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된다 해도, 반드시 이 일에 대해 밝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짐하면서도 그레이스는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불안함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 그 사람이 보고 싶어.’

오롯이 자신을 품어 주고 안심시켜 주는 그 따뜻한 품에 안겨서 조금 전 한 치기 어린 질투에 대해 사과를 건네고 조금이나마 이 불안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레이스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샐리가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놀라며 말했다.

“마, 마님? 왜 그러세요?”

“……지금 당장 아서, 공작님을 뵈어야겠어요. 공작님 집무실이 어디죠?”

“네? 지, 집무실이요?”

“당장 안내해요.”

다급한 마음에 고압적으로 샐리에게 안내를 명하며 그레이스는 빠른 걸음으로 문 앞으로 다가가 그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부인?”

그러자 그 문 앞에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아서가 서 있었다.

“……윽.”

그레이스는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달려가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지금 순간, 가장 보고 싶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을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서는 갑자기 자신에게 달려와 안기는 그레이스를 마주 안으며, 그녀의 머리에 턱을 괸 채 다정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뇨, 그냥, ……그냥. 공작님이 보고 싶었는데, 마침 공작님이 여기 서 계신 것이 기뻐서요.”

“……그렇습니까? 돌아오길 잘했군요.”

그레이스가 충동적으로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털어놓으며 어리광을 부리자 아서는 큰 손으로 여린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쓸어내렸다.

그레이스는 그런 아서의 다정한 손길을 만끽하며 더욱 깊숙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 위에서 낮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서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큰 손으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샐리, 잠시만 자리를 피해 줬으면 하는데. 그리고 저기 있는 기사들에게도 잠시 아래층으로 가 있으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 말과 함께 샐리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는 소리가 그레이스의 귓가로 들려왔다. 마침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참인데, 눈치 좋게 사람들을 물리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

그렇게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후, 빈 복도에 남은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안고 있기만 했다.

막상 둘만 남게 되자,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고민하며 그레이스는 자신을 안은 채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아서와 눈을 맞췄다.

그러자 아서의 검은 가면 너머 푸르고 붉은 오드아이가 상냥하게 휘어졌다. 그것은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 천천히 말해도 된다며 그녀를 안심시켜 주는 듯했다.

그레이스는 그 다정하고 배려 깊은 눈빛에 용기를 얻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쭉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잠든 레온을 별채에 눕혀 주고 다시 온 것이니까요.”

“……그랬구나. 난 공작님이 집무실에 있는 줄 알고…….”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지만, 그냥 집무실로 돌아가자니 조금 전 부인의 모습이 영 마음에 걸려서 갈 수가 없어서요.”

“……아.”

“그런데 지금 부인의 얼굴을 보니 돌아오길 참 잘했다 싶습니다. 안색이 영 좋지 않은데, 조금 전 샐리와 무슨 말을 나눈 겁니까?”

아서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창백해진 뺨을 쓰다듬었다.

그레이스는 그 다정하고 큰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후 한동안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른 입술만 달싹이던 그레이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공작님께 사과할 것이 있어요.”

“사과라니, 제게 말입니까.”

“네. ……잠시나마 의심해서 미안해요.”

“……의심이라니요? 제가 부인께 뭔가 의뭉스러운 행동을 했습니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레이스는 대체 자신이 뭘 잘못한 것인지 고민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공작님께서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어요.”

“정말입니까?”

“네. ……그냥, 제가 쓰러지기 전 한 가지 ‘환상’을 보고 멋대로 의심한 것뿐이에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아서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그러더니 재촉하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환상이라니, 대체 무엇을 보셨기에 정신까지 잃으셨습니까? 대체 얼마나 끔찍한 것을 보았기에……. 역시, 역시 그 저주 때문에……!”

점점 그레이스를 향한 걱정에 어조가 격해지는 아서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얼른 팔로 그의 허리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

“아뇨, 아뇨! 아니에요. 그 무도회 때 보았던 것처럼 ‘끔찍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럼 무엇을 보셨습니까.”

“음. ……비밀정원에 쓰러져 있는 한 숙녀와 그녀를 안고 울부짖고 있는 한 신사를 보았어요.”

무엇을 보았냐고 묻는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한 후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말을 들은 아서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환상’ 속 숙녀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죽어 가고 있었고, 그 숙녀를 안고 있는 신사는 절대 그녀를 보낼 수 없다며 울부짖었죠. 그 모습에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가슴은 아픈데 내가 그곳에 개입할 수는 없어서 그저 보고만 있었는데. ……그때 그 숙녀를 안고 있던 신사와 눈이 딱 마주쳤지 뭐예요.”

“……그래서요?”

“깜짝 놀라서 깼는데, 깨고 보니 그 신사의 눈이 공작님과 너무 닮아 있어서 ……그래서 의심을 했어요.”

“그 신사와 내 눈이 닮아 있었고, 그래서 날 의심했다고요?”

그레이스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아서가 슬쩍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다정히 쓸어 주며 말했다.

“네. 저는 환상 속 그 신사가 공작님인 줄 알았거든요.”

“……네?”

“하필 그 쓰러진 숙녀가 척 봐도 회임을 한 상태 같았거든요. ……그래서 혹시 그 신사는 공작님이고, 저 숙녀는 전 공작 부인이거나 혹은 공작님의 전 약혼자 중 한 사람이 아닐까. 그 환상 속 신사는 쓰러진 숙녀를 절절히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공작님께선 이전에 저토록 누군가를 끔찍이 사랑했구나 생각하니까…….”

그래서 속 좁게도 질투를 했었노라고 그레이스가 고백하려던 그때 아서가 단호히 고개를 저어 그녀의 말을 막더니 말했다.

“그 환상 속 신사가 누군지는 몰라도, 나는 아닙니다.”

“알아요. 이젠 아는데. ……막 정신이 들었을 땐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속이 상했어요. 그래서 샐리에게 물어본 거고요.”

“……샐리에게 말입니까.”

“네. ……그러니까 샐리가 대답해 줬어요. 내가 보았던 그 모습은, 어쩌면 공작님의 아버님과 어머님이신 전 펠릭스 공작님과 에일린 1황녀님일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듣게 되었고요.”

그레이스가 머뭇거리며 설명하자 그 말을 듣던 아서가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그는 곧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랬군요.”

“……네.”

“나는 잘 기억나지 않고, 물어도 두 분 모두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으려 하셨기에 잘은 모르지만. ……아마 샐리가 그렇게 말했다면 맞을 겁니다. 그녀만큼 이 펠릭스 성에서 오래 봉직해 온 이는 없었으니까요.”

아서는 낮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말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은 아서의 모습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며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미안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공작님께 직접 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솔직히 마음이 좀 상했거든요.”

“……마음이 상했다니요?”

“모, 모르시겠어요? 질투, 질투했다고요!”

“……네?”

“미안해요. ……실망했죠.”

그레이스가 잔뜩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건네자, 굳어 있던 아서의 입매가 화사하게 올라갔다.

그러더니 제 품에 안긴 그레이스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내리며 아서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사과를 하십니까? 나는 부인께서 질투해 주셨다니 기쁩니다만.”

“기, 기쁘다고요?”

“네. 기쁩니다.”

그 말과 함께 아서는 민망함으로 살짝 붉게 달아오른 그레이스의 뺨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레이스가 그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서를 보자 그는 다정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속이 상하는군요.”

“……왜, 왜요?”

“그리 의심이 들 만큼 내가 표현이 부족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공작님.”

“그러니 이 자리에서 부인께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지금껏 누구도 부인만큼 마음에 담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지금껏 나와 연을 맺었던 그 어떤 레이디도 부인처럼 내게 마음을 준 사람도 없었고요.”

“……공작님.”

“그러니 마음 졸이실 것 없습니다. 내게는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뿐입니다.”

아서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늘어뜨려진 그레이스의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 후 꿀이 떨어질 듯 달콤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그레이스가 부끄러워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레이스는 그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 기뻤고, 고마웠으며 또 미안했다. 이렇게 큰 애정을 주는 것이 기쁘고 고마웠으며, 또 아직까지도 내심 마음 한구석에는 저주를 향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니 미안했다.

그런 마음이 들자, 그레이스는 지금껏 두려워만 하고 있던 마음에 작은 용기가 싹트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면, 좀 더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이번처럼 혼자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에게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전부 털어놓고 함께 해결책을 고민하면 어떨까.

아직 그에게 ‘자신이 한 번 죽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을 용기까진 없지만, 적어도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을 털어놓을 만한 용기가 생겼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한결같이 다정하게 바라보는 그의 애정 어린 시선에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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