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27화
“부인! 정신이 드십니까!”
“마, 마, 마님!”
그 순간 아서와 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스는 순간 핑 도는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며 눈을 깜빡였다. 아직까지 시야가 흐릿한 탓이었다.
그렇게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드디어 주변의 풍경이 선명해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익숙한 제 침실의 풍경과 간절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서와 안도한 샐리의 모습이었다.
‘조금 전 본 것은 꿈이었나?’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멍한 얼굴로 아서를 향해 중얼거렸다.
“……공작님?”
그러자 아서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곧 팔을 뻗어 그레이스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비밀정원에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얼마나 걱정한 줄 아십니까.”
“……공작님.”
“정말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아서는 애가 타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품에 안고 있던 그레이스를 살짝 제게서 떼어 냈다.
그러고는 그레이스가 무사한지 제 눈으로 찬찬히 확인하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그레이스는 크고 다정한 아서의 손이 자신의 이마와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심장이 주책맞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 천천히 그녀의 뺨을 쓰다듬던 아서의 손이 살짝 그녀의 목에 닿은 순간,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칠게 아서의 손을 밀어냈다.
“……!”
순식간에 내쳐진 아서가 눈을 크게 뜨며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는 또다시 차오르는 이유 모를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양팔로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조금 전 아서의 손이 닿은 순간, 조금 전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 광경 속 제 목을 졸랐던 억센 손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일부러 깊게 심호흡했다.
‘진정해. 조금 전 그건 꿈이야. 그냥 단순히 꿈이라고. ……그건 저주가 아니야. 겁먹을 것 없어.’
그래. 그건 단순히 쓰러진 충격으로 꾼 악몽일 뿐이다.
그레이스는 스스로를 그렇게 납득시켰다. 어떻게 쓰러진 것인지, 왜 쓰러진 것인지 그리고 왜 그런 꿈을 꾼 것인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스스로도 ‘저주’라고밖에는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음에도 그랬다.
‘아냐, 아니라고.’
고작 이따위 기절이, 악몽이 ‘저주’일 리 없다고. 그저 자신이 좀 약해져서 쓰러진 것이고 악몽을 꾼 것뿐이라고.
그레이스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거짓말과 한없이 가까운 말을 되뇌었다.
‘또다시 공작님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그 사람이 내게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끝없이 되뇌자, 다행히 마음을 지배했던 두려움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레이스는 조금 편해진 얼굴로, 줄곧 당황과 걱정이 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살피는 아서를 향해 말했다.
“……미, 미안해요. 조금 부끄러워서…….”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부인.”
“아, 아뇨. 괜찮, 괜찮아요. 그런데 레온은 어디 있나요? ……많이 놀랐을 텐데. 제가 안심시켜 줘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레이스는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서는 그레이스의 앞에 손바닥을 들어 올려 진정시키더니 손가락으로 살짝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레온은 저기 있습니다.”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레이스가 누워 있는 넓은 침대의 옆자리에 아서의 망토를 덮고 잠이 든 레온의 모습이 보였다.
몸을 둥글게 만 채 손가락을 빨며 잠이 든 레온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눈가는 빨갛게 짓물러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제 눈앞에서 쓰러진 그레이스의 모습에 많이 놀라 울었던 듯했다.
그레이스는 팔을 뻗어 잠이 든 레온의 긴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곁에 선 샐리를 향해 물었다.
“레온은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네. 많이 놀라셔서 울다 지쳐 잠이 드셨을 뿐, 어디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래요? 다행이다.”
샐리의 대답에 그레이스는 안타깝다는 듯 잠든 레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레온이 일어나면 꼭 끌어안고 그 놀라고 다친 마음을 안아 주겠다 속으로 다짐하던 그때, 줄곧 집요한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살피던 아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괜찮다면.”
“네?”
“딱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뭘요?”
“어째서 갑자기 정원에서 쓰러진 겁니까? ……혹시, 지난번 황궁에서처럼 또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겁니까?”
그 말에 그레이스는 흠칫 놀라며 아서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듣기 전엔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그의 굳은 시선에 그레이스는 머릿속에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떡하지.’
사실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을 다 말해 버리고 싶은 마음은 그녀에게도 있었다.
그 꿈속에서 죽어 가는 여자를 안고 울던 것은 아서 당신이 맞는지, 맞는다면 그 여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그 여자의 배가 심상치 않게 불러 있었는데, 만약 그 여자가 아서의 ‘전 부인’이나 약혼자라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된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는데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정말 그 꿈속 사람이 아서가 맞고, 꿈속에서처럼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직접 그의 입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가질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나 외에 있었다는 것이 싫다고 하면……. 너무 내 속이 좁은 거겠지?’
그런 어린애 같은 마음이 드는 자신이 우습고 또 한심하게 느껴졌다. 만약 그런 대답을 그에게 듣는다면, 속 좁게 질투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레이스는 한참을 입만 달싹거리며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다음에, 다음에 이야기하면 안 돼요?”
“…….”
“미안해요. 지금 그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 대답에 그레이스를 바라보던 아서의 시선이 복잡하게 일렁였다. 그러더니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오늘 쓰러진 이유가 ‘저주’에 기인한 것이라면…….”
“난 괜찮아요.”
그레이스는 그의 말을 막아 세우듯 대답했다.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서의 얼굴에 손을 뻗어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 저주 때문에 공작님과 레온을 버리고 떠나지 않아요.”
“…….”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아서.”
여전히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살피는 아서를 향해 그레이스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가면 너머 아서의 푸르고 붉은 오드아이가 놀란 듯 살짝 커졌다. 그러더니 곧 굳은 입매를 부드럽게 편 아서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그레이스의 이마 위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쪽.
짧은 소리와 함께 이마 위로 따뜻한 것이 닿았다 떨어지자 그레이스는 화들짝 놀라며 한 손으로 제 이마를 덮었다.
아서는 순식간에 온 얼굴이 새빨개진 그레이스를 귀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또 이렇게 쓰러지게 되면 그땐 오늘처럼 사랑스럽게 행동하셔도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사, 사랑스럽다뇨…….”
“그럼 레온은 내가 별채에 데려다줄 테니, 이만 쉬어요. 사랑스러운 그레이스.”
그 달콤하다 못해 온몸이 녹을 것 같은 말을 끝으로 아서는 잠든 레온을 품에 안고 침실 밖을 나갔다.
그레이스는 홧홧 달아오르는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러자 줄곧 곁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샐리가 조심스레 그레이스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럼, 편히 쉬시도록 저 또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아. 그래 줄…….”
제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샐리에게 그레이스가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줄곧 마음에 걸렸던 것이 떠올랐다.
바로 레온이 ‘비밀정원’을 언급했을 때 샐리가 지었던 어딘가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그때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걸까 궁금했는데.’
혹시 자신이 조금 전 ‘보았던’ 그 일에 대해 샐리가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만약 그 ‘남자’가 아서라면 샐리는 분명 그 일에 대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레이스는 어느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샐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만요, 샐리.”
“네, 뭐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샐리를 보며 그레이스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샐리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요. 꼭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니.”
“……?”
“꼭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샐리.”
지금껏 존댓말을 하던 그레이스가 처음으로 하대한 순간이었다. 샐리는 서늘하게 굳은 눈매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네. 말씀하세요.”
“조금 전, 그러니까 내가 쓰러지기 전에 레온이 ‘비밀정원’으로 산책을 가자고 했지.”
“네. 그러셨죠.”
“그때, 왜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지? 왜 그랬어? 그 이유가 뭔지 말해 줘.”
“……아, 그것이…….”
그레이스의 질문에 샐리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대답해 줄 때까지 물러나지 않겠다는 그레이스의 시선에 샐리는 곧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사실 그곳은 현 공작님, 그러니까 아서 공자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랍니다. ……또한 전 공작 부인이신 큰 마님께서 죽다 살아나신 곳이기도 하고요.”
“……뭐?”
이윽고 샐리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그레이스로선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멍한 표정으로 샐리를 향해 되물었다. 그러자 샐리가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