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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25화 (25/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25화

“왜 이제야 온 것이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짙은 커튼이 내려진 넓고 어두운 응접실 안에는 남자와 똑같이 온몸을 가리는 로브 차림을 한 네 명의 사람이 둥근 원탁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남자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아는 척을 해 왔다.

남자는 그들을 향해 짧게 고갯짓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유일하게 비어 있던 한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자 가장 작은 의자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남자를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좀 늦으셨군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어머, 지금 이 일보다 급한 그 사정이 대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남자의 대답에 남자의 맞은편에 있던 한 사람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비꼬았다.

그 모습에 남자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빈정거리듯 말했다.

“글쎄요. 레이디에게 그것을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답하자 남자의 맞은편에 있던 여자는 분하다는 듯 로브 아래 살짝 드러난 붉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자는 자신을 싸늘하게 노려보는 여자를 비웃듯 바라보았다. 지금의 그에게 있어 저따위 계집의 위협 따위는 그저 쥐새끼 하나가 이빨을 드러낸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자, 자. 두 사람 다, 신경전은 그쯤 해 두지.”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 싸늘한 시선이 오가던 그때, 남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줄곧 싸늘하게 남자를 노려보던 여자는 콧방귀를 뀌며 팩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남자는 그 모습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 곧 제 곁에 앉은 남자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자네도 좀 일찍 다니도록 하게. 매번 이리 늦어서야 되겠는가?”

“죄송합니다. 주의하도록 하지요.”

그의 힐난에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사과를 건넸다. 그 모습에 그는 불쾌한 듯 입매를 굳혔지만, 곧 평온한 목소리로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그 물음에 남자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더니 대답했다.

“바라시는 대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네. 그 ‘괴물’이 ‘제물’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오오, 그런가요!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군요!”

남자의 대답에 지금껏 별말 없이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반갑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남자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그 사람의 곁에 앉은 한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만 된다면, 아마 몇 달 안으로 ‘그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자 남자가 줄곧 바라보던 한 사람은 불편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대신 그 곁에 앉아 있던 또 다른 한 사람이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그렇게나 오래 기다려야 하나? 시기를 더 당길 수는 없을까?”

그 말에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것은 곤란합니다.”

“……어째서? 자네의 마법 능력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자고로 모든 일엔 순리가 있는 법이지요. 이제 겨우 ‘저주’가 싹을 틔웠을 뿐,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예. 사실 이번 일도 괴물이 생각보다 더 빨리 제물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이리 일이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을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지금껏 괴물이 얼마나 차갑고 까다로운 태도로 제물들을 내쳐 왔는지를 말입니다. 괜히 조급하게 일을 도모했다간 우리는 또다시 적당한 제물을 찾아 괴물에게 붙여 주는 것에 지난한 시간과 마법을 낭비하게 되었을 겁니다.”

남자의 대답에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대로야. 이번 일도 앨버튼 공작이 돕지 않았다면 황족들이나 귀족들의 사생아 중 적당한 사람을 찾아봐야 했을 테니.”

“예. 게다가 그 사생아 출신의 여자를 ‘귀족 영애 흉내’라도 내게 만들기 위해 또 시간이 필요했을 테고요. 마침 공작에게 무능력자인 따님이 없었더라면 아주 골치가 아플 뻔했죠.”

“자네 말이 맞아. 미안하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에 그만 조급해졌다네.”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조급해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남자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앞의 그를 위로했다. 그 목소리는 달콤하고 다정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기에 충분했다.

남자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의 그를 바라보며 더욱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천천히 확실하게 일을 진행해야지요. 마치 거미가 거미줄에 걸려든 나비를 먹어 치울 때처럼, 이미 거미줄에 걸린 것도 모르는 멍청한 나비가 버둥거리고 또 버둥거리다가 지쳐서 더 이상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는 그때.”

“……!”

그 순간 남자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으며 손끝까지 덮고 있던 제 로브에서 깡마른 손을 꺼내 허공을 향해 펼쳤다.

그러자 남자의 텅 빈 손에서 섬뜩한 녹색 불꽃이 강렬하게 타오르더니 그 불꽃 너머로 오드아이를 가진 한 남자와 젊고 예쁜 한 여자의 얼굴이 피어올랐다.

“바로 그때가, 바라시던 ‘숙원’이 이뤄지는 날이 될 겁니다.”

그것은 바로 아서 펠릭스 공작과 그의 새 신부, 그레이스 펠릭스 공작 부인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만들어 낸 그 초록빛 불꽃 속에서 흉측하게 일그러지며 타오르는 그 두 사람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불꽃을 응시하는 응접실 안 사람들의 눈 또한 그 불꽃 속 두 사람을 향했다. 그들의 눈은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굶주린 독사처럼 싸늘하고 잔인하게 번들거렸다.

4. 눈을 뜬 저주

눈이 내리지 않는 펠릭스 성의 하늘은 눈이 부실 만큼 새파랬다.

그레이스는 애교 많은 고양이처럼 제 품에 매달려 있는 레온을 꼭 끌어안고 별채 밖으로 나와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난밤 아서와의 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내리쬐는 강한 겨울 햇살에 현기증이 일었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살며시 인상을 찡그리며 휘청거리자 품에 안겨 있던 레온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형수님? 어디 아파요?”

“아니? 좀 피곤해서 그래. 어젯밤 잠을 좀 설쳤거든.”

별거 아니라는 듯 그레이스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레온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레온은 시무룩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더니 곧 작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내려 달라 졸랐다.

그러더니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레이스를 향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랑 산책하기 힘들 만큼 피곤하세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오히려 레온이랑 산책하고 나면 덜 피곤할 것 같아.”

그 대답에 시무룩했던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는 레온의 앞에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꽉 잡아 오는 레온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그레이스는 계단을 내려왔다.

별채 앞에 딸린 작은 정원 앞에 잠시 멈춰 선 그레이스는 장난스럽게 잡고 있는 제 손을 흔드는 레온을 향해 말했다.

“샐리가 차랑 쿠키를 가져온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자.”

“네!”

그렇게 정원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를 든 샐리가 그들의 뒤를 따라 나왔다.

그레이스는 얼핏 봐도 무거워 보이는 바구니를 들고 뒤뚱뒤뚱 계단을 내려오는 샐리를 향해 물었다.

“무거워 보이는데 좀 도와줄까요?”

“무슨 소리세요! 제가 충분히 들 수 있으니 걱정 마셔요. 호호. 그건 그렇고, 오늘 산책은 어디로 가실 예정이세요? 늘 다니시던 대로 본채 앞 중앙 정원에 자리를 마련할까요?”

“……어, 그럴…….”

살가운 샐리의 물음에 그레이스는 그러자고 대답하려다가 어정쩡하게 말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 문득 이 저택 내의 다른 곳 또한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동안에는 딱히 이곳에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고, 정을 붙이고 싶지도 않았기에 일부러 스스로의 행동반경을 제한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제 이곳은 그녀가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살아가야 할 곳이기에.

그런 마음에 그레이스는 살포시 웃으며 샐리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거기 말고, 다른 곳으로 좀 가 볼까요?”

“어머, 그럴까요?”

“레온, 혹시 가고 싶은 곳 있어?”

그레이스가 시선을 돌려 제 곁에 선 레온을 돌아보며 묻자, 레온이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더니 그레이스의 손을 흔들며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 그럼 오늘은 북문에 있는 비밀정원으로 가요!”

“비밀정원? 그런 곳도 있었어?”

“네! 거기에 있는 얼음 분수랑 스노드롭이 아주 예뻐요!”

“그래? 그럼 거기로 갈까?”

그레이스는 잔뜩 신이 난 레온을 웃으며 내려다보다 샐리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샐리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샐리는 살짝 표정을 찡그린 채 그레이스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샐리를 불렀다.

“……샐리?”

“네!? ……아.”

“왜 그래요? 혹시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이에요?”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이 저택 내에서 마님께서 가지 못하실 곳은 없어요.”

그레이스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샐리를 향해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죠?”

“그럼요. 그럼 비밀정원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할게요. 두 분께서는 절 따라오셔요.”

그러자 샐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그레이스를 향해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바구니를 든 채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평소 샐리랑은 좀 다른데?’

예전에 비밀정원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레이스는 어쩐지 영 석연찮은 샐리의 행동에 마음이 걸렸다.

“얼른 가요!”

“……어? 응! 그래!”

그러나 그레이스는 제 곁에서 잡은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재촉하는 레온의 말에 복잡해지던 생각이 뚝 하고 멈췄다.

그레이스는 제 곁에 선 레온을 향해 다정히 미소 지으며 레온이 원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착각이겠지.’

어쩌면 자신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샐리는 잠깐 다른 생각에 빠졌을 뿐인데 자신이 괜히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레이스는 마음속에 찜찜하게 남은 생각을 털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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