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22화 (22/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22화

그레이스는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닫혀 버린 마차 문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다 보면, 어쩌면 제 간절한 시선에 그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 두려워하는 자신의 곁으로 와 주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 바람과는 달리 멀어지는 아서의 발소리에 그레이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마치 그것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람처럼 텅 빈 마차 안에서 맥없이 웃고 있던 그녀는 곧 성마른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바보 같아.”

그레이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혼자 마음을 토로하고 나가 버린 그에게, 그리고 지금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그와 자신을 비웃으며 그레이스는 지금까지 명확하지 않았던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의 정체를 자각했다. 어느새 자신 또한 그를 마음에 담아 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밀었던 사람이 자신이 처음이었듯, 자신에게 다정함을 주었던 사람도 그가 처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와 같은 마음임을 자각하자, 그레이스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당장이라도 이 마차에서 내려서 그를 붙잡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냥 이대로 그의 말을 듣고 그 끔찍했던 저주의 잔상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두려움이 자꾸만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처음으로 자신을 다정히 대해 준 그 사람이 좋아졌다. 그런데 딱 그만큼 그의 곁에 있으면서 겪게 될 저주가 두렵고 무서웠다.

가족들에게마저 외면당하고, 천신만고 끝에 다시 찾은 두 번째 삶을 또다시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는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 ……어떡하면 좋을지, 뭘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마차 안, 홀로 남은 그레이스는 답답함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연신 닦으며 몸을 웅크렸다.

* * *

다음 날 성혼 축하 파티를 마친 펠릭스 공작 부부가 펠릭스 본성으로 돌아오는 중이라는 연통이 펠릭스 저택에 전해졌다.

두 분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에, 펠릭스 저택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드디어 이번에야말로 제 주인에게 내렸던 끔찍한 저주에서 벗어는 걸까.

마침 다른 분들과는 달리 새 공작 부인께서는 공작님께 정을 주고 계시니, 이번에야말로 두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기대감을 품었다.

그러나 펠릭스 저택에 도착한 아서와 그레이스의 모습은 그들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서는 성에 도착하자 곧장 말에서 내리더니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고 집무실이 위치한 탑으로 가 버렸고, 그레이스는 자신의 남편인 공작의 에스코트 대신 집사장의 도움을 받아 홀로 마차에서 내렸다.

“형수님―!”

그러자 레온이 밝은 얼굴로 그레이스를 부르며 그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레이스는 그 귀엽고 살가운 모습에 억지로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잘 있었어, 레온?”

“네! 올리버가 형님이랑 형수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얌전히 잘 있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그래? 착하다. 우리 레온.”

“……형수님?”

그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레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자신을 보면 한껏 밝은 모습으로 반겨 주던 형수님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기운이 없어 보였다.

혹시 제 얼굴을 보는 것이 반갑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 레온이 입술을 삐죽거리자, 어느새 다가온 샐리가 그를 향해 말했다.

“……레온 공자님, 마님께서 오래 마차를 타고 계셔서 피곤하신가 봐요.”

“정말?”

“네. 마님은 지금 쉬셔야 한답니다. 그러니 오늘 산책은 올리버 경과 하세요. 아셨죠?”

“……응. 알았어.”

“……미안해, 레온.”

샐리의 설명에 레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레이스는 실망한 레온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사과한 후 샐리의 부축을 받아 침실이 있는 본채로 걸었다.

정원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긴 복도를 지나는 사이 샐리는 말없이 굳은 표정을 한 그레이스의 눈치만 살폈다.

그렇게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로 침실 앞에 도착했다. 그레이스는 짧은 한숨과 함께 샐리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괜찮다면, 내가 괜찮다고 하기 전엔 누구도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해 줘요. 샐리도, 꼭 필요한 일 아니면 부르지 말고요.”

“……마님.”

“……미안해요.”

힘없는 목소리로 샐리에게 당부와 사과를 건넨 그레이스는 침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샐리는 닫힌 침실 문을 잠깐 응시하다, 곧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또한 파티에 따라갔지만, 파티장에 들어가진 못했던 탓에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들은 말로 그레이스가 이전의 마님들처럼 ‘헛것’을 보고 들어서 쓰러졌고, 그로 인해 두 부부가 언쟁을 나눴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두 분의 사이가 이리된 것은 그 일과 관련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샐리는 답답함에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 저주는 피해 가지 못하는 걸까.’

처음으로 공작님께서 마음을 여시고, 또 공작님께 마음을 열어 주신 분인데. 대체 제 주인이 무슨 잘못을 그리 크게 했다고 이리 질기고 잔인한 저주가 붙은 걸까.

샐리는 신을 원망하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 * *

그렇게 침실에 틀어박힌 그레이스가 다시 방 밖으로 나온 것은 꼬박 하루하고 한나절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그레이스는 아프다는 핑계로 레온의 방문도 거절하며 길고 긴 고민에 빠져들었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나름대로 답을 내린 그레이스는 어둠이 깊게 내려앉아 모두가 잠이 든 이 시간에 홀로 방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이 저택에 처음 왔을 때와 같은 수수한 드레스에 두꺼운 코트만을 걸친 그녀는 조용한 복도를 지나쳤다. 혹여 누가 자신을 볼 새라 연신 주변을 살피며 계단을 지나 정원으로 온 그레이스는 코트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눈 덮인 길을 지났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레이스는 저택에서 깊고 넓은 숲으로 향하는 쪽문 앞에 도착했다.

낡고 위험해서 사실상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탓에 근위병조차 지키지 않아서 주변은 그녀의 숨소리조차 거슬릴 정도로 조용했다.

그레이스는 그 낡고 허름한 문에서 생각이 잠긴 얼굴로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지금 어딜 가려는 겁니까!”

그때 그런 그녀의 손을 누군가가 거칠게 붙잡았다.

그 강한 힘에 돌아선 그레이스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당연하게도 아서였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손목을 아프도록 꼭 쥔 채 노려보는 아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아서가 그녀를 향해 다그치듯 소리쳤다.

“이 늦은 시간에, 대체 어딜 가는 거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까!”

“…….”

“대답하세요!”

그러나 아서의 매서운 다그침에도 그레이스는 별말 없이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그 시선처럼 무심하고 태연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말했다.

“글쎄요. 사람들 몰래 급히 야반도주하는 사람이 행선지를 정하고 도망치나요?”

그러자 아서의 표정이 멍해지더니, 곧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 충격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던 듯 그는 그녀의 손목을 쥔 손을 덜덜 떨며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야반도주하시겠다고요?”

“네. 그렇게 말했어요.”

“……그 말은, 지금 날 떠나겠다는 겁니까? 이렇게? 이런 식으로?”

또다시 태연하게 터져 나온 그레이스의 대답에 아서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레이스는 상처 받은 시선으로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아서의 눈을 애써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또다시 상처 입은 그의 모습에 가슴이 꽉 조이듯 아파 왔지만, 그녀는 물러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아릿하게 퍼지는 가슴의 고통을 억누르듯 잠깐 아랫입술을 깨문 후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를 향해 말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나도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뭘 말입니까.”

“공작님께서는 왜 날 붙잡으시는 거예요?”

“……예?”

“서로 몰랐던 것처럼 살자면서요. 이제 서로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일 같은 건 절대로 없다고도 하셨죠. ……그렇게 살 거면, 굳이 우리가 한 저택에서 살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내가 이 저택을 나가 사는 편이 빠르지 않겠어요?”

“……!”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 말을 들은 아서의 푸르고 붉은 오드아이는 격렬하게 요동쳤다.

아서는 여전히 자신을 무심한 목소리로 시선으로 대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마음이 검으로 관통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녀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자신의 처지로 감히 그녀를 막아 세울 권리 또한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아서는 그녀의 손목을 더욱 꽉 붙잡으며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안 됩니다.”

“왜요?”

“……제발…….”

“그럼 그냥 이렇게 평생, 늙어 죽을 때까지 시선도 말도 마주치길 피하면서 살자고요? 어떻게 그래요? 공작님께선 그러실 수 있어요? 나는 싫어요. 그렇겐 못 하겠어요.”

“나는! ……나는 부인께서 그저 내가 보이는 거리에서 무사히 살아서 행복하게 웃어 주신다면, 그래주신다면 나는 평생 당신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도 살 수 있습니다.”

“공작님.”

“……물론 어떤 날은 가끔 당신과 가볍게 산책하던 날, 그리고 파티장에서 춤을 추며 대화를 나누던 그때의 기억에 가슴이 사무칠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죽거나 미쳐 버려서 영영 볼 수 없게 되는 것보다는 백번 천번 나으니까요!”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마치 마지막 희망의 끈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레이스의 손을 잡고 소리치는 아서의 목소리는 더없이 애절했다.

고개를 돌려 제 시선을 피하며 되묻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아서는 그녀와 어떻게든 시선을 맞추려 애쓰며 말했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나는 다 감수할 수 있습니다. 애가 타고 마음이 문드러진다 해도 좋습니다. ……내가 괜찮다는데, 감수하겠다는데 왜 그럴 수 없다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두고 볼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그렇죠!”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던 그레이스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