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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21화 (21/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21화

온몸이 따뜻한 물에 잠긴 듯 편안한 기분이었다.

아니, 꼭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에 얇은 이불을 덮고 있는 듯한 기분 같기도 했다.

그 편안하고 안락한 기분을 만끽하며 잠에 빠져 있던 그레이스는 자신의 뺨을 누군가가 다정히 쓰다듬는 감촉에 슬며시 실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바로 앞에 입가를 제외하고는 얼굴을 검은 가면으로 덮은 아서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야!’

그 순간 그레이스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줄곧 자신을 내려다보던 아서와 눈이 마주쳤다. 아서는 그 순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정신이 드십니까.”

“……아, 네. 그런데 여기는…….”

“마차 안입니다. 부인께서 갑자기 쓰러지시는 바람에,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아, 참. 그랬죠…….”

그레이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맞아, 그랬었다. 파티장 안에서 또다시 그 기괴한 목소리를 듣고, 끔찍한 고통과 공포에 그만 정신을 잃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또다시 소름이 돋는 것 같아 그레이스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 목소리. 그 끔찍한 목소리가 들리는 게 바로 내게 내린 ‘저주’일까?’

그렇다면, 자신 또한 이전의 그녀들처럼 1년 안에 진짜로 죽거나 미치게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잠시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또다시 그녀를 덮쳐 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저택에 있을 때 미친 척하며 제 살길이나 모색할 걸 그랬다.

그런 후회를 하며 그레이스가 점점 움츠러들던 그때였다.

“그럼 부인께서 깨어나셨으니 나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온몸을 떠는 그레이스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서가 슬며시 몸을 일으키더니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지금 자신은 무서워 죽겠는데, 그런 자신을 혼자 내벼려 두고 어딜 가겠다는 걸까. 당장이라도 자신을 홀로 두고 나가 버릴 것 같은 아서의 모습에 그레이스가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잡아채며 말했다.

“어, 어디 가시게요?”

“네. 나갈 겁니다.”

“어딜요? 어디로요? 파, 파티는 이제 끝난 거 아니에요?”

그레이스는 간절한 시선으로 그에게 매달리듯 물었다. 아서는 그 모습에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대답했다.

“부인께서 말하신 대로 파티는 끝났습니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나가시는 거예요? 가, 같이 이 마차를 타고 가야죠.”

“저는 마차에서 내려 말을 타고자 합니다.”

“……왜, 왜요?”

“……부인.”

“그, 그냥 같이 마차를 타고 가면 안 되나요? 지금 저 혼자 있기 무서운데…….”

기어코 자신을 두고 나가려는 듯한 아서를, 그레이스는 머뭇거리며 붙잡았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잔뜩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와는 달리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아서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제게서 떼어 내고서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네? 왜요?”

“그리고 이제 앞으로 다시는 부인과 단둘이 있지 않으려 합니다. ……이리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겁니다.”

“……뭐라고요?”

계속해서 쏟아지는 아서의 매정한 말에 그레이스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걸까. 그레이스는 다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지만 아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로 자신을 붙잡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황당함과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이대로 그를 보내면 정말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 또한 느꼈다.

그레이스는 다급히 아서의 손을 단단히 붙잡으며 소리쳤다.

“대체 왜요? 무엇 때문에요?”

“이유는 부인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뇨? 전 모르겠어요.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부인.”

“싫어요! 놓으라고 할 거죠?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기 전엔 안 놓을 거예요!”

자신을 놓으라 종용하는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흔들며 저항했다. 그러자 아서가 괴롭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더니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왜 안 놓겠다는 거죠? 그 이유가 뭡니까?”

“……네?”

“저주받은 괴물이 알아서 떨어져 주겠다는데 왜 싫다는 겁니까? 오히려 매달리고, 애정을 구걸하면 그것이 더 곤란한 거 아닙니까?”

그녀의 태도에 답답하고 분통이 터져 견딜 수 없다는 듯 아서는 매섭게 소리치며 그레이스를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레이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줄곧 무뚝뚝하긴 했지만 다정했던 그였는데, 이렇게 화가 나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무섭고 두려워서 피하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그를 잡은 손을 놓기가 싫었다.

그 정체 모를 감정에 스스로도 혼란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레이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아서를 향해 대답했다.

“……몰라요. 모르겠어요.”

“하. 모르겠다고요?

“그래도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요. 내 마음이 당신을 놓기 싫은데 어떡해요.”

그레이스는 울먹이며 겨우 대답을 마쳤다.

그러자 아서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제기랄!”

외마디 욕설을 내뱉고는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자신의 품으로 꽉 끌어당겨 안았다.

3. 고백

그 모습에 놀란 그레이스가 반사적으로 다가오는 그를 막듯 손을 올렸지만, 아서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더 세게 그녀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자신을 막는 그레이스의 손을 잡아 제 가슴께에 가져다 대더니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느껴지십니까? 부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괴물의 심장이 어떻게 미쳐 날뛰는지?”

“……!”

“분명 그날 밤, 나는 부인께 경고했습니다. 부인의 그런 친절은 갈증으로 죽어 가는 자에게 바닷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경고했는데, 왜 자꾸 나에게 다정하게 대하십니까? 나 같은 괴물에게 왜 웃어 주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멀어지지 말라 붙잡으시는 거냔 말입니다!”

“……공작님.”

거칠게 소리치는 목소리와는 달리 그레이스의 손목을 잡고 있는 아서의 손은 한없이 연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아서는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격정적인 감정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무뚝뚝한 얼굴로 밀어내기 바빴으면서,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눈이로군요.”

“…….”

“아십니까? 사실 나는 처음부터 부인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하지만 아닌 척, 보지 않는 척하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부인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내린 저주를 무서워하고 나와 닮은 레온을 무시할 그런 수준의 사람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부인께선 그 아이에게 귀엽다고 말하며 미소 짓고 쓰다듬어 주었죠. 내게도 생일을 묻기까지 했고요.”

“……아, 그때…….”

“그런 다정한 부인의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갔습니다. 매일같이 집무를 처리한다는 핑계로 집무실에 틀어박혀서는 창밖만 살피며 부인께서 언제쯤 산책을 나오실까 기다렸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눈은 창밖의 당신을 좇고 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단 말입니다.”

어느새 맥이 빠진 목소리로 끊임없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잇는 아서의 얼굴에는 참담함만이 가득했다.

그레이스는 잡고 있던 자신의 손목마저 맥없이 놓아 버리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그의 슬픈 모습에 무슨 말이든 해서 위로를 건네고 싶은데 혀는 굳어 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서는 그런 그녀의 빤히 바라보며 여전히 웃는 듯 우는 얼굴로 제 감정을 토로했다.

“욕심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나 같은 괴물 따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갖고 싶지 않다고. 나는 당신을 원하는 게 아니라 긴 외로움에 지쳐 착각하는 것뿐이라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그랬는데, 도무지 멈춰지지가 않습니다. 참고 억누를수록 하루가 다르게 당신을 향한 마음이 커지기만 합니다.”

“……나를 향한, 마음…….”

“……이제 어느 정도 눈치채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나는 당신이 좋아졌습니다. 감히 사랑을 탐내서도, 욕심내서도 안 되는 괴물인 주제에 당신을 마음에 담았단 말입니다.”

“……!”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래서 차가운 척은 혼자 다 하며 당신을 밀어냈는데. 그런데 고작 당신의 별것 아닌 말과 행동에도 이리 쉽게 마음이 움직여 버리는 내 모습이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

“……나는 이런 내가 참으로 한심하고 또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조하듯 감정을 토로하는 아서의 눈에서 툭,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그를 시작으로 그의 푸르고 붉은 오드아이에서는 범람한 강처럼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레이스는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 내는 그의 가면 쓴 얼굴을 보자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리면서도 아프게 구겨지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저 눈물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손을 뻗자 아서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은 아서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죽을 만큼 노력해서 당신에게서 도망칠 작정입니다.”

단호한 그의 말을 들은 순간 그레이스는 조금 전까지 아프게 두근거리던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레이스는 이제 자신과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물었다.

“……어째서, 말이 그렇게 되나요? 왜 공작님이 내게서 도망쳐야 하는데요?”

“그럼 나더러 이대로 부인께서 죽거나 미치도록 두란 말입니까?”

“……!”

“내가 부인에게서 멀어지지 않으면 저주는 점점 강해질 테고, 그땐 오늘처럼 단순히 쓰러졌다 깨어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부인께서는 나더러 당신이 점점 죽거나 미쳐 가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보란 말입니까?”

“……그럼요? 어떻게 도망치실 작정이신데요? ……날 버리기라도 하려고요?”

어떻게든 자신에게서 멀어지려는 마음이 진심인 듯 조금 전부터 아서는 그레이스와 단 한 번도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가슴이 죄일 만큼 답답해서 어느새 언성이 높아진 그레이스가 소리치자, 그 말을 들은 아서가 또다시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대답했다.

“감히 나 따위가, 당신을 버릴 수 있으리라 봅니까?”

“그럼요? 어떡하자고요?”

“그날 밤 당신과 대화를 나누기 이전으로, 내가 당신의 다정함을 몰랐던 그때처럼 그렇게 살자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서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그레이스의 손을 매정하게 떼어 냈다.

그레이스는 조금 전 제게 열정적으로 고백하던 모습은 전부 거짓말인 양 차갑게 몸을 돌려 마차 문을 열고 나가는 아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마지막까지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서.”

그 말을 끝으로 아서는 거칠게 마차 문을 닫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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