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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18화 (18/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8화

[―――려야 합니다.]

“……!”

[――을 ――위해서는 ――자의 ――가 필요합니다. ――아주 많이, 온몸을 푹 적실 만큼.]

그러더니 꼭 벌레가 귓속을 기어가는 듯한 소리에 섞여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그레이스가 처음 들어 보는 자의 것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음습하고, 불쾌하고, 징그러운. 자꾸만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듯한 그 목소리는 그레이스의 귓가에서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죽어야만 합니다, 펠릭스 공작가의 신부는. 전부, 다. ――때까지 말이죠.]

“……!”

그리고 들려온 섬뜩한 목소리와 이어진 웃음소리에 그레이스는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죽어야 한다니, 왜. 어째서. 대체 당신은 누구기에,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그레이스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게 소리쳤지만 들려오는 것은 날카로운 웃음소리뿐이었다.

그 소리에 그레이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사슬처럼 자신의 온몸을 묶고, 목을 죄어 오는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두려움에 떨며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마치 누군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싫어. 무서워. 두려워. 다시 죽을 수는 없어. 누군가, 누군가 날 좀……!’

제발 누군가 이 소리를 멈춰 줘.

그레이스가 마음속으로 그렇게 빌고 있던 그때였다.

“멈춰 주십시오, 앨버튼 공작.”

“……!”

갑자기 성서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손이 들리더니 온갖 섬뜩하고 징그러운 소리가 멈췄다. 그러더니 조용해진 그레이스의 귓가에 낮게 가라앉은 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서가 성서 위에 올라가 있던 그와 자신의 손을 떼어 내고, 의식을 멈춘 것이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진 끔찍한 소음과 되돌아온 의식에 그레이스는 멍한 눈으로 주변 풍경을 살폈다. 조금 전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그레이스는 그제야 멈추었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대체 뭐였어? 그건. ……설마 이게 그 저주인 걸까?’

그레이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눈으로 주문을 외는 것을 멈춘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앨버튼 공작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채 여전히 남은 두려움에 떠는 그레이스를 흘긋 보고는 곧 그 곁에 선 아서를 향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펠릭스 공작! 축복의 의식을 멈추다니요.”

아서가 앨버튼 공작을 마주 노려보며 대꾸했다.

“앨버튼 공작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제 안사람이 이리 떨고 있잖습니까.”

그 말과 함께 아서는 그레이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레이스는 식은땀으로 젖은 자신의 손을 망설임 없이 꼭 맞잡는 그의 모습에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아서는 오히려 그런 그녀의 손을 더욱 꽉 붙잡았다.

그러더니 그는 황좌에 앉아 묘한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를 향해 말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아무래도 축복의 의식은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어째서?”

황제의 물음에 아서는 그레이스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이맘때쯤 펠릭스 성은 혹독한 추위로 인해 감기가 유행하지요. 그래서 성 사람들에게 늘 몸을 따뜻하게 하라 일러두었는데, 주의가 부족했던 건지 레온이 그만 지독한 감기에 걸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 레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그래서 레온을 데려오지 못한 건가?”

“예. 오늘 오전까지도 레온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도저히 오늘 파티에서는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음. 상황은 알겠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의 의식과 무슨 관계가 있지?”

“그런 레온을 이 사람이 간병을 했는데, 아무래도 이 사람이 그러다 감기에 옮은 것 같습니다.”

걱정스러운 듯한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내려다보는 아서의 말에 황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오, 저런. 그래서 펠릭스 공작 부인이 자꾸만 식은땀을 흘렸던 거로군.”

“네. 오전까지는 증세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수도에 오면서 체력을 소모해서 그런지 열이 좀 오른 것 같습니다.”

아서가 대답하자 황제는 의심 섞인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살폈다.

그레이스는 황제의 시선이 제게 머무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어지러운 척 옆에 선 아서에게 기댔다. 그러자 황제가 침음 소리를 내더니 곧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렇군. 확실히 짐이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는 않아 보이는군. 펠릭스 공작, 당장 황의를 데려오도록 할까?”

“황의를 부를 정도는 아닙니다. 회복약을 먹이고 좀 쉬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다행이로군. 짐은 또 이 파티의 당사자가 첫 번째 춤도 추지 않고 돌아가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건 아닐까 염려했지 뭔가.”

황제는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그레이스를 흘긋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레이스는 그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관습상 파티의 주인공이 첫 번째 춤도 추지 않고 돌아간다는 것은 그 주최자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무례였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슬쩍 눈치를 주자, 아서는 걱정 말라는 듯 그녀에게 눈으로 대답하고는 황제를 향해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일은 힘들겠지만, 첫 번째 춤을 추지 못할 만큼 위중하진 않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그럼 의식은 이쯤에서 중지하도록 하지.”

“배려 감사합니다, 폐하.”

아서는 황제의 배려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를 따라 그레이스 또한 드레스 자락의 끝을 쥐고 허리를 굽히자 황제는 그런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알겠다. 그럼 펠릭스 공작 부인은 약을 먹고 좀 쉬고 있게. 부인이 준비되면 다시 무도회를 재개하도록 하지. 펠릭스 공작, 새 신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도 좋다. 앨버튼 공작, 의식은 여기서 멈추도록 하지.”

“예, 폐하.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알겠습니다.”

황제의 말에 아서와 그레이스는 기다렸다는 듯 물러났다.

그러자 앨버튼 공작 또한 불만스러운 표정이긴 했지만 곧 묵묵히 예를 표한 후 조금 전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 상황이 마무리되자, 황제는 가볍게 두 번 박수를 치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이제 지루한 의식은 끝났네! 모두 새 신부가 잠깐 쉴 동안 충분히 먹고 마시며 체력을 보충하도록 하지! 오늘 짐은 해가 뜰 때까지 자네들을 저택으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거든!”

황제의 외침에 지금껏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황족들과 귀족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파티장 안은 다시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졌고, 악단은 내려놓았던 악기를 들고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그 틈을 타 아서와 함께 비교적 사람이 없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겨우 한고비 넘긴 기분에 안도감이 든 그레이스가 손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고 있자, 아서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더니 그녀를 향해 말했다.

“또다시 말을 맞춰 줘서 고맙습니다. 나는 부인의 앞에서 늘 거짓말만 하게 되는군요.”

“천만에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절 신경 써서 그렇게 거짓말하신 거잖아요.”

“몸은 좀 어떻습니까? 식은땀이 멈추지 않는 것 같은데……. 아직도 많이 아픈 거라면 첫 번째 춤도 추지 않는 게…….”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닦는 그레이스가 걱정되는지, 연신 그녀를 주시하던 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말에 그레이스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은 뒤 대답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죠. 황제께서 친히 베푸시는 파티에서 멋대로 축복의 의식을 중단한 것도 큰 무례인데, 첫 번째 춤마저 추지 않겠다 할 수는 없잖아요.”

“정말 괜찮습니까? 역시 진찰을 받아보는 게…….”

“아니요. 전 정말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힘드시면 내게 말해 주셔야 합니다.”

“네. 그럴게요.”

“그럼 여기 계세요. 전 잠시 마차에 상비약을 가지러 갔다 오겠습니다.”

그레이스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 대답을 듣고 안심한 모양인지 아서는 그레이스를 근처 소파에 앉힌 후 파티장 밖으로 나갔다.

“……하아.”

아서가 파티장을 나가고, 그레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웅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전 겪은 일로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고 또 두려웠다. 분명 조금 전 자신이 들은 그 소리는 ‘저주’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에게는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솔직하게 그에게 터놓고 지금이라도 그와 거리를 두는 게 내겐 더 좋은 방법인 걸 아는데……. 왜 입이 떨어지지 않을까?’

그게 자신에게는 더 좋다는 걸 알면서도 그레이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차피 당신은 죽든, 미치든, 혹은 그 전에 죽고 미치기 싫어서 날 떠나든, 어찌 되었든 나와 이별할 사람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죽거나 미치는 건 더더욱 싫고요.’

‘난 무섭습니다.’

그날 밤, 자신을 경계하며 날 선 소리를 내뱉던 아서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과거 수없이 받은 마음의 상처로 약간의 호의마저 내쳐 버리고 마는 그 모습을 또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대체 이 감정은 뭘까? ……동정일까?’

그런데, 동정이 이리 강렬한 감정이었던가?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려움으로 벌벌 떨리는 제 손을 애써 말아 쥐었다.

이렇게 두려우면서도 솔직히 그에게 말하고 거리를 두지 못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양심상 아서에게 털어놓는 것이 맞지만,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가 채 준비도 되기 전 이 저택에서 쫓겨나는 것이 무서웠고 또 이상하게 그에게 미움받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레이스는 이 두려운 마음이 혹여 그의 미움을 받아 자신마저 저주를 받아 죽거나 미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스스로 납득했다.

아버지, 앨버튼 공작이 만약 그에게 저주를 건 것이 맞다면 그의 원망은 당연히 가장 먼저 자신을 향해 돌아올 테고, 그럼 그 저주의 여파가 자신에게도 향할 것이 뻔해 보였으니까.

‘……미안해요. 아직은 당신보다 내가 더 소중해.’

그레이스는 끝없는 죄책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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