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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17화 (17/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7화

대체 그 며칠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제 말에 바들바들 떨던 심약하고 멍청한 동생이 이리 용감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마리안느는 더욱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며 말했다.

“어리석구나, 그레이스. 잊었니? 펠릭스 공작의 저주를 이겨 낸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 너라고 그 괴물 같은 오드아이에 담긴 저주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니? 게다가 공작 하나도 아니고, 그 동생의 몫까지. 저주가 두 배잖아?”

“못 이겨 낼 건 또 뭔가요?”

“……뭐?”

“그 붉고 푸른 눈을 보면 그 순간 당장 타 죽거나 익사하게 되기라도 하나요?”

“너……!”

“난 오히려 왜 사람들이 그리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어요. 정작 난 아무렇지 않은데 말이에요.”

그레이스는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안느에게 뻔뻔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대로 정말로 두렵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그 저주를 이용해 자유로워질 거니까.

그레이스는 비단 마리안느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두가 들으라는 듯 일부러 언성을 높여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안느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바들바들 입꼬리를 떨며 말했다.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미안하지만 지금의 난 지극히 정상이에요.”

그레이스는 경악한 얼굴로 제게 손가락질하는 마리안느에게 더욱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이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더 이상 그따위 도발에는 상처받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미 당신들에 의해 죽음까지 한 번 겪었던 나야. 새삼 두려울 것이 있겠어?’

그래. 더 이상 자신에게는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레이스는 어느새 자신과 마리안느를 둘러싼 채 묘한 눈빛과 귓속말을 주고받는 황족들과 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길 좀 터 주시겠어요? 오랜만에 언니와 진지하게 대화를 좀 나눴더니 깨끗한 바람을 좀 쐬고 싶네요.”

그 말에 황족들과 귀족들이 속닥거리더니 곧 그레이스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터 주었다.

그레이스는 웃으며 그들을 지나치며 점찍어 두었던 테라스를 향해 걸어갔다. 드디어 해방이었다. 이제 아서가 돌아올 때까진 온전히 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그레이스는 슬며시 콧노래를 부르며 귀족들을 지나치다 그만 한 남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그레이스는 슬쩍 인상을 쓰며 자신과 부딪힌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드러낸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쓴 채 붉은 제복을 입은 그 남자는 어째서인지 계속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그녀의 앞을 막고 있었다.

‘뭐지, 시비를 걸려고 이러는 건가?’

그레이스는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 남자를 향해 살짝 삐딱한 어투로 말했다.

“저, 죄송하지만 이만 비켜 주시겠어요?”

“……아! 죄송합니다. 레이디.”

“천만에요.”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듯, 남자는 순순히 그레이스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그레이스는 그를 향해 짧게 목례한 후 유유히 그를 지나쳤다. 그가 자신의 뒷모습을 줄곧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 * *

제게 쏠리는 시선을 무시하며 그레이스는 유유히 사람들을 지나쳤다.

그녀에게 길을 터 주는 사람마다 뭐라 한 마디씩 거들고 싶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지금 그레이스에게 그들을 상대할 정신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아서가 다시 돌아와 황제를 알현하기 전까지 잠깐이라도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굳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지나치던 그레이스는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는 손길에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어딜 가십니까, 부인.”

다행히도 그레이스를 붙잡은 것은 아서였다.

그레이스는 어째서인지 빤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서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짧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아, 봤어요?”

“……미안합니다.”

역시 조금 전 자신과 마리안느가 신경전을 벌인 것을 본 모양이었다.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제게 사과를 건네는 아서에게 물었다.

“왜 사과를 하세요?”

“……내가 자리를 비우지 않아서 그런 말을 들으신 것 같아, 그만.”

“괜찮아요. 그런 거 아니에요. 이제 와서 새삼 언니의 그런 말에 상처받지 않아요. ……그리고.”

“……?”

“봤잖아요? 결국은 내가 이겼어요.”

그러니 걱정은 말라 덧붙이며, 그레이스는 일부러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 모습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아서가 그녀를 향해 마주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부인께서 이기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 말입니다.”

“……!”

“대단하십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그 순간 그레이스는 아서의 웃는 얼굴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처음이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이토록 다정하게 웃어 보이는 것은.

이상하게도 볼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는 것이, 아무래도 처음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을 봐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레이스는 아서의 말에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웃고 있던 아서의 입매가 다시 어색하게 굳어지던 그때였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시지요!”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의 외침과 동시에 순식간에 파티장 안이 고요해졌다. 서로 마주 보고 있던 아서와 그레이스 또한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금관을 쓰고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망토를 길게 늘어뜨린 초로의 황제가 그녀의 아버지인 앨버튼 공작과 그 외 여러 명의 가신을 거느리며 걸어왔다.

그레이스는 굳은 표정으로 제 아버지 앨버튼 공작과 그 앞을 걸어가는 황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미 나이가 예순에 가까워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황제는 눈매가 날카롭고 이마와 입가에는 주름이 깊게 패 있어 거만하고 고집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그레이스는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파티장 가장 높은 단상 위 황좌로 오르는 황제와 그 곁에 선 앨버튼 공작을 눈으로 좇았다.

황제는 느린 몸짓으로 황좌에 앉더니 날카로운 시선으로 제 발아래 모인 황족들과 귀족들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다행히 모두 참석한 모양이군.”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감히 폐하께서 베푸시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귀족이 있을 리 없지요.”

“그건 그렇고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펠릭스 공작과 그의 새 신부는 어디에 있지?”

마치 아첨하듯 곁에서 말을 거드는 앨버튼 공작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황제는 그레이스와 아서를 찾았다.

그 말에 황족들과 귀족들은 황제가 앉은 황좌에서 아서와 그레이스가 보이도록 일시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아서는 슬쩍 제 곁에 선 그레이스를 한 번 내려다본 후 황제를 향해 고했다.

“여기 있습니다, 폐하.”

“두 사람은 이리 가까이 오라.”

황제는 두 사람에게 가까이 올 것을 명했다.

그레이스는 에스코트를 위해 아서가 제게 내민 팔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린 후 그와 함께 황제가 앉은 황좌 앞으로 나아갔다.

고작 단 몇 발짝 정도의 거리인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는 것이 무거울 만큼 주변의 분위기는 무겁고 고요했다.

황좌 앞에 도착한 아서와 그레이스는 자신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그를 향해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신 아서 펠릭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레이스 펠릭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라.”

두 사람의 인사를 받은 황제가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명했다.

그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아서를 따라 고개를 들다,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눈 맞춤에 그레이스가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황제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말했다.

“아서, 아무래도 이번 신부는 부끄럼을 많이 타는 듯하군.”

“예, 그러니 너무 짓궂은 말은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

“하하! 아직 정식으로 축복 선언도 받기 전인데, 벌써부터 그리 살뜰히 챙기는 것인가? 아무래도 이번에는 짐이 중매를 잘 선 모양이군.”

아서의 대답하게 재밌다는 듯 웃던 황제는 더욱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의 곁에 선 그레이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레이스는 그 따가운 시선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첫 번째 생에서 자신을 죽게 한 원인을 제공해서도, 만인지상인 황제에게 밉보여 또다시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황제의 시선이 필요 이상으로 집요한 것 같아서였다.

‘……꼭 먹잇감을 앞에 둔 뱀처럼.’

그레이스는 이유 모를 두려움에 떨며 매달리듯 아서의 팔을 꼭 쥐었다.

“하하하! 이리 열렬한 두 사람에게 한시라도 빨리 축복을 내려 줘야 할 것 같군. 앨버튼 공작! 어서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게! 이왕이면 얼른 후계자가 생기는 축복도 내려 주면 좋을 듯하네!”

“알겠습니다, 폐하. 당장 거행하겠습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제 곁에 선 앨버튼 공작에게 소리쳤다.

그 부름에, 황제의 곁에서 줄곧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서 있던 앨버튼 공작이 황제를 향해 몸을 굽혔다. 그러더니 곧 천천히 황좌가 있는 단상을 내려 와 아서와 그레이스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레이스는 점점 가까워지는 제 아버지 앨버튼 공작의 모습에 슬쩍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경계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그러자 앨버튼 공작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이스를 마주 바라보았다. 도무지 아버지와 딸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차갑고 무심한 시선이 서로를 오갔다.

그러던 중 먼저 시선을 돌려 버린 것은 앨버튼 공작이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허공에 손을 휘젓더니 한 권의 책을 소환해 냈다.

축복의 성서였다. 앨버튼 공작은 아서와 그레이스의 앞에 그 책을 띄운 후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아서 펠릭스 공작, 그리고 그레이스 펠릭스 공작 부인은 축복의 성서 위에 손을 올리시오.”

그 말에 먼저 아서가 책 위로 손을 올렸고, 그레이스 또한 그 위로 손을 포개 올렸다.

앨버튼 공작은 두 사람이 손이 성서 위에 올라간 것을 확인하고는 선언하듯 소리쳤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제국의 대마법사 이 피츠제럴드 앨버튼이 그대들에게 축복을 내리겠소.”

그 후 경건하게 두 손을 들어 올린 앨버튼 공작은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간간이 들리는, 어릴 적 배웠던 마법 언어의 단어들에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

‘어……?’ 그런데 축복의 주문이 이어질수록, 그레이스는 점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분명 들리는 것은 축복의 뜻이 담긴 마법 언어인데, 그 주문이 내뿜어 내는 마법의 기운 또한 정결한 것인데.

이상하게 자꾸만 정신이 멍해졌고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꼭 누군가가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각을 닫아 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통째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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