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0화
한동안의 침묵 끝에 샐리가 주저하듯 말했다.
“……그분들께서 언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자세한 날짜나 사소한 사건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네. 샐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하나도 숨김없이 기억나는 대로 말해 주면 고맙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하문하셔요.”
“그럼 샐리, 그 레이디들이 공작님과 결혼이나 약혼을 하고 언제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어요?”
어떤 것부터 물어야 할까.
고민하던 그레이스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묻자 샐리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돌아가신 분들의 시기는 제각각이라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그 외 살아남으신 분들이 미치신 것은 대체로 빠르면 일주일, 늦으면 한 달 정도 후부터 좀……, 이상해지기 시작하셨죠.”
“그래요? 그럼 혹시 어떻게 이상해지기 시작했는지도 말해 줄 수 있어요?”
“……글쎄요. 레이디들마다 모두 다른 증상이 나타나셔서 공통적으로 어떻다고 말씀드리긴 어렵네요. 엘렉트라 님께서는 결혼 후 2주 후부터 갑자기 침실에서 헛것이 보인다고 하셨고, 비앙카 님께서는 갑자기 모든 물과 음식에서 비릿한 맛이 난다며 신경질을 부리셨죠. 그리고 레이나 님께서는 자꾸만 몸에 옴이 오른 것 같다고 자꾸만 온몸을 긁으셨어요.”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인가요?”
“네. 제가 보기엔 침실에는 엘렉트라 님 혼자 계셨고, 물과 음식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거든요. 진드기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고요.”
“그럼 다 헛것을 보고, 듣고, 만진 거네요.”
모두가 공통적인 증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구나.
샐리의 말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나마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감각의 이상이라는 것뿐. 그렇다면 그런 증상을 야기한 것은 정말 아서 펠릭스 공작에게 붙은 ‘저주’ 때문일까.
그레이스는 생각에 잠겨 살짝 인상을 쓰며 샐리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레이디들이 만난 사람들은 어땠나요?”
“만난 사람이라니요?”
“레이디들이 이상 증세를 보인 게, 꼭 공작님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공작님의 정적 중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해코지를 한 걸 수도 있잖아요. 그 레이디들을 모두 알고 있는 지인이라든가, 레이디들이 공통적으로 만난 사람이라거나. 뭐 그런 사람은 없었나요?”
“……음. 엘렉트라 님께서는 로이엔느 공국에서만 자라다 시집오셔서 이 제국에는 친분이 있으신 분이 거의 없다시피 하셨고, 비앙카 님께서는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정이셔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꺼리셨어요. 그나마 레이나 님이나 카렌 님께선 사교적인 편이셨지만……. 결혼 전부터는 인간관계를 모두 정리하셨다고 해요.”
“……인간관계를 정리했다고요?”
“네. 그래서 결혼 직후에 그분들께서 공통적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성혼 축하 파티에서 뵌 황제 폐하와 황족분들과 황가와 연을 맺은 귀족분들, 그리고 마님의 아버님이신 피츠제럴드 앨버튼 공작님이 전부이겠네요.”
“……아버지요?”
샐리의 입에서 터져 나온 앨버튼 공작의 이름에 그레이스가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샐리가 그레이스의 반응이 새삼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네. 모르셨어요? 앨버튼 가문은 대대로 황족들의 결혼이나 약혼이 성사될 때마다 축복의 마법을 걸기 위해 성혼 파티에 참석해 왔는걸요.”
“……몰랐어요. 전 가문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해요. 샐리도 알다시피, 나는 마법 능력을 타고나지 못해서 가문의 중요한 대소사에선 늘 배제된 채 살아왔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또 말실수를…….”
“아니에요. ……그랬단 말이죠.”
샐리를 사과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 그레이스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샐리의 말을 정리해 보면 이러했다.
지금까지 그녀들이 미쳐 버린 것은 결혼이나 약혼 후 빠르면 일주일, 늦어도 한 달. 그리고 그녀들이 미치기 전 만난 공통적인 사람들은 황제 폐하를 비롯한 황족들과 귀족들과 앨버튼 가문의 가주인 자신의 아버지.
죽거나 미친 증상들이 공통적이지 않고, 만난 사람 중 딱히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도 자신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혹시.’
그레이스는 표정을 굳혔다.
‘설마 아버지가? ……아니야. 누구보다 권력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려는 아버지가 감히 황족의 아내나 약혼자들에게 저주를 걸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정말로 이 모든 일은 아서 펠릭스 공작에게 깃든 저주 때문일까.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또 설명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레온의 일이었다. 그레이스는 또다시 샐리를 향해 물었다.
“……샐리,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선대의 펠릭스 공작 부인, 그러니까 공작님과 레온의 어머님께선 그저 단순히 산욕열로 작고하신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그 일을 가지고 레온까지 저주받았다고 하는 거죠?”
“아. 그것 말인가요?”
그러자 샐리는 쓴웃음을 짓더니, 복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큰 마님께서 현재의 공작님을 출산하실 때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기셨던 것 아시나요?”
“네? 정말요?”
“네. 출산 과정에서 피를 너무 많이 쏟으셔서, 그때도 의사는 소생하기 어려울 것이니 수의를 준비하라고까지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선대 펠릭스 공작, 현 공작님의 아버님께서는 크게 절망하셨죠.”
“……세상에.”
“그런데 마치 기적처럼 사흘 후에 큰 마님께서는 다행히 의식을 되찾고 건강을 회복하셨죠. 그 이후 활발하셨던 성격이 완전히 변하셔서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하시긴 했지만요. 그렇게 십수 년이 흐른 후, 큰 마님께서 또 레온 님을 임신하신 거예요.”
“……아.”
“그 이후는 마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또다시 난산 끝에 큰 마님께서는 결국 돌아가셨죠. 그러자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족들과 귀족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답니다.
‘또다시 아이를 낳으며 큰 고초를 겪다 죽었다지’, ‘그 건강하셨던 분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난산 끝에 죽다니, 저주를 받은 거야’, ‘그렇다면 그 저주를 부린 자는 누굴까’, ‘아마도 그 오드아이를 가진 아이들 때문일 거야’ ……라고요.”
“어떻게 그게 아이 잘못인가요. 아이는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큰 불행을 보면, 그 원인을 찾아내 비난하고 탓하고 싶어 하죠. 하필 두 분 모두 이질적인 오드아이를 갖고 태어나셨으니 남 말하기 좋아하는 귀족들에겐 딱 좋은 먹잇감이었겠죠.”
“……정말, 사람들 참 너무하네요.”
이어진 샐리의 말에 그레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며 함부로 입을 놀린 그들에 대한 원망을 토해 냈다.
그러자 그 말에 덩달아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샐리는 곧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활달한 목소리로 꾸며 말했다.
“뭐, 그래도 마님같이 좋은 분께서 안주인으로 들어오셨으니 괜찮을 거예요. 마님께서 무사히 살아 계셔 주신다면 앞으로는 그 누구도 저주 운운하는 말을 안 하지 않을까요?”
“……그, 그렇겠죠.”
샐리의 말에 그레이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물어 오는 샐리의 말에 살짝 양심의 가책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그 속내를 알 리 없는 샐리는 다정히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궁금한 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셨나요?”
그 질문에 그레이스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어떡하면 좋을까? 계속 물어야 할까. 그러나 그레이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일단 가장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들었으니, 오늘은 이만 물어봐야겠다.’
아직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더 이상 자세히 캐물어봤자 다 기억하지도 못하고, 또 샐리가 수상해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결심하며 그레이스는 말했다.
“네. 어느 정도는요. ……그런데 샐리, 지금 몇 시예요? 좀 배가 고파서.”
“……어머. 세상에. 그러고 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얼른 머리를 틀어 올리고 식사 도와 드릴게요!”
“그렇게 많이 배가 고픈 건 아니니까 천천히 해요.”
배가 고프다는 그레이스의 말에 머리를 틀어 올리는 샐리의 손놀림이 급해졌다.
그레이스는 그런 샐리를 만류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식사 후, 홀로 남게 되면 조금 전 들은 말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생각하며.
2. 성혼 축하 파티
그렇게 시간은 또 잘만 흘러, 어느새 그레이스가 이곳 펠릭스 공작의 성에 온 지도 열흘이 지났다.
정략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했던 걱정이나 비장한 각오가 무색하게, 그레이스는 나름대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단 며칠 만에 레온을 만나고, 밤 산책을 나가던 중 아서와 마주쳐 날이 선 대화를 나눴을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의 생활이 평탄하지는 않겠다 생각했건만, 그것은 헛된 기우였다.
애초부터 공작 부인으로서의 의무 같은 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 했던 아서의 말처럼 정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 덕분에 그레이스는 안채와 정원에서 시간만 죽여 댔다.
그나마 몇 가지 생산적이라고 볼 만한 일이라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탈출 계획을 세우는 일과 하루에 한 번 레온과 함께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탈출 계획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지금, 그녀에게 남은 생산적인 일은 사실상 산책뿐이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간단한 단장을 마치고 정원으로 산책을 나온 그레이스는 찬 공기에 얼어 버린 손끝을 호호 불며 레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수님!”
“레온!”
정원 저편에서 한 건장한 수호 기사와 함께 자신에게 달려오는 레온의 모습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레온에게 달려가 빨갛게 언 두 뺨을 손으로 감싸며 다정히 말했다.
“오늘은 뭘 배웠어?”
“오늘은 수사학을 배웠어요!”
“수사학은 재미있었어?”
“……아니요.”
“왜?”
“……랜트 경께서 숙제를 엄―청 많이 내주셨어요.”
“정말? ……그럼 오늘 산책은 짧게 할까?”
“아, 아니요!? 싫어요! 평소처럼 형수님이랑 산책할래요!”
산책 시간을 줄이자고 하자 붕붕 고개를 흔드는 레온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레온이 더 쓰다듬어 달라는 듯 그레이스의 손바닥으로 제 머리를 꾹꾹 들이밀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그레이스는 마음껏 레온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레온의 뒤에 서 있던 수호 기사, 올리버 경이 살짝 난처한 얼굴로 그레이스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레온을 향해 말했다.
“레온 님, 공작 부인께서 곤란해하십니다.”
“아니에요. 그냥 두세요.”
그러나 그레이스는 만류하는 올리버 경에게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느 귀족들이 그렇듯, 레온의 나이가 되면 ‘귀족답게’ 표정을 감추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만 그레이스는 그 때문에 레온의 어리광을 그만두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레온이 원하는 대로 실컷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만족한 레온이 살짝 머리를 떼자 일어나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이제 좀 걸을까, 레온?”
“네!”
“그럼 미끄러우니까 손잡고 걷자. 자!”
“네! 올리버, 나 형수님이랑 산책할 거니까 잠시 자리 좀 피해 줘.”
“네?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곁에서 볼게요.”
그러자 냉큼 레온은 내민 그레이스의 손을 잡더니, 제 수호 기사인 올리버 경을 물러나게 했다.
그레이스는 올리버 경에게 사과를 건넨 후 간신히 자신의 골반 정도에 오는 작은 레온이 넘어질세라 그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레온이 걷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한 발씩 내디디며 산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