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9화 (9/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9화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집무실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가 부인인 것을 알고 나온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 감사의 인사는 내 입으로 직접 전하고 싶어서요.”

“…….”

“……부인?”

“네, 네? 아, 네…….”

꼭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아서를 바라보고 있던 그레이스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아서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화들짝 놀라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레이스는 생각보다 가까운 위치에 아서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기겁했다.

‘대체 언제 이렇게 거리가 좁혀진 걸까. 혹시 내가 먼저 그에게 이만큼 다가간 걸까?’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양 볼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허둥거리며 그를 향해 말했다.

“아, 아니요. 레온이 가진 그 레드 다이아몬드에 비하면……. 벼, 별것도 아닌걸요.”

“그 녀석에겐 그 레드 다이아몬드만큼 부인께서 주신 그 목걸이도 똑같이 소중할 겁니다.”

“아, 하하. 그, 그런가요? 그것참 기쁜 일이네요. ……내, 내년에는 더 좋은 걸로 선물해 줘야겠네요.”

“……내년에도 말입니까?”

“네, 내년에도요. 아, 그 전에 공작님의 생일은 언제죠? 혹시 공작님의 생일도 레온 공자처럼 겨울인가요?”

오늘따라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아서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스스로도 이상하리만치 들떴다.

그렇게 그와 만난 후 처음으로 부드럽고 길게 이어지던 대화는 어느 순간 아서의 표정이 굳어 버리며 뚝 끊어졌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물음에 대답 없이 어두운 표정을 짓는 아서의 얼굴을 본 순간,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이 바보! 내년은 왜 들먹인 거야?’

눈앞의 이 남자, 아서 펠릭스와 맺어진 여성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거나 미쳐 버린다. 그 저주를 익히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그 저주를 이용해 도망까지 치려고 하는 자신인데. 조금 전 말은 명백히 실언이었다.

그레이스는 순식간에 밀려온 어색함과 민망함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아서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굳이 나까지 챙기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축하받아야 할 날도 아니고요.”

“왜, 왜요?”

조금 전 그 말은 딱히 아서의 생일을 챙겨 주겠다는 마음에서 한 말이 아니라 그냥 대화 중 얼떨결에 내뱉은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서가 딱 잘라 챙기지 말라고 거절하자, 그레이스는 괜히 반발심이 들어 물었다. 아서가 짧게 헛웃음을 짓더니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인의 그런 친절은 갈증으로 죽어 가는 자에게 바닷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그레이스가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는 아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되물었다. 그 말에 아서는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담담히 답했다.

“늘 소외받고 늘 애정에 목말라 있던 자에게 당신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약간의 호의를 베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마 그 호의를 또다시 받기 위해 노력하고, 집착하고, 그러다 결국 그 호의를 주는 대상에게 더 큰 호의를 매달리겠죠.”

“……그래……, 서요?”

“난 무섭습니다. ……부인의 그 별 의미 없을 호의에 내가 멋대로 착각해서 마음이 기울어 버리는 게 말입니다. 어차피 당신은 죽든, 미치든, 혹은 그 전에 죽고 미치기 싫어서 날 떠나든, 어찌 되었든 나와 이별할 사람이니까.”

“……!”

“어린 레온이야 당신이 그렇게 떠나도 자라며 그 상처를 잊게 되겠지만, 나는 다릅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신께서 내게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원하고 기대하다 또 상처받고 싶진 않습니다. ……누군가가 죽거나 미치는 건 더더욱 싫고요.”

더없이 담담하게 뱉어 내는 아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서늘한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레이스는 아서의 말에 박혀 있는 수많은 상처와 외로움, 그리고 그의 통찰력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무심한 듯 차가운 시선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아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제 어깨에 달려 있던 장식을 풀어내고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그레이스의 어깨에 덮어 주며 말했다.

“날씨가 많이 춥군요. 게다가 시간도 많이 늦었습니다. ……그러니 이만 침실로 들어가 잠을 청하세요. 나는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더니 빠르게 말을 내뱉고는 반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채 거절할 새도 없이 받아 버린 그의 망토를 쥔 채, 그레이스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아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말처럼 춥고 시간도 많이 늦었고, 이제 마물이나 맹수로부터 지켜 줄 사람도 없는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에게 자신의 속내를 읽혀 버려 불안한 마음 때문일까, 그의 처지에서 동정심을 느낀 것 때문일까. 그레이스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복잡한 제 마음에 혼란스러웠다.

* * *

채 여며지지 않은 커튼 사이로 따뜻한 겨울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캐노피가 길게 드리워진 침대 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레이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진짜 한숨도 못 잤어.’

전날 밤, 그렇게 정원에서 아서와 헤어진 후 곧장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지만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한 말실수와 아서가 자신을 향해 남기고 간 말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실수였어. 거기서 내년을 언급한 건.’

그레이스는 두 손으로 제 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말은 내뱉지 말았어야 했다. 그 때문에 괜히 아서의 속내를 들어 버려 마음만 찝찝해졌다.

‘……혹시 어쩌면 펠릭스 공작이 이미 내 계획을 눈치채고 경고 차원에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생각해 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대대로 황족들은 앨버튼 가문과의 잦은 혼인으로 마법 능력을 타고나는 사람도 많으니, 그 타고난 마력을 이용해 평범한 사람의 속내쯤 간파하는 일 같은 건 우스운 일일 테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계획을 막아 세우기 전에 ‘미치기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이대로 가면 영영 이 성에서 도망칠 수 없어질지도 모르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레이스는 초조해져 손끝을 물어뜯었다.

“마님, 일어나셨어요?”

그때, 침실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돌려 들려온 샐리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응. 일어났어요, 샐리. 들어와요.”

그러자 침실 문이 열리고 평소처럼 세숫물이 담긴 은 대야와 간단한 아침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밀며 샐리가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 옆에 트레이를 세우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샐리를 향해 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샐리.”

“네, 좋은 아침입니다! 어휴, 오늘은 너무 추워서 손이 다 시리네요.”

“그렇게 추워요?”

“그럼요. 오늘도 산책을 가실 건가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오전에는 말고 오후에 나가시면 어떨까요? 아직은 삭풍이 거세게 불어서 자칫 감기에 걸리실까 걱정이라서요.”

“……그래요, 그럼.”

“자, 그럼 여기 앉으세요. 몸단장을 도와 드릴게요.”

샐리는 빨갛게 언 손끝으로 화장대 앞에 놓인 의자를 빼 주었다.

그레이스가 그 위에 앉자 샐리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물로 세수를 돕고 엉클어진 그녀의 머리를 빗었다. 조금 전 자신이 헤집어 놓아서 끝이 살짝 엉킨 머리를 능숙하게 풀어 내리는 샐리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이윽고 머리를 전부 빗고 끝이 상하지 않게 꽃기름으로 정리하는 샐리를 향해 그레이스가 말을 걸었다.

“샐리는 빗질이 능숙하네요.”

“칭찬 감사해요. 사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이 빗질에는 자신이 있거든요.”

“그래요?”

“네. 공작님의 어머님이셨던 큰 마님의 머리도, 엘렉트라 님이나 그 이후 약혼녀분들의 머리도 다 제가 도맡아서 손질을 도와 드렸답니다. 어휴, 특히 엘렉트라 님은 유행에 아주 민감하셔서 매일 다른 머리 모양을 해 달라고 하시는 통에 제가 혼이 났…….”

“그랬어요?”

“……아이고, 제가 또 말실수를! 죄송합니다. 지금 한 말은 잊어 주세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만 무심코 내뱉은 아서의 이전 아내와 약혼녀들의 이야기에 샐리는 기겁하며 사과했다. 그레이스는 가볍게 웃으며 샐리를 용서하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샐리, 나 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요?”

“네? 얼마든지요.”

“샐리는 그럼 그 레이디 엘렉트라 때부터 줄곧 공작 부인을 전담했었나요?”

“……아, 네. 그렇죠? 펠릭스 공작가에는 시종들과 시녀들이 많지만, 그중에서 공작 부인을 모실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몇 안 되었거든요.”

“……그럼……. 그 레이디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네요?”

그레이스가 샐리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줄곧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샐리가 긴 한숨을 쉬며 쥐고 있던 빗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네. 전부 다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저택 내에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그, 그러면 그 일과 관련해서 말해 줄 수 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레이스의 말에 샐리는 한층 더 근심 어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레이스는 인내심 있게 샐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