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8화
속내를 감춘 포옹을 끝낸 후 그레이스는 얼굴이 밝아진 레온과 샐리가 가져온 차를 나눠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정오가 되자, 레온은 자신을 찾으러 온 기사의 손에 이끌려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레온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연신 뒤를 돌아보며 그레이스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레이스 또한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그 후 거처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해가 질 때까지 조용히 침실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그레이스가 심심해 보였는지 샐리는 책이나 간단한 간식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레이스는 그것들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잘만 흘러, 어느새 어두운 하늘에 뜬 달이 밝게 빛났다.
“안녕히 주무세요, 마님.”
“샐리도요.”
목욕을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레이스의 젖은 머리 손질을 돕던 샐리가 일을 마치고 밤 인사를 건넸다.
그레이스는 침대 위에 앉아 그 인사를 받으며, 불을 끄고 나가는 샐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건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낮에 레온과 있었던 일로 생겨났던 복잡하고 찝찝한 기분이 도무지 가시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아서 펠릭스 공작들과 연을 맺었던 여자들은 어떻게 미쳐 간 걸까? ……나는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미친 척하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건 좀 이기적이지만……. 어떻게 하면 레온과 샐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 정리되지 않는 생각에 그레이스는 벌떡 일어나 침대 뒷부분에 등을 기대앉았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탓에 달빛 한 줄기 내려오지 않는 검은 밤, 멍하니 앉아 허공을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잠도 안 오는데, 혼자 산책이나 할까.”
그래. 산책하는 김에 ‘앞으로의 탈출 계획’이나 그에 도움이 될 만한 비밀통로 같은 것도 찾아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거짓말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레이스는 살금살금 침대를 내려가 옷장에서 두꺼운 코트와 부츠를 꺼내 들었다. 샐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지금, 드레스까지 완벽하게 갈아입고 나설 수는 없으니 두껍고 긴 코트와 편한 부츠로 몸을 가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몸 위에 두꺼운 코트를 걸친 그레이스는 살금살금 침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레이스는 옷깃을 여미며 발소리를 죽여 걸어갔다.
사박사박, 고요한 복도에는 그레이스의 부츠 소리만이 났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온 그레이스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에는 별다른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안심하며 닫힌 문을 밀었다.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부인.”
“……꺅!”
그레이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레이스와 서너 발짝 떨어진 기둥에 기대선 아서의 모습이 보였다.
늘 쓰고 다니는 검은 가면과 망토, 그리고 제복까지. 아무리 봐도 자다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그레이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혹시 절 감시하고 계셨던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집무를 보던 중 발소리가 나서 나와 봤을 뿐입니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딱 맞춰 나타난 그의 모습에 그레이스가 의구심을 품고 묻자, 아서는 단칼에 부정했다.
‘이크, 조용히 한다고 한 거였는데.’
그레이스는 마치 짓궂은 장난을 치려다 들킨 아이처럼 민망해하며 그에게 말했다.
“……제가 시끄럽게 했다면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앞으로는 조용히 다닐게요. 그럼, 쉬세요.”
사과를 건네자 아서에게서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레이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등을 돌려 문을 열었다. 숨이 막히게 어색해서 그런지, 단둘이 있는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그레이스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아서는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조금 전 내 물음에는 답해 주지 않는 겁니까?”
“네?”
“분명 나는 조금 전 이 시간에 어딜 가시는 거냐고 물었을 텐데요.”
“……아. 잠이 안 와서 산책이나 좀 하다 들어가려고요.”
아서의 물음에 그레이스는 문고리를 꽉 잡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기둥에 기대 있던 아서가 등을 떼더니 그레이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놀라며 소리쳤다.
“왜, 왜요?”
“동행하겠습니다.”
“예? 아니, 저 혼자 다녀올 수 있는데요.”
당장 따라나서겠다는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아서가 코웃음을 치더니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도와 달리 펠릭스 성은 밤만 되면 온갖 맹수들과 마물들이 출몰하는 곳입니다.”
“……네?”
“특히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면 먹이가 부족해진 그들이 밤이 되길 기다렸다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잦죠. 물론, 내 저택 안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내 정원에서 깨진 비석들과 망가진 수풀들을 보셨을 텐데요.”
“……그, 그게 다 맹수들이랑 마물들이 한 짓이라고요?”
그레이스가 덜컥 겁이 나 묻자 아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레이스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니, 성안에서도 활개를 칠 정도의 마물이라니. 근위 기사와 수호 기사가 무의미할 만큼 그것들이 강하다는 건가?’
어쩐지 밤에 저택 안을 지키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그래서였던가. 그레이스는 낭패라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그냥 안 나갈게요.”
“조금 전까지 산책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마음이 바뀌었…….”
“내가 부인조차 지키지 못할 만큼 유약해 보입니까? 아니면, 저주받은 괴물 공작과 단둘이 산책을 나가는 게 겁이 납니까?”
아서의 빈정거림에 그레이스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왜 갑자기 말이 그렇게 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레이스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대답했다.
“……참 나. 왜 갑자기 말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공작님, 이제 보니 사람 말을 비꼬아 해석하는 취미가 있으시네요.”
“부인이야말로, 솔직하게 나와 가는 건 싫다고 대답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해 주신다면 당장 수행할 다른 기사를 불러오도록 하죠.”
당장이라도 다른 기사들을 불러올 것 같은 아서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기겁하며 그의 망토 끝을 붙들었다.
보아하니 그는 자신을 수행할 기사 한 명만 불러오는 게 아니라 기사들부터 시종, 시녀들까지 다 불러올 것 같았다.
그래서야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을 수정하기는커녕 괜히 잠이 오지 않는다고 곤히 자는 아랫사람들이나 깨우는, 거만한 공작 부인이라는 평판이 생겨 쓸데없이 이목만 집중될 터였다.
그레이스는 아서의 망토 끝을 꽉 움켜쥐며,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아서를 향해 말했다.
“……아뇨, 됐어요. 다른 사람들까지 전부 깨우는 건 싫으니까요. ……같이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 말에 그제야 아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고는 자연스레 그레이스의 곁으로 걸어갔고, 그레이스는 쥐고 있던 그의 망토 끝을 놓았다.
그러자 나란히 서게 된 그는 그 기묘한 붉고 푸른 눈으로 그레이스를 잠깐 바라보다 곧 먼저 문밖으로 나가 문고리를 쥐고 섰다. 그것이 자신을 따라오라는 뜻 같아, 그레이스는 짧은 한숨과 함께 그 앞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몰래 혼자 하려던 밤 산책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 * *
밤의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 안, 한 발짝 정도 떨어진 채 나란히 걷는 아서와 그레이스 사이에는 기묘한 침묵만이 흘렀다.
그레이스는 눈이 치워진 정원 안길을 걸으며 묵묵히 제 곁에서 걷고 있는 아서를 흘금 바라보았다.
조금 전부터 주변을 둘러보거나 혹은 바닥을 내려다보는 아서의 시선은 마치 그녀를 없는 사람인 양 취급하는 듯 보였다.
‘이럴 거면 왜 함께 나오겠다고 한 거야.’
물론 반대로 그가 자꾸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했을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빨리했다. 얼른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이 어색한 산책을 마치고 싶었다.
“오늘 낮에, 레온에게 생일 선물을 주셨다고요.”
그때, 곁에서 묵묵히 걷고 있던 아서가 갑자기 그레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레이스는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아신 거죠?”
“이 저택에 보는 눈, 듣는 귀가 한둘인 줄 압니까.”
자신의 물음에 아서가 픽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그레이스는 우뚝 몸을 굳혔다. 그 말인즉 자신에게 감시를 붙였다는 건데,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그에게 보고하는 그 사람은 누굴까.
그런 생각에 순간 표정이 굳어 버린 그레이스의 표정을 살피던 아서가 곧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네?”
“여기, 이 탑의 3층이 내 집무실입니다. 그래서 창문만 열면 정원 밖 소리가 전부 들리곤 하죠.”
정원 한쪽에 선 큰 탑을 가리키며 대답하는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쩐지. 그래서 어제도 레온이 울자마자 달려온 거구나.’
그레이스는 스스로 그렇게 납득하고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있다면, 자신이 어느 순간 ‘미친 척’ 연기를 시작할 때 그 어색함을 눈치채거나 할지도 모를 텐데.
다행히 그럴 걱정은 덜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앞으로 중요한 탈출 계획은 이 정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레이스가 또 홀로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레온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친절히 대해 줘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네?”
“부인으로부터 목걸이를 받았다고, 내 집무실로 달려와서 자랑하며 웃는데……. 그렇게 기뻐하는 얼굴은 처음 봤습니다. 그 아이에게 그런 미소를 짓게 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서가 멋쩍은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한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검은 가면 너머 그의 서늘한 오드아이가 어색하게 휘어진 채 자신을 오롯이 담고 있는 것에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 푸르고 붉은 눈 속, 투명하게 비치는 그 눈은 결혼식에서 보았던 그때처럼 강한 마력으로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이상했다.
며칠 사이 그와 꼭 닮아 있는 레온의 오드아이에 익숙해진 탓일까. 줄곧 무섭고, 괴물의 것 같았던 그의 눈이 처음으로 무섭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