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5화
“꼬마야.”
“……네?”
“앞으로 누가 너에게 그렇게 말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 알겠니?”
“……흘려버리라고요?”
“그래. 전부 잊어버려. 그 사람들은 그냥 단순히 화풀이 상대가 필요한 것뿐이야. 그래서 되는 대로 막 지껄……. 아니, 말하는 거야.”
“……하지만…….”
“저주는 신조차 용서하지 못할 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자들에게나 내리는 거야. 너같이 착하고, 귀엽고, 순진한 아이에게 저주가 내렸다니. 누가 그래? 앞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 있으면 다 나에게 데려와. 내가 혼내 줄게.”
“……정말요?”
“그럼! 그리고 쓰다듬는 것도 내가 해 줄게. 내가 매일같이 쓰다듬어 줄게.”
여전히 큰 눈에 눈물을 매단 채 묻는 아이에게 그레이스는 확신하듯 대답했다.
그러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레이스는 쓰고 있는 검은 가면이 살짝 구겨질 만큼 환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에 마주 웃으며 말했다.
“어머, 웃으니까 더 귀엽다. 잘생겼어!”
“……레이디도 예뻐요. 꼭 천사님 같아요.”
“어머, 정말? 고마워. 영광이야.”
마주 웃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아이는 완전히 경계심을 푼 듯 그레이스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귀엽고 살가운 모습에 참을 수 없어진 그레이스는 두 팔을 뻗어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순간 흠칫 놀라던 아이는 곧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작고 마른 팔로 그레이스의 목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레이스는 그런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근처 벤치로 가 앉았다. 그러고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아이의 긴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긴 앞머리로 덮고 있는 거야? 그리고 조금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 가면은 왜 쓰고 있는 거야?”
혹시 가면을 쓰는 것이 펠릭스 성의 유행인 걸까.
예로부터 귀족들이 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바보 같은 패션도 유행이 되는 것을 종종 봐 왔기에, 그레이스는 이 아이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아이의 얼굴 절반을 덮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아!”
그리고 그 순간 드러난 아이의 새파란 오른쪽 눈에 그레이스는 그만 비명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왼쪽의 붉은 눈과 오른쪽의 푸른 눈. 그 사람을 홀리는 마성 깃든 오드아이를, 이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펠릭스 공작.’
불과 어제 자신과 마음 없는 정략결혼을 한 그 남자. 눈앞의 아이는 그 남자와 꼭 닮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바로 ‘괴물 공작’의 ‘저주받은 동생’ 레온 펠릭스 공자…….’
왜 단번에 눈치채지 못한 걸까. 드러난 아이의 왼쪽 붉은 눈은 그의 것과 꼭 같은 것이었는데.
그레이스는 멍청했던 스스로를 비난하며 멍한 눈으로 아이, 레온을 바라보았다.
아이, 레온의 눈은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마치 아서의 눈처럼. 그레이스는 그 기묘한 오드아이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레온이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피더니 곧 그녀의 얼굴에서 익숙한 시선을 떠올리고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레온은 황급히 조그만 손으로 제 두 눈을 가리며 말했다.
“……미, 미워하지 마세요,”
“……뭐? 아니야. 미워하지 않아. 내가 왜 널 미워해? 응? 울지 마.”
두 눈을 가린 채 울먹이는 레온의 모습에 그레이스가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레온!”
정원의 맞은편에서 아서가 기사들과 함께 다급히 레온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연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살피며 레온의 모습과 목소리를 찾아 헤매던 아서는 곧 맞은편 벤치에 마주 앉은 그레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살짝 놀란 눈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던 아서는 곧 그녀의 무릎에 앉아 울고 있는 레온을 본 순간 험악한 시선을 했다.
그러더니 빠르게 그레이스의 앞으로 걸어온 아서는 그녀에게서 빼앗듯 레온을 안아 들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네?”
“내가 내걸었던 조건, 벌써 잊었습니까? 분명 나는 당신에게 펠릭스 성의 내정 간섭과 레온을 학대하지 않는 것, 그 두 가지 말고는 무엇이든 해도 좋다고 했을 텐데요.”
“……하.”
“혹시, 레온의 목걸이 때문입니까?”
험악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쏘아붙이는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 또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레이스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후, 아서를 마주 노려보며 되물었다.
“거기서 목걸이 이야기가 왜 나오나요? 그리고 조금 전 그 말, 꼭 내가 레온을 괴롭혔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그럼 아닙니까?”
“아니에요!”
되묻는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는 날카롭게 부정했다. 그러자 아서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왜 레온이 울고 있었던 겁니까?”
“몰라요, 모르겠어요. ……난 그냥 귀엽고 예뻐서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인데, 아이가 눈을 가리면서 울었다고요. 미워하지 말라고 하면서요.”
“……눈을, 본 겁니까?”
이어진 그레이스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는 아서의 눈초리가 더욱 험악해졌다. 그러더니 그는 이제야 모든 것이 납득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을 이었다.
“이제 알겠군요. 왜 레온이 눈을 가리며 울었는지.”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아이의 눈을 본 순간 할 말을 잃고 가만히 그 눈을 바라보았습니까? 그러다 꼭 괴물과 눈이 마주친 사람처럼 무섭고, 두렵다는 듯 눈을 피하기라도 한 겁니까?”
“……!”
“그날, 결혼식에서 내 눈과 마주쳤던 때처럼 말입니다.”
아서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의 눈과 그의 품에 안겨 시선을 내리깐 레온의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나?’
잠깐 스스로를 돌아본 그레이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다. 마냥 두렵고 무섭게 느껴졌던 아서의 눈과 달리, 아이의 눈은 그저 홀릴 것처럼 신비롭다는 마음으로 바라본 것이 전부였다.
그래. 그랬다.
그레이스는 스스로에게 확신에 찬 눈으로 아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하니 솔직히 말할게요. 맞아요, 처음 당신 눈을 봤을 땐 조금 무서웠어요. 그런데 저 아이, 레온의 눈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입에 발린 거짓말은 그만둬요.”
“거짓말 아니에요.”
자신의 말을 거짓말이라 단정 짓는 아서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답답해하며 부정했다. 그러자 아서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비웃더니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몇 있었더랬죠. 하지만 내 눈에 대해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곧 레온의 눈을 보고서도 두려워하고 레온에게 모진 말을 퍼붓게 되더군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그야 그들에게 ‘이상한 일’이 찾아오게 되면 누구든 예외 없이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
그레이스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는 아서의 두 눈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앞으로 찾아올 일들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는 듯, 깊은 두 붉고 푸른 그의 눈에 그레이스는 또다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서는 순간 얼어 버린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왜요, 두렵습니까?”
“…….”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표정만 봐도 알겠군요. 앞으로 레온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하. 공작님, 일단 겪어 보지도 않고 막연히 무서워한 부분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접근하지 말라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네요. 오히려 제가 가진 두려움을 없애려면 더 자주 만나고 부딪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아서의 모습에 그레이스가 억울해하며 항변했다.
그러자 아서가 어느새 차가운 분노가 가라앉았는지, 담담해진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레이스는 돌아온 그의 대답에 답답해하며 되물었다.
“과연 당신에게 진짜로 무섭고 두려운 일이 생겨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뭐라고요?”
“지금껏 나와 연을 맺은 숙녀들은 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에 대해 나와 레온의 탓을 했습니다. ……뭐,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치면 남 탓을 하고 싶어하니까요.”
“…….”
“나는 괜찮습니다. 그런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을 지금껏 겪어 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 아이에게 그런 아픔을 또 겪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공작님, 저는…….”
“나는 부인께서 그 다른 사람들처럼 어설픈 동정이나 연민으로 레온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후에 싸늘한 시선으로 아이를 밀쳐 낼까 두렵습니다.”
“…….”
“그럼 실례하죠. 이만 침실로 돌아가 쉬세요.”
굳은 그레이스에게 담담히 경고의 말을 내뱉은 아서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레이스는 두 팔로 단단히 레온을 안은 채 냉정히 돌아서서 걸어가는 아서의 등을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에게 아니라고,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오기가 치밀었다.
그러나 몸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레온의 눈에서 ‘그’를 발견한다면, 또 만약 자신에게 진짜로 기괴한 일들이 생겼을 때 두려움에 떨지 않을 거란 확신이 스스로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
그때, 멀어지는 아서의 품에 안겨 있던 레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레이스는 두 팔로 아서의 목을 끌어안고 동그란 오드아이로 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아이의 눈을 일부러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나 조금 전 그의 말처럼, 자신이 아이의 눈을 보고도 막연한 두려움에 빠질까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무섭지 않아.’
그러나 그의 말은 기우였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는 사람의 것 같지 않은 기묘한 오드아이 대신 혹여 자신이 무서워하고 싫어할까 두려워하는 여린 아이의 눈만 보였다.
그레이스는 잔뜩 주눅이 든 레온을 향해 살포시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살짝 한 손을 펴 레온을 향해 흔들며 아이만 알아들을 수 있게 입을 벙긋거렸다.
“잘 가, 레온. 우리 내일 또 보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아이가 알아듣기 쉽도록 크게 입을 벙긋거리며 인사하자 그를 알아들은 레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더니 곧 레온은 만 개한 꽃처럼 활짝 웃으며 그레이스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었다.
‘아아, 귀여워.’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레온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