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4화
외출 준비를 마친 그레이스는 샐리의 안내를 받아 비밀 정원에 도착했다.
그레이스는 지난밤 내린 눈으로 온통 새하얀 정원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자국이 남는 하얀 눈을 신기해하자, 그녀의 곁을 따르던 샐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리 많은 눈을 보는 건 처음이신가요?”
“네. 앨버튼 성은 수도와 가까워서, 겨울에도 포근하거든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수도에서는 한겨울에도 얇은 코트 한 장이면 충분했는데, 이곳은 두꺼운 코트와 양털 머플러와 털구두를 신어도 추웠다.
하지만 폐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아주 깨끗해서, 그레이스는 연신 뽀얀 입김을 내뱉으며 눈 덮인 정원을 산책했다.
그 모습이 지체 높은 새 공작 부인이라기보단 꼭 눈을 처음 본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며 혼자 슬쩍 웃던 샐리는 어느새 볼이 추위로 빨갛게 언 그레이스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어머나, 볼이 빨개지셨어요.”
“그래요?”
“이대로 있다간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요.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아, 조금만 더 산책하고 싶은데. 안 되나요?”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처음으로 맞이하는 평온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고작 이 정도 추위 때문에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에 그레이스가 난색을 표하자 샐리는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따뜻한 차라도 내오겠습니다, 마님.”
“아, 좋아요.”
“벤치에 앉아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눈이 깨끗이 치워진 벤치에 그레이스를 앉힌 샐리는 부리나케 저택 쪽으로 뛰어갔다.
“……천천히 다녀와도 되는데.”
그레이스는 멀어지는 샐리를 향해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리며 벤치 위에 앉았다.
그리고 나무 위로 손을 뻗어 그 위에 내린 눈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조금 전 샐리가 있을 때 나름대로 체통을 지키느라 참았지만, 사실 이렇게 직접 눈을 만져 보고 싶었다.
바스락.
그때였다.
손에 쥔 눈을 공처럼 둥글게 뭉치고 있던 그레이스의 뒤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걸까. 그레이스는 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바스락, 바스락.
그러자 조금 전보다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더욱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작은 산짐승이 움직이는 듯한 그 소리에 그레이스는 슬며시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 들려온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몇 발짝쯤 걸어 살짝살짝 들썩이는 덤불 앞에 멈춰 선 그레이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꼭 술래잡기의 술래가 된 기분이었다. 그레이스는 일부러 인기척을 죽이고 덤불 속 숨은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어머.”
“……!”
그렇게 몇 분 후. 덤불 속에서 불쑥 네다섯 살 정도 될 법한 작은 아이가 튀어나왔다.
그레이스는 자신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그 아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고급스러운 비단 제복에 긴 검은 외투를 뒤집어쓴 채, 앞머리가 길게 내려온 금발에 작은 얼굴을 검은 가면으로 가린 아이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 그대로 얼어 버린 아이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눈이랑 가면. 어디선가…….”
아이가 쓴 가면도, 오른쪽은 앞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드러난 왼쪽에서 보이는 아이의 붉은 왼쪽 눈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를 보며 그레이스가 멍청히 중얼거리자, 아이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더니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등을 돌리고는 쫓기듯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머! 잠깐만, 얘! 꼬마야!”
그레이스는 멀어지는 아이의 등 뒤로 소리쳤다.
아무래도 아이가 뭔가 크게 오해를 한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긴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아이가 달려간 방향을 따라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와작―.
그때 아이를 쫓던 그레이스의 구둣발에 무언가 밟히는 것이 있었다. 그레이스는 발밑에서 들려온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얼른 발을 뗐다.
“……목걸이잖아?”
발을 들어 올리자, 그레이스의 구둣발에 짓밟힌 목걸이가 보였다.
그레이스는 살짝 몸을 굽히고 눈 덮인 땅에 짓눌려 있는 목걸이를 들어 살폈다. 긴 은빛 체인에 붉고 투명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는 다행히 망가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대체 왜 이런 게 여기 떨어져 있었던 걸까. 조금 전 자신이 걸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그 목걸이의 주인이 누구일까. 잠시 생각하던 그레이스는 곧 어렵지 않게 그 목걸이의 주인을 짐작해 냈다.
‘조금 전 그 꼬마 건가 봐.’
목걸이의 체인을 둘둘 말아 자신의 손에 단단히 감은 그레이스는 앞에 난 작은 발자국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눈을 헤치며 작은 아이의 발자국을 따라가던 그레이스는 곧 발자국이 끊긴 겨울 장미 덤불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곧 장미 덤불 너머 둥글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한 그레이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꼬마야.”
“……!”
그레이스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는 또다시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이 여차하면 다시 도망칠 것 같은 모양새라, 그레이스는 다급히 손에 감아쥐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아이의 눈앞에 내밀며 말했다.
“잠깐만! 이 목걸이, 혹시 네 거니?”
아이는 그레이스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본 순간 드러난 왼쪽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에 걸린 목걸이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 후 몸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춰 앉은 그레이스는 아이의 눈앞에 살짝 목걸이를 흔들며 말했다.
“조금 전에 저기에서 주웠는데. 네 거 맞지?”
“…….”
“아니야? 네 것이 아니라면. ……이거 내가 가져도 돼?”
그레이스가 일부러 아이를 떠볼 속셈으로 그렇게 말하자 아이가 다급히 작은 두 손을 내밀었다.
어지간히 그 목걸이가 소중한 모양인지, 간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내미는 아이의 얼굴은 잔뜩 울상이었다.
그레이스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그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아이의 결 좋은 머리를 잔뜩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미안, 미안. 농담이야.”
“……농담이요?”
“응. 농담.”
그레이스는 꼭 아기 새처럼 자신의 말을 따라 하는 아이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의 목 부근에 그 목걸이를 단단히 걸어 주며 말했다.
“이렇게 꼭 차고 다녀. 잃어버리지 않게.”
“……고맙습니다.”
“그래, 착하다.”
그레이스는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는 아이의 긴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귀여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레이스의 손이 자신에게 뻗어 오자, 아이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레이스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경계하는 아이의 모습에 놀라 당황하며 물었다.
“왜, 왜 그래? 혹시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게 기분 나빠서 그래?”
그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레이스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아이와 시선을 맞추려 노력하며 또다시 물었다.
“그럼 왜 그래? 내가 혹시 뭐 잘못했어? 그럼 내가 사과할게. 그러니까 울지 마. 응?”
“……지도 몰라요.”
“응? 뭐라고?”
아이는 잔뜩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레이스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레이스는 그 대답이 도저히 들리지 않아, 난처한 얼굴로 다시 되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울먹이며 그레이스를 막아 세우듯 짧고 마른 팔을 쭉 펴며 중얼거렸다.
“……저주받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안 돼요.”
“응?”
돌아온 아이의 말은 그레이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순간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몰라 되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미워하지 마세요.”
“뭐? 왜? 뭐가 죄송해? 그리고 왜 내가 널 미워할 거라고 생각해?”
“저, 전에……. 레이디 비앙카가 그랬어요. 나는 허락 없이 다른 사람을 만져서도 안 되고, 감히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조르면 안 된다고요. 그런데……. 조금 전에…….”
“……레이디 비앙카가 왜 만지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를 죽게 한…… 저주받은 아이라서 함부로, 만지면 저주가……, 옮는다고요. 다, 다른 사람들도……,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저주가 옮는다고, 나에게…….”
겨우 말을 이어 나가는 아이의 눈에 큰 눈물방울이 맺혔다가 뚝 떨어졌다.
그레이스는 작은 두 손으로 앞머리에 가려진 눈을 부비며 서럽게 우는 아이의 모습에 얼굴을 찡그렸다.
겨우 다섯 살 남짓 되었을 법한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모진 말을 쏟아 낸 걸까. 그레이스는 가슴이 아프게 꽉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아이의 머리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긴 아이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다정히 말했다.
“그런 말 귀담아듣지 않아도 돼. 아니, 잊어버려.”
“……네?”
“신께서는 자비롭고 정의로우신 존재이셔. 그런 분이 너같이 귀여운 아이에게 그런 몹쓸 저주를 내리셨을 리가 없잖니.”
그레이스는 한 손으로는 아이의 머리를, 한 손으로는 아이의 젖은 눈가를 쓸어내리며 이를 악물고는 말했다. 아이에 대한 동정심이 깃들고 나니, 찾아온 것은 아이에게 모진 말을 퍼부은 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어쩜 그렇게 모진 말을 퍼부을 수가 있어.’
쓰다듬기 싫으면, 애정을 주고 싶지 않으면 그저 싫다고 부드럽게 거절하면 될 것을. 그런데 왜 그런 모진 말로 상처를 준단 말인가. 그레이스는 그것이 못내 화가 났다.
그레이스는 참을 수 없이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 화에 거칠게 숨을 씨근덕거렸다.
‘간단한 1서클 마법 하나 시전하지 못하는 주제에. 내게 칭찬을 바라는 것이냐?’
‘너는 우리 가문의 수치란다, 그레이스.’
‘넌 그냥 시집이나 잘 갈 궁리나 해. 뭐, 그래 봤자 장차 황태자비가 될 나에 비하면 한참 못한 수준의 남자밖엔 찾을 수 없겠지만!’
‘아, 그랬었지.’
오늘 처음 보는 아이의 일에 그녀가 이토록 화가 나는 것은 바로 동질감 때문이었다.
조금 전 아이가 울며 털어놓았던 상처들은 이미 자신의 가슴속에 나 있던 상처들과 놀랍도록 비슷했으니까.
그레이스는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자신을 향한 폭언들이 생생히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앞의 아이를 향해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