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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3화 (3/142)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3화

다행히 큰 체격과는 달리 보폭이 그리 넓진 않은지, 그레이스는 쉽게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딱 두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따라가며, 눈을 돌려 펠릭스 저택 안을 살폈다.

북쪽의 추운 기후에 맞게 단단한 돌벽으로 만들어진 성은 제국 최대 규모라는 위용에 맞게 웅장했지만 딱히 눈 둘 곳이 없을 만큼 황량했다.

본래 이 성의 안주인이었던 선황제의 여동생, 펠릭스 공작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오래 방치되었던 탓일까. 시든 식물들 위로 흰 눈이 가득 쌓인 중앙 정원 안은 이미 한참 유행이 지나 초라해지고 깨진 조각들로 꾸며져 있었다.

아무래도 괴물 공작, 아서 펠릭스는 저택을 꾸미는 일에는 큰 소질이 없는 듯했다. 그레이스는 앞만 보고 걸어가는 아서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가 바로 앞으로 부인께서 기거하게 될 침실입니다.”

중앙 정원을 지나, 또다시 문을 지나 둥글게 휘어진 대리석 계단을 타고 오른 끝에 아서는 어느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아서는 먼저 문고리에 손을 뻗어 문을 열고 그레이스를 향해 손짓했다. 그 손짓이 아무래도 방으로 들어가라는 것만 같아, 그레이스는 어색하게 그를 지나쳐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나.”

그 순간 그레이스의 눈에 들어온 침실 안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족히 세 사람은 편히 누울 수 있을 법한 큰 침대와 그 위로 드리워진 흰 캐노피, 따뜻한 연분홍색 벽지와 은으로 된 화장대, 그리고 넓은 옷장과 테라스로 향하는 큰 창문은 완벽히 수도의 최신 유행을 따르고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보았던 저택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침실의 풍경에 그레이스는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 네.”

놀란 눈으로 침실을 둘러보는 그레이스에게 아서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레이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가면 속 아서의 눈이 살짝 찡그려지는 듯했다. 그러더니 곧 짧게 헛기침을 한 아서는 완전히 그녀가 방 안에 들어선 것을 재차 확인하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그럼 이제 푹 쉬어요. 저기 작은 문이 이 방 안에 딸린 욕실이니, 목욕은 그곳에서 하면 됩니다.”

“……네? 아, 네.”

“부인의 짐은 내일 정리하도록 명해 두었으니, 혹여 쉬는 동안 시녀들이 들이닥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요.”

“……아, 그런가요.”

그녀가 먼저 묻기도 전에 아서는 그레이스가 현재 궁금해할 법한 것들에 대해 척척 말해 주었다. 꼭 ‘다 알려 주었으니 더 이상 제게 물어보지 말라’는 듯한 그 말에 그레이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가 무뚝뚝한 입새를 굳히더니 곧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부인이 상상하는 그런 일은 아마 절대로 없을 겁니다.”

“……네? 제가 상상하는 일이라뇨?”

“오늘 밤도, 내일도, 앞으로도 영원히. 괴물과의 끔찍한 첫날밤 같은 것은 평생 없을 거라는 소리입니다.”

“……네?”

“즉, 내게 달라붙은 저주가 부인께 향할 일은 없다는 소리죠.”

푸르고 붉은 오드아이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무뚝뚝하게 일갈하는 아서의 말에 그레이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 아서의 말은 마치 그레이스의 마음속 깊은 두려움을 전부 읽어 낸 듯했다. 자신이 잘 감추고 있다 생각했던 그 마음을 읽혀 그레이스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런 그레이스의 모습을 잠깐 내려다보던 아서는 곧 무심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펠릭스 영지의 내정에 대한 간섭, 그리고 내 동생 레온에 대한 부당한 학대. 이 두 가지 말고는 부인께선 이 성 안에서 무엇이든 해도 좋습니다.”

“……무엇이든지요?”

“어차피 사랑 없이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에 서로 부부의 의무 같은 것을 강요할 마음, 내겐 없습니다. 연인이든, 사치든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다 했습니다. 그럼 이제 마음 편히 쉬세요.”

그 말을 끝으로 아서는 침실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그레이스는 순식간에 조용해진 침실에 홀로 남아, 여전히 멍한 눈으로 조금 전 아서가 서 있던 곳을 응시했다.

결혼식에서부터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종일 한 마디도 걸지 않더니만, 이러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아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관찰하며 속내를 간파해 냈을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조금 소름이 돋았다.

‘내게 달라붙은 저주가 부인께 향할 일은 없다, 라.’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에서 한 것일까. 진짜 저주를 내릴 능력이 있지만 안 하겠다는 걸까, 아니면 저주를 내릴 능력이 애초에 없다는 걸까.

어찌 됐든 그의 ‘저주’를 이용해 그와 헤어지고 자유의 몸이 될 그레이스의 입장에선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차라리 완전히 무시하거나, 대놓고 모질게 굴었다면 나중에 ‘미친 척’ 하기 편했을 텐데.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푹신한 이불이 깔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됐어. 그 말이 무슨 뜻이든, 난 무사히 살아서 이 저택을 나가면 그만이야.’

그래. 그거면 되었다.

괜히 아서 펠릭스, 그 괴물 공작의 말을 곱씹으며 찜찜해할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첫날밤이니 뭐니 그런 걸로 고민할 일도 없어졌겠다, 얼른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후 한숨 자고 싶었다.

그레이스는 옷걸이에 걸친 가운을 한 팔에 걸친 후 욕실로 들어섰다. 어느새 창 밖에는 다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 * *

그렇게 펠릭스 영지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족히 제 몸통 두께 정도 되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그레이스는 살짝 열린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떴다.

“……아, 추워.”

“마님, 기침하셨습니까?”

수도에서는 느껴 보지 못했던 강추위에 몸을 떨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그레이스는 문 밖에서 들리는 시녀의 목소리에 상체를 일으켰다.

“네. 일어났어요.”

“그럼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세숫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 그래요.”

세숫물을 준비해 왔다는 시녀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곧 그 말에 대답했다.

그러자 침실 문이 열리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더운물이 담긴 은쟁반을 담은 트레이를 밀며 한 시녀가 들어왔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난 중후한 나이의 시녀가 침대에서 반쯤 상체를 일으킨 그레이스에게 다가와 말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마님. 저는 앞으로 마님을 모시게 될 샐리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샐리.”

“아름다운 마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에요. 헤헤. 오늘 많이 춥죠, 마님? 여기서 세수를 도와드릴까요?”

“아니, 화장대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마님. 그럼 털코트를 가져올게요.”

샐리의 말에 그레이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샐리는 얼른 그녀의 몸에 털코트를 덮어 주었다.

싸늘했던 등에 따뜻한 것이 닿자 추위가 한결 덜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얼굴을 더운물로 닦고 제 긴 머리를 곱게 빗어 틀어 올리는 샐리를 향해 말했다.

“저, 샐리.”

“네?”

“오늘 저는 뭘 해야 하나요?”

조심스럽게 자신이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묻는 그레이스에게 샐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저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생각하던 샐리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네? 뭐, 서신에 답을 한다든가, 저택을 돌보는 일이라든가……. 공작 부인으로서 마땅히 돌봐야 할 일도?”

“네. 공작님께서는 언제나 ‘공작 부인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두시라’고 하셨답니다. 그건 이전 엘렉트라 님도, 약혼녀이셨던 비앙카 님에게도 그러셨……, 에그머니.”

“……아.”

“죄송해요, 마님 제가 실언을…….”

그레이스의 물음에 무심코 재잘거리던 샐리는 곧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고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연신 큰 녹색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는 샐리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마님. 죽을죄를 지었어요.”

“정말 괜찮아요. ……그럼 내가 할 일은 없단 거죠?”

“……네, 마님.”

“잘됐네요. 그럼 나 좀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안내해 주겠어요? 심심하기도 하고, 몸도 찌뿌둥해서 좀 움직이고 싶은데.”

“네! 제가 얼른 따뜻한 드레스로 갈아입혀드릴게요! 그 후에 같이 산책 나가요!”

괜찮다는데도 연신 사과를 하는 샐리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고 싶은 마음과 탈주를 위한 꿍꿍이를 섞어 그레이스가 말을 꺼내자 샐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샐리는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그레이스의 머리 손질을 마무리한 후 종종거리며 옷장으로 걸어갔다.

그레이스는 그 모습에 작게 킥킥거리며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샐리가 잘 꾸며 준 덕분인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퍽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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