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1화 (1/142)

<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

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화

Prologue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화려한 창 아래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족히 수백 명은 너끈히 머무르고도 남을 거대한 연회장 안, 맞은편의 사람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식탁에는 앨버튼 공작 부부와 그들의 두 딸, 마리안느와 그레이스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레이스, 네게 전할 것이 있다.”

대화 한마디 없이 식사를 이어 가던 앨버튼 공작이 불현듯 자신의 둘째 딸 그레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상석에 앉은 앨버튼 공작 부부와 찰싹 붙어 앉아 있는 언니 마리안느와 달리, 가장 먼 끝자리에서 조용히 식사하고 있던 그레이스는 그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네. 말씀하세요, 아버지.”

“네게 혼담이 하나 들어왔다. 그것도 황제 폐하께서 주선하신 것이지.”

그레이스는 태어나 처음 듣는 다정한 목소리로 제게 혼담을 말하는 아버지 앨버튼 공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나이 스무 살, 처음으로 들어온 혼담인데 무려 황제 폐하가 주선한 혼담. 놀랄 법도 한 상황이건만 그녀는 조금도 놀랍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가요? 상대는 어떤 분이신가요?”

그 무심하다 못해 무감각한 그레이스의 반응에 앨버튼 공작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사촌 동생인 아서 펠릭스 공작이란다.”

“……어머나!”

“세상에. 제국 최고의 기사이자, 제국에서 가장 넓은 펠릭스 영지를 소유한 펠릭스 공작님이라고요?”

“그레이스, 이건 네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구나!”

앨버튼 공작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앨버튼 공작 부인과 마리안느가 호들갑을 떨며 반응했다.

마치 이보다 더한 경사는 있을 수 없다는 양 들뜬 목소리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속으로 차디찬 비웃음을 지었다.

‘경사, 라.’

그 남부러울 것 없는 조건을 가진 공작에게 ‘그와 맺어진 여자는 전부 죽거나 미쳐 버린다’는 저주가 붙어 있다 해도? 그래서 ‘저주받은 괴물 공작’이라 불리는 그와의 혼담을 과연 경사라 할 수 있는 걸까.

그레이스는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얼굴을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처음 보는 다정하게 미소 띤 얼굴로, 그녀에게 정략결혼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땐 몰랐었지. 바보같이 이 결혼을 거절해도 되는 줄 알았어.’

그래, 그땐 그래도 이들이 자신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첫 번째 생에서 자신이 결혼을 거절하고 수녀원으로 숨어든 지 딱 이틀 만에 그들이 보낸 독을 마시고 죽던 그 순간까지도 말이었다.

그러나 되살아난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앨버튼 가문이 ‘평범한’ 자신을 버리지 않고 지금껏 가족으로 키운 이유는 ‘장차 마법 능력을 가진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있는 딸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후계자에게 마법 능력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귀족, 황족들과 혼맥을 만들 용도로 쓰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자신이 ‘정략결혼’을 거절했으니 그들은 이용 가치가 사라진 자신을 더 이상 살려 둘 이유가 없었을 터였다.

게다가 자신이 죽어 버리면 감히 황제의 혼인 주선을 거절했다며 화를 당할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었다.

정략결혼이냐, 죽음이냐.

기적적인 회귀 후, 또다시 자신의 앞에 놓인 선택의 기로 앞에 그레이스는 차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네요. 제게는 참 기쁜 일이네요.”

“그 말은, 혼담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지?”

그녀의 말에 앨버튼 공작은 반색하며 되물었다. 그레이스는 가볍게 생긋 미소 지으며 앨버튼 공작을 향해 대답했다.

“네. 저는 그분과 결혼하겠어요.”

그레이스는 어느새 붉게 물든 볼을 입꼬리로 밀어 올리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늘 가족들의 멸시에 짓눌려 인형 같은 무표정만을 짓고 있던 얼굴에 피어난 소녀 같은 그 미소엔 기쁨만이 가득했다.

그것은 드디어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스스로 벗어나, 두 번째 삶을 시작하게 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1. 죽음으로부터의 회귀

가족들과의 식사를 마치고 홀로 침실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가장 먼저 주변 사람들을 물렸다.

“미안하지만, 혼자 있고 싶어. 전부 나가 줘요.”

“네, 아가씨.”

그 말에 시녀들은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굽힌 후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레이스는 얼른 이 방에서 나가 자신과 그 ‘괴물 공작’의 혼담에 대해 입을 놀리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그녀들의 행동에 쓴웃음을 지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그레이스는 창가에 몸을 기대고 탁 트인 호수와 그 뒤로 펼쳐진 숲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또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몇 달 전, 자신은 혼담을 거절하고 가문과 절연한 후 수녀가 되겠다고 하며 이 저택을 나갔었다.

평생 동안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던 앨버튼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몸은 수도원에 갇혔지만 정신만은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이 아름다운 풍경을 등졌었다.

그것이 첫 번째 생의 끝을 선택하는 길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수녀원에서 그레이스 앨버튼이 아닌, ‘성직자 그레이스’로서 삶을 준비한 지 딱 이틀 만에 자신은 독살당했다.

처음으로 어머니 앨버튼 공작 부인이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생일 케이크 안에 단 한 모금으로도 위장을 전부 녹일 수 있는 맹독이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감격하며 한 조각을 전부 먹어 치웠으니 그녀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은 당연했다.

모두 잠든 새벽, 홀로 차디찬 수녀원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 가며 그녀는 간절히 신께 기도했다.

‘신이시여, 이 불쌍한 자를 구하소서. 이대로 죽을 수는 없나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죽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살 수만 있다면 설령 괴물 공작과의 결혼이 아니라, 진짜 괴물과의 결혼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제발 살려 달라고 신께 애원했다.

그 간절한 애원을 신께서 들어주신 걸까.

폐가 찢어지고 위장이 녹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못 이겨 정신을 잃은 그레이스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가족들로부터 괴물 공작과의 정략결혼을 제안받았던 그때로 ‘돌아와’ 있었다.

낡은 천장, 쇠창살이 달린 폐쇄된 수녀원이 아닌 넓고 화려한 침실에서 눈을 뜬 그레이스는 그 순간 신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건데, 또다시 잘못된 선택으로 죽고 싶진 않아.’

천신만고 끝에 ‘두 번째 삶’을 얻은 그녀는 그때부터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하루 반나절 동안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고 고민한 끝에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정략결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폐하께서 명한 결혼을 피하려 수녀가 되겠다고 했고, 수녀원에 들어간 것이었으니까.’

정략결혼을 받아들여 황제와 가족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그럼 그후엔?’

사랑 없는 괴물 공작과의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갈 것인가.

고민 끝에 그녀는 그 끔찍한 ‘괴물 공작과의 결혼 생활’에서도 벗어날 방법 또한 생각해 냈다. 바로 괴물 공작과 엮이면 죽거나 미쳐 버린다는 저주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 저주를 받아 미친 것처럼 연기하면서 스스로 이국의 섬에 유폐되는 거야.’

완전히 미쳐 버린 척하며 괴물 공작 펠릭스의 성에서 빠져나와 이국의 섬으로 가는 길에 도망쳐 숲에 숨어들어 종적을 감추자.

그렇게 며칠을 버티면 사람들은 수색 끝에 적당히 포기할 테고, 그러면 그 이후 삶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는 거였다.

지긋지긋한 앨버튼 가문의 ‘무능력자’라는 멍에를 벗고, 그레이스라는 한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완벽해.’

그녀는 스스로 만들어 낸 완벽한 계획에 뿌듯해하며, 다시 한번 신께 감사의 기도를 했다.

비록 괴물 공작 아서 펠릭스에게 폐를 끼치는 결정이긴 했지만, 그녀에겐 그에 대한 미안함보다 자신의 목숨이 우선이었다.

그레이스는 조용히 두 손을 포개고, 눈을 감았다.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저는 살고 싶습니다.’

부디 당신께서 준 두 번째 삶을, 온전히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레이스는 그렇게 끊임없이 기도하며, 마음속에 피어오른 두려움과 괴물 공작을 향한 양심의 가책을 억눌렀다.

* * *

그레이스가 혼담을 승낙하자,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혼담을 진행하는 족족 예비 신부가 죽거나 미치는 불행한 사촌 형제를 구제하겠다는 황제의 이해 와 집안에서 유일하게 마법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집안의 수치를 치워 버리겠다는 앨버튼 공작 가의 이해가 정확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통상 신랑과 신부가 예물을 교환하고, 신부의 집에서 웨딩드레스를 준비하고 장차 시집갈 딸을 위해 파티를 여는 등 온갖 복잡한 결혼 절차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단 3일 안에 전부 해치워졌다.

그리고 혼담을 받아들인 후 일주일 뒤.

제국 수도의 킹 세인트라 대성당에서 아서 펠릭스 공작과 그레이스 앨버튼 공녀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제국 창립과 동시에 세워진 웅장한 성당은 신랑과 신부를 축복하기 위해 최고급 백장미와 백합으로 장식되었고, 곳곳에는 그들을 축복하는 눈부신 흰 베일이 걸렸다.

뒤에서 어떤 흉흉한 소문이 돌든, 명목상은 제국 최고의 기사와 제국 내 유일한 정통 마법사 가문의 딸의 결혼식이었기에 성당은 이곳에서 치러진 어떤 결혼식보다 사치스러웠다.

그 결혼식의 신부, 그레이스는 목과 팔을 전부 감싼 정숙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족히 3미터는 되는 베일을 쓴 채 성당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부축하는 두 명의 시녀와 함께, 결혼식을 거행하는 교황이 호명하기를 기다렸다.

“신부, 그레이스 앨버튼 공녀께서는 성소로 들어오십시오.”

그때, 성당 안에서 그녀를 부르는 부주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부축하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 한 걸음 주교가 있는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사뿐사뿐, 걸음을 옮길 때마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그레이스는 묵묵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단상 앞에 도착했을 때, 그레이스는 드디어 신랑인 괴물 공작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 사람이, 그 괴물 공작이구나.’

그레이스는 결혼식에서야 처음 보는 제 신랑 아서 펠릭스의 모습에 무서움도 잊고 그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베일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그는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호칭에 걸맞게 그녀보다 머리 하나 반 정도는 큰 듬직한 체격이었다.

검은 제복을 입고 그 위에 남색의 망토를 걸친 채 얼굴 전체를 검은 가면으로 가린 그의 모습은 결혼식이라기보단 비밀스러운 무도회에 어울릴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문에는 그의 곁에 다가서기만 해도, 전장에서 뒤집어쓴 피와 그에게 깃든 저주의 냄새로 얼어붙는다 했는데.’

정작 눈앞에 선 가면을 쓴 그의 어색한 입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서 지극히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 모습이 소문과는 달라 마냥 신기해서 그레이스는 무례하다 싶을 만큼 집요한 시선으로 눈앞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가면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기묘하게 떨려 왔다.

“신부 그레이스 앨버튼 양은 베일을 걷고 신랑 아서 펠릭스 경을 바라보시오.”

그렇게 얼마나 시선을 맞추고 있었을까.

단상 앞에 선 주교는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인 혼인 성사를 위해 그레이스를 향해 베일을 벗을 것을 요구했다.

그 말에 그레이스가 허리를 살짝 굽히자,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던 베일을 걷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