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지팡이를 집어 들 생각을 할 짬도 없었다. 나디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에드윈에게 다가갔다. 그의 셔츠 자락을 간신히 붙잡은 손이 형편없이 덜덜 떨렸다.
“왜…. 왜 그래요? 아이가 싫어서 그래요?”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스럽게 묻고 싶었건만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떨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가 뒤돌아보며 손을 잡았다. 제 손을 내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희미한 안도가 찾아왔다. 나디아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그의 손을 있는 힘껏 붙잡은 채 서둘러 말을 이었다.
“싫으, 싫으면 없애면 되니까….”
“나디아.”
“무섭게 하지 말아요….”
애쓴 보람도 없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불안이 그녀의 이성을 마구 뒤흔들어 댔다. 에드윈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낯을 했다.
남자는 무언가를 털어 내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깨를 감싸 쥔 손이 살며시 나디아를 끌어당겼다. 그의 품에 안겨서도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디아는 눈물을 닦아 내고 나름대로 열심히 한 생각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타샤에게 약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돼요.”
“진정해.”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어느새 그의 얼굴 위에 깃들었던 복잡한 상념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나디아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희미한 미소가 그려진 얼굴을 올려다보며 안심해야 할지, 그가 무언가를 억지로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에 빠져야 했다.
말을 고르는 듯하던 남자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놀란 것뿐이야. 왜냐하면 내가….”
그녀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감각을 느꼈다. 에드윈의 입술 사이로 한 음절이 흘러나올 때마다 전신이 긴장으로 굳어 드는 게 느껴졌다. 마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이 불길할 거란 사실을 몸이 먼저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불임이기 때문이지.”
충격으로 입이 벌어졌다. 머릿속이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쑥대밭이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 같기도 했고 할 말이 모조리 증발한 것 같기도 했다. 입만 벙긋거리던 나디아는 간신히 얼빠진 소리 한마디를 내어놓을 수 있었다.
“그게 무슨….”
“그러니까, 당신에게 아이가 생기면 안 된다는 뜻이야.”
에드윈은 듣는 사람이 누가 되었든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만한 이야기를 무덤덤한 낯으로 침착하게 늘어놓았다. 누군가 목소리를 앗아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디아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망연한 낯으로 입만 벙긋거렸다.
“지금 이 소식은… 당신이 다른 놈과 통정했거나, 그게 아니면 기적적으로 내 몸이 저절로 나아서 아이를 만들 수 있게 됐거나.”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아서 음산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뺨을 쓸었다. 다정한 행동이었음에도 소름이 돋았다.
통정이라니, 정신이 번쩍 들 만한 말이었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도 이번만큼은 멍청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낼 수 없는 때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런 적 없어요.”
다행히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러지 않았다는 거 알아. 기적이 일어났나 본데.”
뺨 언저리를 배회하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그의 길쭉한 손가락에 걸린 밤색 머리카락이 빙글빙글 돌리는 움직임에 맞춰 감겨들었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같이 보내고, 내가 곁에 없는 동안은 하녀들이 곁을 지켰지. 그럴 틈도 없었겠지만, 그럴 마음도 없었겠지. …지금의 당신은 나를 사랑하잖아.”
나디아는 그의 가슴에 매달려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리 없는 대답에 남자의 얼굴 위로 희미한 안도가 깃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디아는 에드윈의 손을 끌어당겨 꼭 쥐었다. 제 온기를 나눠 주고 싶은 것처럼.
그를 위로하려던 그녀는 뒤늦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런데 불임은 무슨 소리예요? 언제부터?”
“불임이 불임이지. 몇 년 됐어.”
“몇 년이라니….”
짧은 시간 동안 수십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불임이 몇 년 된 일이라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태어났다면 부정의 증거가 되었을, 이제는 사라진 아이에 대한 기억이 켜켜이 쌓인 침전물들 사이를 헤치고 부상했다.
“그러면 그때도 당신은 다,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에게 묻는 것도, 답을 듣는 것도 두려웠지만 입이 멋대로 나불거렸다. 차마 지칭할 수도 없어서 그때라고 얼버무린 말을 그는 바로 알아들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잊으려 애썼던 일들을 파헤치는 건 두려웠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에드윈이 모든 걸 알고도 덮어 두려 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녀는 차마 그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두려운 것은 그의 반응이 아니라 사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언제까지고 외면하려 했던 자신의 뻔뻔함이었다.
“당신이 원해서 생긴 일이 아니었잖아. 그렇지?”
나디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디까지,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으니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 그게 후회가 돼.”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에드윈의 눈 안에 고인 감정은 그녀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나디아는 그와 다르면서도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을 때마다 더없는 안도를 느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별다른 내색 없이 넘겼을 그의 속내가 어떠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하고 싶기도 했고 이해해 주어 고맙다고 하고 싶기도 했다. 또 나를 속였느냐며 따지고 싶기도 했지만 그리 따지면 저 역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나디아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당신 아이예요. 아닐 리가 없어요.”
“그래.”
에드윈 역시 복잡한 상념을 한쪽으로 미뤄 두었는지 한결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의 심란한 마음을 달래 주려는 것처럼 달짝지근한 미소였다.
***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몰랐다. 주변 사람들의 축하와 더욱 조심스럽고 극진해진 시중을 받으면서도 나디아는 온전히 기뻐하지 못했다. 그날 나누었던 에드윈과의 대화가 남긴 감정들이 가시처럼 걸렸다.
아이의 아버지가 에드윈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혹시라도 에드윈이 그녀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닐지, 혹은 악마가 농간을 부려 배 속에 제 씨앗을 심기라도 했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닌지.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면 등줄기가 서늘하게 식을 만큼 섬뜩했다.
두려워하면서도 그에게 직접 묻지 못했다. 아직도 나를 의심하느냐고. 홀로 하는 상상보다도 에드윈의 입술에서 나올 말을 상상하는 게 더욱 두려웠다. 어떤 방법으로든 결백을 확인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예전에 타샤에게 답을 얻었던 것처럼.
그녀는 생전 찾지도 않던 신에게 기도했다. 아무런 이변도 일어나지 않기를, 그렇다면 이 아이는 에드윈의 아이인 것이 분명하니까.
엘란츠 성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탄 나디아는 성에 도착하자마자 에드윈의 손을 붙잡고 타샤를 찾아갈 궁리를 했다. 지난번에 썼던 그 돌조각이 있다면 그걸 써 보자고 할 요량이었다.
“나디아.”
옆자리에서 뻗어온 손이 그녀의 손을 쥐었다. 나디아는 그제야 제 손이 놀라울 만큼 차게 식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 있는 순간은 모든 신경을 그녀에게 쏟는 남자가 널뛰는 감정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
그 말을 듣자 감정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자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임신 소식을 듣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그녀에게 심어 준 두려움이 얼마나 크고 깊었던지. 조금만 생각하면 에드윈 역시 그 순간 복잡한 감정을 느꼈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 헤아리기에는 나디아는 제 마음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원해?”
그녀는 손을 내리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빳빳한 옷깃에서 뜨거운 햇볕 냄새가 났다.
“사랑한다고 해 줘요.”
그리 웅얼거리자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남자의 튀어나온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심술이 난 나디아는 그의 목울대를 콱 물었다. 아프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에드윈은 나디아의 이마에 입술을 붙이고 그녀가 원하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속삭였다.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모를 것 같던 남자가 주는 사랑은 너무 달아서 받아 삼킬 때마다 배 속이 설탕물에 절여지는 기분이었다. 불안은 자취를 감추었고 나른한 한숨과 온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당신도 날 사랑하지?”
“사랑해요.”
귀가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웠지만 얼버무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 했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요구였으니까.
나디아가 그의 말에 안심할 수 있듯이 에드윈 역시 그녀의 말에서 얻는 평온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제법 많이 변화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떨던 나디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녀의 두려움을 즐거워하던 에드윈의 고약한 취미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변화는 사소한 깨달음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었다.
겁먹고 울먹이는 가련한 얼굴보다 얼굴을 붉힌 채 수줍게 웃는 나디아의 얼굴을 보는 게 더욱 즐겁다는 사실을 에드윈이 깨닫게 된 순간부터 그리고 나디아가 제가 어떤 행동을 하든 에드윈이 다 받아 주리라는 자칫 오만하기까지 한 확신을 얻고 나서부터였다.
엘란츠 성은 이미 그녀의 임신 소식으로 들떠 있었다. 나디아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에드윈의 손을 이끌고 북쪽 별관으로 달려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간신히 진정한 그녀는 에드윈과 함께 침실로 올라갔다. 곧장 하녀가 방문을 두드렸다.
“영주님, 치료사를 불러올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에드윈을 본 나디아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마법사를 불러 줘.”
입을 벌리던 에드윈이 다시 다물고는 피식 웃었다.
임신 소식을 들은 직후,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은 꺼져 가는 불씨처럼 사그라들었지만 완벽하게 이전의 평온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만일 에드윈이 아주 희미하게라도 의구심을 느끼고 있다면 나디아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