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112화 (112/115)

112.

그녀에게 좋은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 주겠다던 말대로 에드윈은 노력했다.

전보다 훨씬 더 자주 찾아왔고 소소한 대화도 많이 나눴다. 함께 식사하는 건 이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었고, 때때로 가까운 곳으로 소풍을 가거나 한가롭게 뱃놀이를 하기도 했다.

숲 속 호숫가에 위치한 별장으로 바캉스를 온 것 역시 그 연장선이었다.

호수 가장자리의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멍하니 호수가 출렁이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음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이때만큼은 종종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고민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요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벤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즐기며 아침을 흘려보내던 나디아는 문득 푹신한 풀을 밟는 걸음 소리를 들었다.

살며시 옆의 빈자리에 앉는 인기척 역시 일과처럼 반복된 일이었다. 눈을 감고도 그 인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향수 냄새와 맞닿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체온. 곧 그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면 그에게 고개를 기대고 시간을 또 흘려보낼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에드윈은 몸을 기울이더니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나디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에드윈은 여덟 살 난 어리광쟁이처럼 그녀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저도 모르게 배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당신…!”

놀라 내뱉은 목소리에 눈에 마주쳤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엘란츠 성을 떠나온 지 어느덧 엿새. 이틀 후엔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그사이에 영주가 꼭 필요한 일이 생겼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새벽, 잠결에 침대를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던 기척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동틀 녘이 되어서야 다시 침대로 들어오던 것 역시.

피곤한 게 당연했다. 그래서 일부러 깨우지 않았건만, 굳이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와 다시 잠을 청하려는 이유를 짐작하는 일은 꽤 간지러웠다.

조금이라도 더 나디아와 붙어 있고 싶었다던가, 그게 아니면 그저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거나.

에드윈이 어리광이라니. 나디아는 제가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찔러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남자에게 어리광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 제가 우스워서.

그새를 못 참고 잠이 밀려오는지 에드윈은 답지 않게 웅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나디아는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침대 속에서 나오지 않고 늑장을 부릴 것을 그랬다.

뺨 위로 흘러내린 금발을 조심스럽게 걷어 내자 언제 보아도 가슴 설렐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꽤 기분이 좋았다. 당황했던 것이 언제냐는 듯 나디아는 마음껏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웃기라도 했다가는 얼굴이 뜨거워져 고개를 돌려 감추어야 했는데 지금만큼은 그리 할 필요도 없었다.

다리가 저린 줄도 모르고 햇살 같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감각을 음미하던 그녀는 그가 잠에서 깨기라도 할까 싶어 금세 손을 뗐다.

나디아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던 하녀를 불러 책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이제는 시시하게만 느껴지는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하녀들이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냐고 조용조용 물었다. 아침도 걸렀는데 점심마저 거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준비하라고 대답한 뒤 읽던 책을 덮었다.

불편한 자세로 깨지도 않고 잠들어 있는 남자를 깨울 시간이었다. 매끈한 뺨을 한번 쓸어 본 나디아는 살며시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힘들일 필요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에드윈은 눈을 떴다. 멍한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점심 먹어요.”

“…벌써 그렇게 됐어? 깨우지.”

“너무 곤히 자서.”

남자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찌르르하고 저린 감각이 올라왔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자 에드윈이 혀를 찼다.

그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을 땐 좋았는데 이런 고충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에드윈이 풀밭에 아무렇게나 무릎을 꿇고 쥐가 난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이런 것도 보통 일이 아니네요.”

“미련하긴.”

그의 손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부름이 있고 나서야 멈추었다. 나디아는 벤치 옆에 쓰러져 있던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바람이 살며시 불었고 그때마다 무거울 만큼 푸른 잎을 가득 매달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사락사락하는 소리를 냈다.

에드윈은 그녀의 느린 걸음에 맞춰 걸었다. 호숫가에 옮겨 둔 테이블 아래에 늘어진 흰 식탁보가 팔락거렸다. 커다란 푸른색 파라솔이 따가운 정오의 여름 햇빛을 가려 주었다.

테이블 가득히 차려진 정찬이 눈에 들어오자 잊었던 허기가 밀려왔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손을 닦고 식기를 쥐었다. 에드윈은 바로 곁에 앉은 채 나디아의 무릎 위에 냅킨을 깔아 주었다. 처음에는 생전 해 본 적 없는 일이라는 듯 서툴기만 했던 손길이 이제는 제법 능숙했다.

식사는 조용했다. 그녀는 껍질이 질긴 무화과 빵의 촉촉한 속 부분만 먹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에드윈이 피식 웃는 게 느껴졌다.

빵에 곁들여 먹기 위한 부드럽게 녹은 버터와 각종 베리 잼, 윤기가 흐르는 꿀과 연유들이 놓였다. 그 옆으로는 로즈마리 향을 입혀 쪄 낸 새우와 화이트와인에 졸인 대구, 레몬 조각을 얹은 신선한 석화와 뱃속에 양념한 쌀을 넣고 구운 메추라기 등이 올려져 있었다.

나디아는 테이블 위에 차려진 모든 음식을 조금씩 맛보았다. 몸과 마음이 편해서인지 유난히도 입맛이 좋았다. 이렇게 먹다간 금방 살이 찌지. 그런 걱정은 머릿속을 스쳐 지나기만 했고 부지런히 입으로 음식을 나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일은 그녀가 평소에도 즐겨 먹던 석화 하나를 접시에 덜었을 때 벌어졌다. 포크로 탱글탱글한 알맹이를 찍어 입가로 가져가던 그녀는 멈칫했다.

입을 벌릴 수도 없었다. 역한 비린내가 확 올라온 탓이었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하며 포크를 내팽개쳤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 하던 행동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인 건 에드윈이었다. 그는 접시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석화의 냄새를 맡았다. 옆에서 자잘한 시중을 들던 하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상한 건 아닌데.”

에드윈의 말에 그네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나디아는 입과 코를 틀어막은 채 숨마저 멈췄다. 이윽고 그녀는 손을 내리며 조심스럽게 심호흡했다.

“괜찮아? 좋아하던 거잖아.”

그가 석화가 든 접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다시 한번 냄새가 훅 밀려왔다.

“욱….”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틀어막으며 구역질을 했다.

“아, 안 먹을래요.”

마구 손을 내젓자 에드윈이 접시를 그대로 하녀에게 떠넘겼다. 숲에서 불어온 바람이 달짝지근한 여름꽃 향기를 실어 오고 나서야 그녀는 손을 내렸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디아가 식기를 내려놓자 에드윈도 일찌감치 식사를 끝내려는 듯 손을 닦았다.

“당신은 더 먹어요. 그걸로 안 되잖아요.”

“괜찮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장에 치료사를 데려오길 잘했군. 불러와.”

“별거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그건 치료사가 말해 주겠지.”

석화가 가득 담겨 있던 접시를 치우고 나서 괜찮아졌다는데도 고집이었다. 지난겨울에 큰일이 있은 이후로 에드윈은 그녀에게 조금만 이상한 낌새가 보여도 유난을 떨었다. 처음에는 기꺼웠고 나중에는 귀찮았으며 지금은 포기했다.

“당신은 안으로 들어가지.”

그녀가 무어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에드윈은 일을 착착 진행시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원목으로 지어진 우아한 별장의 응접실에 앉아 치료사의 진찰을 받고 있었다. 에드윈은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였다.

나디아는 몇 가지 질문을 건네는 치료사의 말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치료사가 제 품속에서 꺼낸 수첩에 무언가를 적으며 긴가민가하더니 비슷한 진찰을 한 번 더 하고 나서야 슬며시 웃음을 띠었다. 심각한 얼굴로 옆을 지키고 있던 에드윈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별생각 없이 앉아 있던 나디아도 치료사의 밝은 얼굴을 보고 나서야 슬그머니 혹시나 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월경 소식이 없었다.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각하, 귀부인, 축하드립니다.”

짐작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어디선가 탄성이 들렸다. 치료사의 뒷말을 듣기도 전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임신입니다. 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제 생각에는 4주에서 5주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치료사의 말에 그동안의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상상만 하던 때에는 그리도 복잡한 상념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더니 막상 귀로 듣자 마냥 기쁘고 기쁘기만 했다.

나디아는 이 소식에 에드윈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분명 그 역시 기쁜 얼굴을 하고 있겠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나디아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윈의 얼굴은 얼어붙은 듯 싸늘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듯 뒤늦게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그가 나디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항상 뜨거운 온기를 품고 있던 그의 손이 차가웠다.

“기다리던 소식이군. …둘만 있게 다 나가 봐.”

그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불쾌한 감각이었다.

축하 인사를 건네고는 빠르게 자리를 비키는 사용인들의 눈을 의식해 계속 웃는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에드윈의 보인 석연치 않은 반응의 이유가 무엇일지 고민했다. 하지만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드윈과 나디아, 두 사람만 남은 응접실의 문이 자그마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돌아선 남자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뒷모습만 봐도 그의 기분이 저조해졌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그를 따라 덩달아 일어선 채 초조하게 손끝을 매만졌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갔다. 에드윈이 실은 아이를 싫어했던가? 대체 어디에 그의 기분을 망가트릴 여지가 있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에드윈이 기뻐할지도 모른다며 혼자 했던 상상이 우스운 것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이런 반응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는 후계자가 필요 없었던 걸까? 간혹 뛰어난 자식을 후계자가 아니라 라이벌이나 장래의 찬탈자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가 그런 부류인 것인지.

나디아는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 시기인데 후계자라는 말을 쓰기는 너무 일렀다.

그녀가 간신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는 용기를 쥐어짜 냈을 때 에드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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