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나디아는 아랫배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특별한 일이라고는 없는 안온한 일상을 영위하기 시작한 것도, 에드윈과 제법 멀쩡한 부부 사이가 된 것도 이제 4개월.
걱정할 것 하나도 없이 평온한 나날을 보낸 덕인지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난 참이었다.
여자라면 자연스럽게 달마다 겪게 되는 일이 고민이 되어 버린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에드윈과는 주기적으로 밤을 보냈고 두 사람 다 특별히 피임에 신경 쓰지 않았으니 아이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데, 날짜가 일정하진 않았지만 매달 꼬박꼬박 월경이 찾아왔다.
기대했다가 실망한 게 몇 번인지, 체감으로는 몇 년은 된 것만 같았다. 이번 달도 기다리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초조해하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대귀족의 아내라는 그녀의 위치를 생각했을 때 제법 중요하고도 심각한 일이었다.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후계자 생산이 주목적인 귀족들의 결혼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기본적인 이혼 사유였으니까.
후계자로 삼기에 적합한 남자아이를 낳는다는 건 귀부인에게는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해 주는 수단 중 하나였다.
에드윈은 아이에 크게 집착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 일로 나디아를 내쫓거나 그녀가 떠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해 왔다. 그저 홀로 느끼는 압박감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자며 털어 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침울해진 나디아의 얼굴을 살피던 하녀들은 말을 아꼈다. 속옷에 피가 비칠 때마다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아 왔으니 무엇 때문인지 빤히 알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녀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어설픈 위로 대신 달콤한 간식거리를 가져와 내밀었다.
그 선택은 탁월했다. 손톱이라도 물어뜯고 싶었던 초조함이 달콤한 크림이 뒤덮인 케이크 한 조각에 녹아내렸다.
차가운 허브차를 반쯤 비우고 뜨끈하게 달아오른 온실의 공기와 뒤섞인 온갖 꽃향기를 몇 번이고 들이마시다 보면 우울함이나 자책 같은 건 잦아들었다. 하지만 생각마저 멈출 수는 없었다.
타샤를 찾아가 왜 아이가 생기지 않는지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 사실 이미 그녀의 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언을 들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머리로만.
처음으로 아이를 가졌던 시기에 내내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던 만큼 임신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거라고 생각하면 참을 만했다.
지금은 아이가 생기더라도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끔찍한 의문이 뒤따르진 않을 테니까. 또 어쩌면 에드윈이 기뻐할 수도 있고, 예전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른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고민이라도 있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어깨가 튀어 오를 정도로 놀라며 뒤돌아봤다.
어느새 하녀들은 모두 나가고 없었다.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셔츠 차림의 에드윈만이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의 반듯한 이마와 목덜미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왜 기척도 없이 다녀요?”
핀잔을 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소파를 뛰어넘은 남자가 나디아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쿠션과 함께 그녀의 몸도 출렁거렸다.
훌쩍 가까워진 에드윈에게서 옅은 땀 냄새와 제비꽃 향유 그리고 말 냄새가 함께 풍겼다. 타샤에게 받은 목걸이가 아니었다면 가시지 않은 열기 역시 느껴졌을 것이다.
나디아는 항상 지니고 다니던 손수건을 꺼냈다. 그의 이마를 적시고 뺨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자 에드윈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젖은 금발을 가지런하게 쓸어 넘기고 나서 시선을 내리자 단추가 서너 개 풀린 헐렁한 셔츠 안쪽으로도 땀으로 번들거리는 쇄골이 보였지만 차마 뻔뻔하게 거기까지 손을 뻗을 수 없었던 나디아는 머뭇거리며 손을 내렸다. 아니, 그러려 했다.
에드윈이 거두려던 손목을 낚아챘다. 살갗에 닿는 피부는 습하고 열병이라도 앓는 사람의 것처럼 뜨거웠다.
다시 눈을 뜬 남자가 짓궂게 웃었다. 그녀가 어떤 전조를 느끼기도 전에 그는 붙잡은 손을 잡아당겼다.
“여기도 닦아 줘야지.”
뜨거운 열기가 머문 가슴팍에 손이 닿자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꼭 저잣거리의 시정잡배처럼 치근덕거렸다.
나디아는 어설픈 손길로 가슴팍과 쇄골 근처를 닦아 주다가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손을 뺐다. 에드윈도 이번에는 순순히 바라보기만 했다.
“뭘 하고 왔길래 이렇게 땀이 나요?”
그녀는 제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들키지 않으려 서둘러 말을 걸었다.
“영지 시찰.”
“이런 건 없어요?”
나디아는 제가 걸고 있던 푸른 보석이 매달린 목걸이를 가리켰다.
“걸리적거려서. 그건 그렇고 슬슬 나가는 건 어때? 한여름에 온실이라니, 죽겠군.”
셔츠 앞자락을 펄럭이며 앓는 소리를 내는 그의 이마 위로 나디아가 닦아 낸 보람도 없이 다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제야 화들짝 놀라듯 정신을 차린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들은 더울 거라는 사실을 자꾸 깜빡했다.
에드윈은 부축을 핑계로 나디아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옆구리에 꽉 붙인 채 걸었다.
축축하게 젖은 가슴팍에 뺨이 문질러지고 한결 진한 체취가 훅 끼쳐 와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민망하게 머리꼭지까지 열이 올랐다. 어떻게 된 남자인지 땀 냄새조차도 불쾌하지 않았다.
“같이 목욕이라도 할까?”
“땀 냄새 나니까 저리 가요.”
쑥스러움을 감추려 퉁명스럽게 대답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절절한 사랑 고백이 있었다고 해서 에드윈 엘란츠가 다정하고 자상한 신사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제멋대로였고 매사에 거침이 없었다.
다만 고급 창부를 대하는 듯했던 꺼림칙한 태도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의 연한 보라색 눈에 어린 감정은 약간의 장난기와 감출 필요도 없다는 듯 가감 없이 흘러나오는 애정이었다.
“그러니까 같이 씻자고.”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에드윈은 방에 있던 하녀들에게 목욕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나디아는 들으란 듯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분주하게 욕실을 오가며 욕조에 물을 채운다, 꽃잎을 띄운다, 바쁜 하녀들을 지켜보던 나디아는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바닥이 슬금슬금 위로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당황하며 남자의 손목을 붙잡아 멈추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젖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아!”
나디아는 서둘러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녀가 뱉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들은 하녀들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 목격한 탓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미쳤어요?”
낮은 목소리로 급하게 따졌지만 에드윈은 뭐가 문제냐는 듯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얇은 옷 위로도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살덩이를 주무르고 젖꼭지를 꼬집었다. 가뜩이나 긴장 상태에 있던 몸이 성감으로 달구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다리를 비비 꼬고 싶어지는 야릇한 감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정말이지 고약한 취미였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성벽이라도 있는 건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냥 탓하고 싶다가도 이런 상황이 끔찍하리만치 싫지는 않다는 사실에 충격이 찾아왔다.
괴상한 성벽을 가진 변태 같은 남편에게 옮았나 보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도 자제할 줄 모르는 몸의 반응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가는 제삼자의 앞이 아니면 안 되는 몸이 되는 것은 아닌지. 지나친 비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싫지 않을 수 있는지, 정숙한 귀부인이 되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니 일렁이는 감정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동안 감정을 한껏 죽이고 죽이며 살아온 반동인지, 고삐가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별거 아닌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받아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기 시작하자 말려도 소용없던 음탕하기 짝이 없는 손놀림이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목욕 준비가 끝났다고 말하던 하녀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에드윈은 서둘러 그들을 밖으로 내쫓고 문을 닫았다.
나디아의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숙인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당황을 미처 감추지도 못한 얼굴이 시야를 침범했다.
“왜…. 그….”
할 말을 찾는 중인지 몇 번이나 달싹이던 입술이 더듬거렸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뺨과 눈 밑을 쓸며 눈물을 거둬 갔다.
“…싫었어? 나는….”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띠던 얼굴이 저로 인해 무너지는 건 제법 짜릿한 일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또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던 건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녀 역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눈물이 나는 이유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에드윈은 싫어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실은 싫지 않았다. 싫지 않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앞에서 그가 만지려 들면 눈앞이 아뜩해질 정도로 수치스럽고 끔찍했는데, 이제는….
“싫은, 싫은 게 아니라….”
“아니라고?”
그가 나디아의 목소리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는 것이 보였다. 얼굴에 다시 열이 몰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사과 같은 꼴이 됐을 거라는 사실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앞에 선 남자의 어깨를 밀었다. 앙탈로 느껴질 만큼 보잘것없는 힘일 텐데 에드윈은 거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빠진 얼굴을 했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자꾸만 그의 탓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 본래 이런 취향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분명 그가 했던 짓들이 어떻게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충격적이고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데 자신이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인정하기는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래, 다 내 탓이겠지. 당신이 울 만한 일을 저지를 자식이 나 아니면 누가 있겠어? 그건 내가 용납 못 해.”
그리 말하면서도 에드윈은 그녀가 우는 이유가 그저 창피함을 이기지 못해 칭얼거리고 싶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당황을 거두었다.
그는 나디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얼떨결에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시야가 훌쩍 높아졌고 그가 걸을 때마다 몸이 조금씩 흔들렸다.
욕실에 도착하는 동안 눈물도 그쳤다. 그리 심하게 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욕실에 걸려 있는 커다란 거울에 비친 제 눈가가 붉게 물든 것을 멋쩍은 낯으로 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디아가 욕조의 수면 위를 빼곡하게 채운 이름 모를 붉은 꽃잎에 시선을 못 박은 동안 에드윈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넓은 욕조 턱에 내려놓았다.
그는 바닥을 적신 물에 바지가 젖어 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신발을 손수 벗겼다.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고 있던 에드윈의 손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종아리를 문지르며 순식간에 위로 올라왔다. 뱀이 기어가듯 매끄러운 손길이 치마 트임 사이를 파고들더니 엉덩이를 꽉 쥐었다.
나디아는 당황을 감추지도 못한 채 속옷 끈에 손가락을 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같이 목욕하자고 조르던 목소리가 이제야 떠올랐다.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었던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내가 벗을 테니….”
“부끄러워서 그래?”
수도 없이 몸을 섞은 사이에 옷을 벗기는 것 정도로 부끄러워할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할 만했다. 나디아도 단지 그것 때문에 에드윈의 손을 붙잡은 건 아니었다. 물론 아직도 조금 쑥스럽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게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미처 어떤 변명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인내심의 끝을 마주한 남자가 속옷 끈을 쉽게도 풀어냈다. 순식간에 자그마한 천 조각이 에드윈의 길쭉한 손가락에 걸려 다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디아가 서둘러 허벅지를 오므려 힘을 주었지만 늦은 일이었다. 이미 그는 그녀가 흘린 액체로 젖어 색이 진해진 속옷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디아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녀는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두 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니까….”
눈치가 비상하게 빠른 남자였다. 그녀가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리며 칭얼거린 이유를 순식간에 알아채 버렸다. 당장이라도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정답을 향해 흘러가는 생각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게 나 때문이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