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107화 (107/115)

107.

갑작스럽게 결정된 소풍 장소는 기껏해야 성의 뒤뜰 잔디밭이었다. 이젠 걷는 것보다 익숙해진 에드윈의 품에 안겨 내려온 나디아는 여전히 만개한 장미 덤불이 몸을 흔들 때마다 뿜어내는 짙은 향기를 한껏 들이켰다.

“정원사가 고생했겠어요.”

“나도 고생했어.”

그는 불퉁하게 답하며 볕이 잘 드는 정원 한쪽에 나디아를 앉혔다. 돗자리 아래로 짓눌리는 푹신한 잔디가 햇볕을 흠뻑 머금어 따뜻했다. 그녀는 별 의미 없이 잔디를 쥐어뜯으며 웃었다.

“정원사에게 하는 치하의 말도 가로채고 싶어요?”

“그래. 왜? 이런 남자는 별로인가?”

나디아는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처구니없고, 유치하고, 우스웠지만 싫지 않았다.

하녀들이 간식거리가 든 커다란 바구니를 가져오는 게 보였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간단한 주전부리를 꺼내 놓은 하녀들이 썰물이 빠지듯 물러났다.

그녀는 마치 봄을 처음 맞이하는 사람처럼 푸르게 물든 풀밭을 매만지다 손끝에 걸리는 연보라색 제비꽃 줄기를 꺾었다. 꽃향기와 희미한 풀 냄새가 났다.

에드윈이 그녀의 곁에 앉았다. 나디아는 용기 내어 꺾은 꽃을 남자의 귓가에 꽂았다. 얌전히 앉아 그녀가 하는 짓을 받아 주던 에드윈과 눈이 마주쳤다.

꽃이 잘 어울리는 남자라니. 우습기는커녕 아름답기만 했다. 그는 꽃향기만큼이나 달콤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미소도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에드윈이 보자기가 덮여 있던 바구니를 끌어당겼다. 식사 사이에 먹을 만한 간식거리를 조금 담아 온 것치고는 바구니가 지나치게 크지 않나 생각했던 것에 답하듯 에드윈은 그 안에서 커다란 천에 돌돌 감긴 물건을 꺼냈다.

나디아가 그 물건의 정체를 가늠하려 들기도 전에 에드윈이 천을 풀었다.

“제작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어. 늦지 않게 주고 싶었는데.”

그녀는 제게 내밀어지는 류트를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몸체가 손에 착 감겼다.

“이건….”

뭐가 갖고 싶으냐는 질문에 류트라고 대답했던 기억은 오늘까지만 해도 나디아는 잊고 있었고 에드윈이 준 화려한 선물을 받고 나서야 그도 잊었나 보다고 스치듯 떠올렸을 뿐이었다.

무엇이 가지고 싶으냐는 질문에 바로 떠오를 만큼 간절했던 것도 아니고 적당히 언급했던 물건일 뿐인데.

에드윈이 제 사소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서운함을 느낀다는 자체가 우스웠다. 드러내기 면구스러워 애써 외면했던 서운함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녀는 깨닫지 못했지만 입가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잊은 줄 알았어요. 선물로 브로치를 줬으니까….”

“그것도 선물이고 이것도 선물이지.”

그가 손을 뻗어 웃음기가 매달린 나디아의 뺨을 매만졌다.

“이게 더 마음에 드나 보군.”

그제야 제가 웃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머쓱했지만 그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어놓기 쑥스러운 말이라는 사실은 여전했다.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얼굴을 감출 수 없게 되어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손길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뺨 위를 스친 손끝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젖히며 귓가에 닿았다.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짜릿한 감각에 나디아는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반응은 아랑곳 않는 듯 에드윈은 솜털이 가시지도 않은 부드러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연주해 주기로 했잖아.”

“그런 적 없잖아요.”

분명 제 입으로 연주해 주겠다고 한 기억은 없었다. 저 좋을 대로 교묘하게 이용하는 재주는 여전했다.

“용케도 기억하네.”

에드윈은 짓궂게 웃었다. 그를 흘겨보며 류트를 끌어안은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현을 튕겨 보았다.

“좋은 소리가 나네요.”

“그래? 난 악기는 문외한이라.”

귓불을 문지르던 손끝이 연한 귓바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나디아는 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간지러워요.”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이 얽혔다. 요즘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에드윈은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접촉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성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손을 잡거나 뺨을 매만지거나, 어깨가 닿도록 붙어 앉거나 그도 아니면 쉼 없이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에게 잡혀 있는 동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건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꽤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 속에서부터 깃털을 한 움큼 쥐고 마구 간지럼을 태우는 듯했다. 재채기가 나올 것 같기도 했고 몸을 배배 꼬고 싶기도 했다.

에드윈이 조금이라도 제게 닿으려 드는 것을 나디아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도 그리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손을 내밀어도 그가 잡아 주지 않거나 뿌리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망설이고 있자면 에드윈은 먼저 손을 뻗었다.

말하지도 않은 속내를 알아채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그의 능력은 놀라웠다. 사실 그에게 남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게 될 정도로. 대체 어디에 이런 모습을 숨겨 두고 있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정말 연주해 주지 않을 셈인가?”

별거 아닌 연주에 왜 이리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한다면 유명세를 떨치는 악단도 성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사람이.

그녀는 투덜거리면서도 류트를 품에 안으며 가장 실수를 덜할 만한 쉬운 곡을 떠올렸다.

“웃으면 안 돼요.”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지만 그가 말을 잘 지킬지는 알 수 없었다. 에드윈의 입가에는 이미 웃음이 걸려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기분 좋은 미소였다.

무엇 때문인지 모를 긴장으로 떨며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손끝만큼 떨리는 소리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음이 한번 튈 때마다 연주해 달라며 조르던 에드윈을 향한 원망마저 느껴졌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래. 누구도 듣지 못할 변명을 되뇌며 형편없는 연주를 끝낸 그녀는 적막을 틈타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던 천을 끌어당겼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류트를 천으로 돌돌 감싼 나디아는 악기를 다시 바구니에 넣어 버렸다.

그 일련의 행동은 에드윈이 무언가 한마디 꺼내 보기도 전에 잽싸고 물 흐르듯 이루어졌다.

“…누구 앞에 선보일 만한 솜씨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아무 말도 안 했어.”

웃음을 참는 듯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슬그머니 허리를 감싸 끌어당기는 팔을 모른 척했다. 몸이 쉽게도 남자의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잠시 긴장했던 나디아는 이윽고 에드윈의 가슴팍에 등을 기댄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자 뒤통수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생각해 보겠다던 답은 아직인가?”

빈말이어도 듣기 좋았다는 말은 할 수 없었는지 에드윈이 말을 돌렸다. 나디아는 추궁하는 대신 바뀐 화제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이 주제로 대화를 다시 나눠 봐야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던 생각을 드디어 입 밖으로 끄집어내 털어 버릴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내가 잊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디아는 남자의 귀를 반쯤 덮은 밝은 금발을 홀린 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서로를 보면서 괴로운 기억이 자꾸 떠올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에드윈은 이미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 균열이 간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든 메워 보려 애쓰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하고 함께 있는 동안 혹시라도 불편해하는 기색은 없는지 살피는 시선과 그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하지만 캐묻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신경 쓰는 모습들.

그 사소하고도 꾸준한 노력들은 그답지 않게 서툴기 짝이 없어서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글쎄, 확언할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리에겐 망각이 있잖아.”

에드윈이 투명한 글라스를 들고 병을 기울였다. 투명한 자주색 액체가 잔의 밑바닥을 채웠다. 그는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향을 맡았다. 보석 같은 빛깔의 와인이 유리잔 속에서 찰랑거렸다.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억할 순 없어. 좋은 기억들을 계속해서 쌓아 가다 보면 그 기억에 밀려 나쁜 것들이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지.”

에드윈은 그리 말하며 와인을 마셨다. 그의 입술이 붉게 물드는 것을 바라보던 나디아는 가슴속, 가장 어두운 밑바닥부터 희미하게 빛이 새어들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녀는 그 빛이 헛된 기대가 되기라도 할세라 급하게 입을 놀렸다.

“나는… 자꾸 당신을 시험하려 들지도 몰라요.”

나디아는 두려운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신은 귀찮고 성가시다고 느낄지도 모르고, 시간이 지나면 나 같은 여자의 비위를 더는 맞춰 주고 싶지 않아질지도 모르죠.”

“내 사랑이 식을까 봐 겁이 나?”

이러쿵저러쿵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였다. 나디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사랑이 식어 버릴까 봐 두렵다는, 차마 입 밖으로 내기도 우스울 만큼 한심한 생각을 에드윈은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역시 그에게 남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남자의 뜨거운 손이 나디아의 손을 움켜쥐었다.

“당신이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손을 끌어당긴 남자가 움츠러든 그녀의 손바닥 안쪽에 입 맞췄다.

“우리가 같은 입장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되잖아.”

그의 입술이 흘려내는 말은 알 듯 모를 듯했다. 같은 입장이라니?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알아챈 듯 에드윈이 낮게 한숨을 흘렸다.

“나 역시도 당신의 마음이 식을까 겁이 난다는 뜻이지.”

나디아는 눈을 크게 떴다. 제 감정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바빠서 그 역시도 저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나 생각이 짧은 건지.

“나는 제법 끈질긴 남자거든.”

그는 그녀에게 여전히 조금이라도 불안이 남아 있다면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듯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증명할 자신 있어.”

그 말을 듣고도 나디아는 미적거릴 수 없었다. 또 한 번 온 마음을 던져 보고 싶다는 마음을 이끌어 내는 강렬한 유혹이 그녀의 앞에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또다시 후회하게 되면 어떡하지? 나디아는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대답했다. 후회 없도록 만들어야지.

그녀는 긴장으로 물든 에드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용서였고 동시에 사랑이었다.

바람이 두 사람을 감싸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에드윈의 귓가에 꽂혀 있던 꽃은 떨어졌지만 꽃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가 만개했다.

“곧 아네모네가 필 거야. 꽃이 질 즈음엔 오렌지꽃 향기가 도시를 가득 채우겠지.”

나디아는 그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진한 꽃향기가 강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밀려들어 오는 테라스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해가 지날수록, 이 도시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될 거야. 그렇게 당신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나를 새겨 넣는 거야.”

나디아는 에드윈의 부드러운 금발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 남자에게 이런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녀가 그랬듯이 그도 몰랐을 것이다.

“여름에는 함께 호수에 가자.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 그러면 실수로 빠지게 되어도 두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가을엔….”

혹여 그녀가 떠나겠다고 할까 봐 스스로도 민망해 어쩔 줄 모르면서도 앞으로의 계획을 늘어놓는 에드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더는 어린 시절처럼 분수대 근처를 맴돌며 사랑받는 타인의 모습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디아는 겨울에서 다시 봄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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